72화
남의 일처럼 듣고만 있던 희림이 그러지 말라며 뒤늦게 고개를 흔들었다. 절대 그럴 필요 없다고, 손을 흔들어보았지만 변호사는 이미 서류를 꺼내어 들었다.
“인건비부터 시작해서 체류비나 제작비, 관련된 모든 비용은 계약서에 따라 한울 그룹에서 부담할 겁니다.”
“……말도 안 돼. 그, 그 돈이 다 얼마라고.”
“얼마든, 변상하겠습니다.”
기다린 듯 다음 서류를 준비하는 변호사의 손이 신속했다. 경악한 연주가 이게 다 어찌 된 일이냐 눈짓을 보냈지만 희림이라고 알 리가 없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아니 믿고 싶지 않은 성진은 기어이 조감독에게서 휴대전화를 뺏어 들었다.
“당신들 내가 가만 안 둬. 그렇게 돈으로 때워보려는 작정인가 본데……. 아, 네. 이사님! 접니다!”
희림과 그 무리를 한가득 흘기던 성진이 보란 듯 휴대전화 속 목소리에 반색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따로 중계가 필요 없었다.
“아니, 혹시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이게 다 무슨 소리입니까? 작가가 이제 와 멋대로 취소를 하겠다니.”
- 야, 지금 그게 문제야! 너 진짜 미쳤어!
“……네?”
- 지금 촬영이 문제가 아니라고. 뭘 어쩌고 다녔으면 한울에서 우리를 인수한다 어쩐다 이야기가 나와?
“…….”
귀가 따가운 고성에 성진이 잠시 휴대전화를 귓가에서 떼어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이번 사안의 심각성만큼은 절절히 인지한 모양이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이사님, 인수라니요?”
- 그걸 내가 알아? 지금 대표님 그쪽이랑 회의하고 난리인데, 너 진짜 내가 성질 좀 죽이고 다니라고 몇 번을 말해! 아무튼 작가한테 빌든 기든 다시 촬영 허락 못 받아 올 거면 사표 쓸 각오 하라고!
“…….”
뚝, 멋대로 끊긴 전화에 한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초점도 없이 눈을 끔뻑거리는 성진의 시선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벌어진 일에, 그가 입을 가린 채 조감독의 팔에 몸을 기대었다.
“조, 조감독. 다른 애들 다 어디 갔어?”
“감독님.”
“얼른 다 데려와. 못 들었어? 지금 나 혼자서 될 일이 아니잖아. 다 같이 가서 어떻게든 설득이라도 해보려면,”
“죄송합니다만, 그것도 어려우실 듯싶습니다.”
변호사가 새삼 안타까운 얼굴로 다음 서류를 내밀었다. 거기에 적힌 인물들의 이름이라면 성진이 굳이 상기할 이유조차 없었다.
“이, 이 사람들이 왜!”
“그동안 촬영 중에 있었던 불공정 대우와 폭언, 욕설에 대한 고소장입니다. 저희 측에서 무료로 진행하기로 했고 흔쾌히 동의하셨습니다. 물론 장애인에 대한 처우와 모욕에 대한 고소는 따로 들어갈 예정이고요.”
“…….”
“참, 조감독님께서는 여기 함께 계시느라 따로 연락을 드리지 못했는데 동참하실 생각이시라면 지금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그가 의중을 묻듯 부드럽게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일제히 제게로 쏠린 시선에 조감독이 마른침을 삼켰다. 희림을 빤히 보던 그녀가 슬금슬금 그들 쪽으로 이동하자 머리를 싸쥔 피디가 비명을 질러댔다.
“아아악! 이, 이게 말이 되냐고!”
“본인께서 말이 되게 만드신 줄 압니다. 그리고 함부로 작가님 만나실 생각은 접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본인의 책을 이렇게 더러운 사건에 휘말리게 하신 자체로 굉장히 불쾌해하셨으니까요.”
“아…… 안 돼. 하, 한 번만 만나 뵙고, 일단 만나게만 해주시면 제가 알아서 매달려보겠습니다!”
막다른 곳까지 내몰린 성진이 재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미소로 다가온 그가 비굴할 정도로 고개를 굽신거렸다.
“아, 아무래도 작가님께서 오해가 있으신가 본데…….”
“죄송하지만 저희는 작가님 의중을 전해드리기만 하는 거라서요.”
“하지만 방금 대리인이시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나의 아름다운 숲에 관한 모든 저작권은 이미 다른 분께 위임되었습니다.”
변호사가 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서류이자 본론을 꺼내어 들었다. 길고 긴 법률적인 내용을 짧고 간결하게 간추리는 면모가 과연 대한민국 최고의 법무법인의 명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저희 작가님께서는 여러 단체와 각계각층 관계자들의 자문 끝에 이 책 본연의 집필 의도와 의미에 가장 잘 부합할 수 있게끔, 청연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끼는 분께서 맡아주시는 게 가장 적합할 거라 판단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게 누구란 건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안온마을 청년회 및 상가 번영회의 한희림 회장님.”
“…….”
임명장처럼 건네주는 서류를 두 손으로 받아 든 희림이 긴 숨을 들이쉬었다. 여전히 영문을 모를지언정, 그녀의 인생을 통틀어 한번 임명된 회장직을 내쳐본 적은 없었다. 뭔지는 몰라도 일단 하고 본다. 눈빛으로 전해지는 연주의 굳건한 지지에 희림은 새삼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았다.
“네. 최선을 다해 보내주신 성원과 믿음에 보답하겠습니다.”
물론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 ◆ ◇
“희, 희림 씨. 아니. 회장님! 일단 얘기 좀! 네?”
“…….”
경찰서를 나서는 희림의 뒤로 성진이 다급하게 따라붙었다. 무표정하게 계단을 내려서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봤지만 이내 연주가 매섭게 그를 밀어냈다.
“이보세요! 우리 회장님 바쁘시다잖아요!”
“……하, 하지만.”
“이러시면 곤란해요. 아시겠어요?”
그 어느 때보다 감정에 몰입한 연주가 희림을 단단히 보좌했다. 하지만 친구의 얼굴에 가득한 화색과는 달리 희림의 눈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게 다 뭐람.
보는 이가 많다 보니 겨우 버티고는 있지만 적응할 수가 없다. 한울 그룹은 다 뭐고 저작권은 또 뭔지. 이렇게 저를 둘러싼 모든 것이 꿈같이 느껴질 땐, 그 꿈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사람을 찾아내야만 한다. 마침 휴대전화를 들자마자 찍힌 그의 이름에 참고 참은 숨이 터져 나왔다.
“강인하!”
- ……잘하고 왔어?
웃음기 어린 음성이 꼭 함께 있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슬쩍 들어올린 야구 모자 아래 그의 눈매가 벌써부터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것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이 가슴이 뛰어대는 그녀가 휴대전화에 꼭 매달렸다.
“나, 나 감옥 안 간대!”
- 잘됐네. 그럴 줄 알았어.
“응!”
벌써 눈이 그렁그렁하면서도 이것으로는 어딘가 부족했다. 여전히 오고 가는 이들을 의식한 그녀가 머리를 쓸어넘기다 말고 계단을 내려서는 한 무리의 변호사들을 바라보았다. 먼저 묵례하는 그들에게 따라 고개를 숙였지만 두 뺨이 얼떨떨했다.
-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금세 날카로워진 그의 목소리에 희림이 보이지도 않을 고개를 흔들었다. 저 사람들이 누군지 인하에게도 말해주고 싶지만, 이 믿을 수 없는 일을 어디서부터 설명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당장 저부터가 믿지 못할 이야기 대신 희림은 서로에게 가장 익숙한 말로 간추려보았다.
“아. 있잖아. 나 또 회장님 됐어.”
- ……그래?
“어.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렇게 됐나 봐. 솔직히 내가 한 거라고는 그냥 주어진 자리에서 청연을 위해 열심히 일했던 것뿐인데…….”
소곤소곤, 누구 할머니네 손녀라고 희림의 비밀스러운 소감도 못지않았다. 새침해지는 그녀의 표정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인하의 웃음이 이어졌다.
- 그거 봐. 넌 타고난 회장이라니까.
“음, 그래도 정말 이렇게 맡아버려도 되는 건지. 내가 뭘 할 줄 안다고.”
- 안 되는 게 어딨어. 한희림한테.
“……뭐야, 그게.”
수화기에 꼭 붙였던 희림의 뺨이 열기로 간질거렸다. 조금 전까진 이 자리에 없는 그의 빈자리가 그리도 아쉽더니 차라리 없는 것이 나을 것도 같았다. 볼썽사납게 불타오르는 얼굴로 인하를 마주할 바에야.
“어, 어쨌든 나도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니까. 갑자기 한울인지 뭔지 그런 회사에서 사람들이 나올 줄이야.”
- ……한울이라고?
“응. 나도 명함만 받아서 잘 모르겠는데 거기 법무팀이랬어. 들어보니까 거기서 작가님 위임으로 제작사를 사들인다던가 뭐라던가…….”
흥분한 희림이 기억나는 대로 설명을 이어갔지만 어쩐 일인지 인하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무거운 숨소리만이 그가 제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촬영한 거 다 없애고 새로 제작도 할 수 있대. 내가 결정하기만 하면.”
- …….
“그치만 아직은 나도 너무 복잡해서 무슨 말인지……. 아아. 잠시만. 저기부터 좀 말려봐야겠다.”
손등을 붙여 열 오른 얼굴을 식혀보던 희림이 아직도 소란스러운 연주와 성진을 돌아보았다. 며칠간 얼마나 한이 맺혔는지, 연주는 보란 듯 두 팔까지 걷어붙였다.
“이보세요, 김성진 씨. 저희 회장님께서 더는 할 말 없다고 했잖아요!”
“그, 그러지 마시고…….”
“그러게 감당할 수 있는 말만 하셨어야죠. 꼴랑 서울에서 피디님 소리 좀 듣는다고 뭐라도 되는 줄 아셨나 본데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거든요.”
그 누구보다 충성스런 회장님의 보좌관으로 다시 태어난 연주는 가차 없이 눈을 치떴다. 성진이 제발 이러지 말라 두 손을 모았지만 그가 한 짓을 생각하면 그리 쉽게 넘어가질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