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좋아요. 저는 그쪽이랑 달라서 무작정 선 긋고 사람 무시하는 짓은 안 하거든요.”
“기자님!”
“진심 어린 성의를 보이라고요. 저희한테는 그렇게 들들 사람을 볶더니 그냥 미안하다 몇 마디로 넘어갈 생각이었어요?”
“……어휴.”
쟤 왜 저래.
제대로 빙의한 연주를 보다 못한 희림은 혀를 차며 다시 휴대전화를 붙들었다. 어서 빨리 모든 일을 정리하고 조용한 곳에서 인하와 마주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더 이상 그 어떤 불안함도 없는 둘만의 공간, 그 생각 하나로 며칠을 버텨왔다.
“하여튼 연주 제대로 날 잡았나 봐. 애도 아니고, 부끄럽게 뭘 저렇게까지 한담.”
- …….
“참, 강인하 넌 그럼 언제 내려오는 거야?”
막 생각이 난 것처럼 굴었지만 사실은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이 말 한마디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어쩐지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휴대전화 속으로 귀를 더 가까이했다. 겨우 몇 초간의 침묵이 경찰서로 출두하던 그 순간보다 더욱 떨려왔다.
“네가 그랬잖아. 주말에는 분명히 올 수 있다고.
- 미안한데 조금 더 걸릴 것 같아.
“……응?”
그나마 조용한 곳을 찾아 몇 걸음 나아가던 희림이 본능처럼 발을 멈추었다. 조금 더 늦을 거라는, 인하로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평범한 말이겠지만 제게는 그렇지가 않았다. 손에 땀이 나 다른 손으로 휴대전화를 바꾸어 들자 그의 음성이 이어졌다.
-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조금 더 마무리해야 할 일이 생겨서.
“하지만 주말에는 꼭 온다고, 나랑 약속도 했잖아.”
무어라 벙긋거리던 입술이 결국 같은 말만 반복했다.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말을 연이어 듣는 인하 역시 비웃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만큼이나 복잡한 음성이 탁하게 귀를 울렸다.
- 미안해.
“…….”
- 며칠만 더 기다려줘. 확실하게 마무리하고 가고 싶어서.
인하의 말을 들으면서도 이내 귓가가 이명처럼 멍하게 울렸다. 그렇구나. 의미 없는 소리만 주절거리다 결국 끊어진 휴대전화를 붙들고 희림이 눈을 깜빡거렸다. 꿈에서 깨어나려 인하를 찾았는데 어째 더 깊은 꿈에 빠져버린 기분이었다.
“회장님, 거기서 계속 뭐 하세요!”
“…….”
“회장니임!”
어느새 고개를 푹 숙인 희림을 찾아 부리나케 다가온 연주가 얼굴을 쑥 들이밀었다. 이참에 맺힌 걸 제대로 한번 갚아주자고, 과도하게 빛나는 두 눈이 그녀를 채근했다.
“존경하는 회장님, 저 잘나고 잘난 서울 피디님께서 저렇게나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야, 너 뭐 해!
연주가 얼른 장단 맞추라는 듯 감히 회장님을 팔꿈치로 찔러댔다. 우리한테 이런 기회가 얼마나 있겠냐며, 제발 점잔 떨지 말고 뭐라도 말해보라 이를 꽉 깨물었다.
“회, 장, 님!”
“……네에.”
“회장님께서 말씀 좀 해주세요. 피디님을 어떻게 처리하면 될까요?”
“…….”
연주가 자신의 팔을 마구 흔들고서야 희림이 눈가를 문질러보았다. 이제는 청연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이의 흔적 대신, 이를 질근 문 그녀의 손가락이 천천히 제 목을 그어나갔다.
“……없애버리세요.”
◇ ◆ ◇
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는 것이 자식의 일이라지만, 한울 그룹의 강 회장에게는 특히나 그러했다. 산고로 부인이 죽고 그렇게 얻은 큰아들을 남의 손에 키웠다. 한창 사업이 성장하던 때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핑계가 있긴 했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세심하거나 다정한 아버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에 비해 인하는 비교적 무탈하게 자라주었다. 자신을 닮아 성격이 조금 까칠하긴 하지만 성적이며 행동이며 크게 입에 댈 것이 없었다. 그 또래의 남자아이들이 종종 친다는 사고 한번 없어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한 번도 먼저 말을 꺼낸 적이 없을 뿐이지, 알아서 쑥쑥 자라는 큰아들은 언제나 그의 큰 자랑거리였다.
그렇다고 날을 잡고 ‘잘하고 있다’, 그리 대놓고 말해줄 관계도 아니었다. 그저 마주쳤을 때 집히는 대로 돈이나 주고 ‘더 잘하라.’ 눈짓만 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런 자신이 조금 너무한가 싶어졌을 때는 이미 제게는 다른 이가 생겼고 인하는 그 집을 떠났다.
이해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듣도 보도 못한 시골에는 왜.
좋은 소리는 그리도 안 나오더니 화와 분노는 기다린 듯 쏟아졌다. 하지만 저만큼이나 고집 센 아들은 기어이 그곳에 자리를 잡아버렸다. 얼마나 버틸지 두고 보겠다 큰소리쳤지만 그때부터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잠을 설쳤다.
지은 죄라는 게 그래서 무서웠다.
막상 인하를 보러 찾아가놓고도 ‘우리가 무슨 관계냐.’ 자신을 경멸하듯 바라보는 눈빛 앞에서는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영원히 제 곁을 떠나면 어찌할지, 한없이 막막해진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새로 얻은 가족들과 회사 일로 겨우 버텨가면서도 마음은 늘 저 멀리 산골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인하가 그를 찾아왔다.
슬슬 그럴 때도 됐다고, 네놈이 다른 도리가 있겠냐고, 저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부탁이 있다는 아들의 절박한 표정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이제야 다 해결이 됐다는 안도감에 그는 오직 한 가지를 요구했다.
모든 것을 잊고 미국으로 떠나라고.
돌아와 네 몫을 해낼 때까진 회사 일을 도와야 한다는 것도 잊지 않고 덧붙였다. 모든 것은 네게 달렸다며 은근히 아들이 굴복하는 순간을 기다렸다. 그 거칠 것 없던 아들의 눈이 흔들리는 그 순간을 즐겼다.
그게 제 인생 가장 큰 후회가 될지, 그 나이를 먹고도 몰랐지만.
“…….”
강 회장이 자신의 책장 한켠에서 책 한 권을 꺼내어 들었다. 공부를 마친 인하가 한국으로 돌아와 미친 듯이 일에만 매달리는 것을 알면서도 이상하게 눈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이미 지난 경험 때문인지 언제든 다시 떠나갈 것만 같은 아들을 바라보자면 어딘가 불안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리도 불안을 헤맬 때, 아들은 틈틈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세상을 그려내고 있었다.
‘나의 아름다운 숲’.
따라 읽는 것도 생소한 제목 속에 하루하루 빠져들었다. 제가 알지 못했던 아들의 그때 그 마음이 어떠했는지, 제가 그런 아들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도, 그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완성되지 못한, 자신이 앗아가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마지막 봄의 이야기에는 전에 없던 책임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에는 때가 있기 마련이라, 이제는 모든 것을 알아서 갖춘 아들에게 제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그리 많지 않았다. 점차 돈도 힘도 무의미해졌다. 10년 전 그때, 아들의 친구를 위해 의사들을 보내줄 수 있었다는 것이 제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는 것이 뼈저리게 사무치는 나날이었다.
결국 더는 자신이 필요치 않은 아들에게 제가 하는 거라곤 모른 척 굴어주는 것뿐이었다. 죽도록 일에 매달렸던 아들이 잠시만 틈이 나면 무엇을 하는지, 한 번씩 주말이면 훅 떠나는 곳이 어디인지, 제 몫은 충분히 한 것 같으니 이제는 좀 쉬고 싶다는 말에도, 그저 모른 척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아무런 표현이나 그 어떤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선물이었다. 심지어 그의 눈에는 어처구니없는 카페를 열겠다 했을 때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하면, 언젠가 한 번쯤은 정식으로 초대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유일한 희망 속에서.
그러나 그마저도 이제는 버려야 할지 모르겠다. 약속처럼 지켜오던 아들과의 선을 멋대로 넘어버렸으니 인하에게 무슨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 아마 지금쯤은, 제가 멋대로 개인 변호사가 아닌 한울 그룹의 법무팀을 보냈다는 소식을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똑똑.
나직하게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강 회장이 다시 책을 제자리에 꽂아두었다. 그제야 시간을 확인한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유독 길고 긴 하루에도 회사에는 아직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있으니까 들어와.”
“회장님.”
하지만 그중에 아들이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다. 드물게 당황한 강 회장이 반사적으로 책장을 바라보다 의자를 끌어당겼다. 뭘 하긴 해야 하는데 할 것을 찾지 못하는 기분은 또 처음이었다.
“흐흠, 여긴 언제 또 올라왔기에. 다시 안 올 줄 알았는데.”
“아직 못 끝낸 일이 남아 있어서요.”
“대체 그게 뭐라고 이렇게 갑자기.”
“반지요.”
“…….”
“반지를 주문했는데 급하게 내려가느라 못 찾았거든요.”
인하가 무덤덤하게 자신의 용건을 전했다. 혹여나 법무팀의 이야기를 꺼내려나 했는데, 저도 모르게 긴장했던 강 회장의 어깨에서 툭 하고 힘이 풀렸다.
“……그렇구나.”
“더 안 물어보시네요?”
“그거야 내가 말한다고 네가 들을 것도 아니고.”
강 회장의 중얼거림이 한탄처럼 흘렀다. 어차피 무얼 말한다 해도 돌릴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그렇지만 이대로 먼저 찾아온 아들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한참을 망설이듯 주저하던 그가 이내 서랍장의 마지막 칸을 열어 낡은 벨벳 상자를 꺼내어 들자 인하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게 뭔가요?”
“……네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남기신 거다. 너한테 직접 못 전해주셔서.”
“…….”
“그냥. 반지가 필요하다길래 혹시나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