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6/80)


은근히 정곡을 찌르는 정하 때문에 희림은 조금 전 연주와 있을 때보다 더 어색해졌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인하의 이야기를 꺼낸 지가 며칠은 지난 것 같다. 싸운 것도, 헤어진 것도 아닌데 어쩐지 그의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는 것이 가슴을 찌르르 울렸다.

“그냥. 어제도 전화했어.”

“뭐래?”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

아, 이래서 얘기하기 싫었는데.

괜히 코끝이 찡해오는 희림이 들고 있던 책을 펼쳐 얼굴을 가렸다. 그가 곧 온다는 사실보다 지금 그가 이곳에 없다는 것이 왜 이리 받아들이기 힘든지 모르겠다. 인하가 이곳에 다시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젠 그가 없는 청연은 상상이 가질 않았다. 

“……가만 안 둬. 예전에도 그러더니.”

“응? 예전에 뭘?”

“아냐. 그냥.”

원망 어린 혼잣말을 내뱉던 희림이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로써 인하가 돌아오면 할 말이 하나 더 늘어났다.

갑작스레 또 하나의 회장님이 되어버린 제 일상이나,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놀라운 일들, 거기에 더해 넌 왜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냐는 타박까지 줄을 잇게 생겼다.

“……빨리 오면 좋겠다.”

“불안해?”

“그렇다기보다는……. 야. 뭘 자꾸 물어!”

희림의 화살이 괜한 정하에게 돌아갔다. 그래도 싱글싱글 웃는 그의 순수한 웃음 앞에서는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리며 양 뺨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불안할 게 뭐 있어. 전화도 되고 언제든지 보려면 볼 수도 있는데.”

“그러게.”

“당연하지. 그리고 뭐…… 걔랑 나랑 무슨 사이라고.”

흥, 그녀가 새침하게 들고 있던 책을 주르르 넘겨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나마 이 책을 보는 것도 처음이긴 했다. 어쩐지 다시 들려오는 것 같은 정하의 조용한 웃음소리에 희림이 한숨을 내쉬었다.

“왜? 나 또 비웃으려고? 책 안 읽는다고?”

“그냥 보기 좋아서 그런 건데. 그리고 그거 네 책이잖아 이제.”

“……내 책은 무슨. 그냥 책임지고 청연에 잘 써달라는 건데.”

그의 의미심장한 말에도 희림은 연신 가지런히 잘 있는 머리칼만 넘겼다. 나의 아름다운 숲, 이제는 귀에 익을 만큼 익은 책들인데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명목상이나마 제게 권리와 책임이 넘어왔다는 것과는 별개다.

“사실은 있잖아.”

“응.”

“나 이 책 일부러 안 읽었어.”

“…….”

아마도 눈썹을 치켜세우고 있을 정하의 얼굴이 안 봐도 보였다. 연주가 있었다면 그런 핑계가 어딨냐 또 배를 잡았겠지, 웃을 듯 말 듯 희림의 입가가 움직였다.

“처음 제목 들었을 때부터 읽고 싶지가 않더라고.”

“왜?”

“나는 정말 마지못해 사는 지겹고 갑갑한 동네가 그렇게 아름답다고 하니까.”

“…….”

반쯤 농담처럼 시작한 말에 이상하게 목이 뜨거워졌다. 역시나 흐릿한 시야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글들을 무심코 흘려넘겼다.

“난 수십 년을 여기에 있어도 모르던 건데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은 여기가 그렇게 좋다잖아.”

“희림아.”

“좀 부끄럽더라고. 창피하고…… 바보 같기도 하고.”

툭, 결국 책을 덮어버린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자신은 아직 볼 준비가 안 된 것 같다는 변명 아닌 변명이 희미한 웃음과 함께 흩어졌다.

“어쨌든 기회가 되면 볼 일이 있겠지. 책은 몰라도 작가님은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정도가 아닐걸?”

“……응?”

“희림아.”

웬일로 그녀를 진지하게 부른 정하가 천천히 다가왔다. 영문을 모르는 희림이 눈을 크게 떠봤지만 그는 기어이 그녀가 내려둔 책들을 차곡차곡 한 권씩 다시 들었다.

“너 알지? 네가 약속 잘 지키는 것만큼 내가 비밀 정말 잘 지키는 거.”

“…….”

“그런데 한 번쯤은 안 지켜도 될 거 같아서.”

책을 집어 든 그의 웃음이 은은했다. 마치 10년 전 그때처럼, 정안의 서점에서 그러했듯 정하는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럼에도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느긋한 여유에 희림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지킬 건 지켜야지, 안정하 씨.”

“뭐 어때, 나 때문에 감옥 갈 결심까지 했던 너도 있는데.”

“……그건 당연히.”

“나도 내 친구 위해서 한 번쯤 비겁해져보려고.”

인하가 얼른 받으라며 희림에게 책을 건네주었다. 엉겁결에 받아 든 그녀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며 눈을 드는데 그는 전에 없이 완고했다.

“받아. 이제까지 누구보다 좋은 친구였던 한희림한테 주는 선물이야.”

“뭐야.”

잠시 긴장했던 희림이 보다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간만에 쥐어박을 듯 주먹을 쥐었지만 시늉으로 끝이 났다.

“안정하 너 내가 누군지 몰라? 이런 책 안 읽어도 나 청연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거든?”

“미안.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강인하야.”

“…….”

“그거 봐. 자기가 했던 말도 기억 못 하면서.”

“미, 미안……. 나도 내 마음이 도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본인조차 잊고 있던 기억의 파수꾼 노릇은 벗어던졌다. 울듯 말 듯, 희림의 들썩이는 가슴에 설핏 웃은 정하는 그럴 줄 알았다며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절뚝이는 걸음으로도 그는 기어이 널찍하게 거리를 벌렸다.

그사이 희림보다 더욱 무서워진 누군가의 말처럼, 대략 열 걸음쯤.

“넌 내가 그때 그 순간에 의사들을 만나 수술을 받게 된 게 기적이라고 했지?”

“정하야.”

“나한테 기적은 그 한 순간만이 아니었어. 청연에서 태어나 네 친구가 되고, 이런 시골엔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인하랑도 어쩔 수 없이 친구가 되고, 음.”

그 부분에서 정하가 못내 웃음이 나는지 입가를 기울였다. 그래도 이마를 긁적이며 꺼내는 한마디 한마디에 진심이 가득했다.

“다시 시간이 흘러서 네가 돌아오고, 더 이런 데랑은 상관이 없어진 인하가 또 한 번 내려오고, 그러기 위해 두 사람이 뭘 포기했는지,”

“…….”

“청연은 이렇게 작은데도 늘 사람들이랑 웃음으로 북적거리는 것도, 서울 대기업에서 이런 시골마을에 무슨 관심이 그렇게 많은지도, 이런 대단한 책의 배경이 하필 이곳인 것도, 신문만 펼치면 우리 서점이 올라가 있는 것도, 그렇게 전부 모여 지금의 내 기적이 이루어진 거야.”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책 다 읽으면. 그때 말해줄게.”

정하가 더 이상은 안 된다며 그답지 않게 단호해졌다. 어딘가 이상하다고, 벌써부터 가슴이 일렁이는 희림이 들고 있는 책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리 제대로 읽지는 못했다 해도 대충 어떠한 종류의 책인지는 몇 번 찾아본 적이 있다.

“음, 그치만 난 수필이나 기행문 같은 건 별로 취미가,”

“아니. 이건 그런 책 아니야.”

서점 주인 5년 차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언제 어디에 어떤 꽃이 피고, 어느 계절 몇 시엔 해가 얼마만큼 지는지, 청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그녀라지만 이것만큼은 모를 거라 장담했다.

“내가 본…… 금세기 최고의 러브레터라고.”

◇ ◆ ◇

“강인하!”

목이 터져라 그를 불렀다. 문득 바람을 쐬러 나왔던 병원 근처의 어둑한 골목에서 어딘가 눈에 익은 그림자를 좇았다. 잘못 본 것이 아닐까 두 번이나 눈을 비벼보았지만 결코 그럴 리는 없었다.

제가 아는 한, 이렇게 크고 넓은 어깨는 그 하나뿐이다. 잠시 청연을 벗어났을지언정 세상에 저런 무심한 그림자는 둘일 수가 없다. 그리 확신이 든 순간, 이미 그녀의 두 다리는 어둠 속으로 쫓아나갔다.

“강인하! 너 맞지?”

“…….”

역시, 맞구나.

드디어 걸음을 멈춘 인하를 보느라 숨이 차는 줄도 몰랐다. 며칠간 울고불고했던 눈이 아려오는데도 입술은 멋대로 올라갔다. 

“왜 그냥 가? 너도 정하 보러 온 거야?”

“……아니.”

“에이, 여기까지 와놓고, 너도 참.”

기어이 아니라는 그에게 웃으며 다가섰다. 인하의 커다란 몸이 움찔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때만큼은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있잖아. 정하 수술 잘됐대!”

기대고 싶었다. 며칠간 홀로 버텨보던 이 버거운 감정을 누구에게라도 기대어보고 싶었다. 처음 사고 소식을 듣고 눈물을 쏟아냈던 그의 앞에서 이제는 마음껏 웃어보고 싶었다.

“……그래?”

“응! 마침 서울에 엄청 유명한 의사들이 여기 다 내려왔다나 봐! 그래서 전부 다 잘됐다고!”

그날 제가 왜 그랬는지, 멋대로 그의 품에 안겨버렸던 걸 생각하면 부끄러움이 가득하면서도 다시 인하를 마주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얼른 그를 어둑한 골목 밖으로 이끌어내고 싶지만 그리 멋대로 손을 잡을 만한 사이가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저기, 내일이지?”

아마 이제는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정하의 소식에는 그리 환히 웃던 그녀의 입술이 자신의 이야기에는 바짝 말라버렸다. 설마 잊어버리기라도 했을까. 약속의 흔적을 찾아내듯 인하의 얼굴을 눈으로 더듬었지만 꾹 눌러쓴 모자 아래에선 그 무엇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뭐야. 넌 밤에 웬 모자를 써서는.”

“그냥.”

벗어주면 안 되겠냐는 말인데 인하는 덤덤히 넘겼다. 그러고도 아무 말이 없는 그에게 애가 타 다시 한번 용기를 냈다.

“있잖아. 내일 말이야, 우리.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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