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악몽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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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악몽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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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악몽의 시작
2022.04.02.
서하는 아주 긴 꿈속을 헤매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눈을 뜨지는 못했다. 사망 선고를 받던 순간처럼, 육체와 의지의 교류가 완전히 끊어져 버린 것이다.
-끼이익.
문 여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두어 명의 발소리가 자박자박 가까워졌다.
“아가씨, 저희 왔어요.”
명랑하게 인사하는 여자는 이지수.
“여보, 그렇게 꼬박꼬박 인사 안 해도 돼.”
귀여워 죽겠다는 듯 킥킥대는 남자는 이승오.
명치께에서 분노가 부글부글 들끓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이렇게 시체처럼 누워서, 저 둘이 쪽쪽 대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밖엔.
“하, 하지 마요. 간병인 아줌마 오면 어쩌려고 그래.”
“밥 먹으러 갔잖아. 한 시간은 있어야 올걸.”
“그래도오……. 꺄앗!”
스킨십하는 소리가 점점 짙어졌다. 서하는 분노를 넘어 끔찍한 자괴감에 빠졌다. 코마 상태의 아내가 누워 있는 병실에서 여자랑 뒹구는, 저런 엄청난 쓰레기를 죽을 때까지 사랑했었다니.
-똑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누군가 가볍게 노크하자 그 빌어먹을 스킨십 소리가 뚝 그쳤다.
“보호자분 계셨네요.”
의사였다. 서하는 어쩌면 정신이 돌아왔다는 걸 알아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열심히 눈동자를 움직이려고 했으나 역시 허사였다.
“좀 어떻습니까?”
이승오가 꼴에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신체로만 보면 오히려 건강한 상태입니다. 다만 언제 깨어날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어요. 사실 깨어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고요.”
이미 의식이 있는 서하를 앞에 두고 의사는 엉뚱한 진단을 내렸다. 의사 탓이 아닌 걸 알아도 원망스러웠다.
“지난번에 여쭤봤던 그건요?”
이승오가 물었다. 제 딴엔 비밀스럽게 묻는다고 물었으나, 의사는 단박에 그의 말을 직접적인 단어로 표현해 버렸다.
“연명치료 중단이라면 안 됩니다.”
“깨어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면서요.”
“아직 세 달 밖에 안 됐습니다. 그리고 세 달이 지났든 삼 년이 지났든,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건 실질적으로 뇌사 상태에 빠진 환자에게만 허용된다니까요?”
서하는 의사의 말에서 두 가지를 알았다. 자신이 벌써 세 달이나 이렇게 누워 있었다는 것. 이승오는 그 세 달이 지나기도 전에 연명치료 중단, 다시 말해 서하의 죽음을 원했다는 것.
“알겠습니다. 저는 아내가 너무 고통스러워 보여서…….”
고통스러워 보이는 아내의 병실에서 상간녀와 붙어먹던 놈이 할 만한 대사는 아니었다.
짧은 진찰이 끝나고 의사가 나갔다. 병실에는 다시 세 사람만이 남았다. 윤서하, 이승오, 이지수.
“제대로 되는 일이 없네.”
투덜거리는 승오에게 지수가 투정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요. 무섭게.”
“무섭긴 뭐가 무서워? 진짜 무서운 건 말야…….”
이승오가 일어서서 손가락 두 개로 굳게 닫힌 서하의 눈꺼풀을 벌렸다. 인형처럼 초점 없는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모습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윤서하가 이렇게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나 앉는 거야.”
그는 손가락을 거두고 살짝 벌어진 서하의 눈꺼풀을 쓸어내려 완전히 닫았다.
“그러곤 말하는 거지. 이혼 서류는 어떻게 됐어? 위자료는 준비됐지? 이제 회사에서 나가. 우리 엄마가 준 집, 차, 시계. 전부 놔두고!”
이지수가 배시시 웃으면서 그의 팔을 잡아당겨 기댔다.
“그러면 어때? 난 오빠만 있으면 되는걸요.”
“그것들이 있어야 여보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어. 우리 공주님.”
지금까지 고생만 하면서 살아온 여자다. 승오는 지수를 더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가 고생할 생각은 더욱더 없고.
“그 차가 지나치게 튼튼했어. 어떻게 트럭으로 갖다 박았는데 멀쩡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포터가 아니라 덤프 트럭으로 박아 달라고 할 걸.”
승오가 아쉬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서하의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덤프 트럭으로 박아‘달라고’ 할 걸? 나를 이렇게 만든 트럭 사고가 우연이 아니었단 말야?
“멀쩡하진 않아요. 눈을 못 뜨는걸.”
“그러니까. 그냥 끝나줬으면 얼마나 좋아? 자기도 편하게 죽고, 나도 편하게 유산 받고.”
“그런 얘, 얘기 그만 해요. 나, 나 진짜 무서워.”
“또 말 더듬지.”
“기, 긴장하, 하면, 나도 모르게…….”
승오가 피식 웃었다.
“나가자. ‘구’장모님 병실에 갔다가 회사 가려면 시간 빠듯해. 커피도 한 잔 못 마시고 들어가겠네.”
“맨날 시간 빠듯하대. 회사 대표란 건 원래 그렇게 바빠요?”
“여보가 말해 봐. 디자인팀 하나만 맡아도 바빠, 안 바빠?”
“바쁘지마안…….”
“귀엽긴.”
“안 귀엽거든요?”
지수는 자연스럽게 팔을 뻗어 승오의 목에 감았다. 다시 두 입술이 가까워지고, 분위기가 야릇해지려는 찰나였다.
-쾅!
병실 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승오와 지수는 불에 덴 듯 화들짝 떨어졌다가 누가 들어왔는지 확인하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갑자기 들어오면 어떡해, 엄마!”
“얘는? 엄마가 이십 년을 공주님 눈치 보고 살았어. 그런데 이제 새 며느리 눈치까지 봐야겠니?”
옥순이 서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승오의 등을 짝 때렸다.
“하도 안 오고 전화도 안 받아서 찾아왔다. 지금 서하 엄마 병실 앞에 기자 와 있으니까 빨리 가서 만나. 기자 안 만날 거면 이 바쁜데 뭐하러 병원 들락날락해?”
엄마가 병실에 있다고? 왜?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야?
“알았어, 알았어! 여보, 엄마 모시고 먼저 차에 내려가 있어. 사랑해.”
씹어 죽이고 싶은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이 병실에서 나갔다. 드디어 혼자 남은 서하는 싸늘해진 머리로 방금 들은 대화들을 곱씹었다.
-그 차가 지나치게 튼튼했어. 어떻게 트럭으로 갖다 박았는데 멀쩡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포터가 아니라 덤프 트럭으로 박아 달라고 할 걸.
-그러니까. 그냥 끝나줬으면 얼마나 좋아? 자기도 편하게 죽고, 나도 편하게 유산 받고.
-회사 대표란 건 원래 그렇게 바빠요?
-네가 말해 봐. 디자인팀 하나만 맡아도 바빠, 안 바빠?
-서하 엄마 병실 앞에 기자 와 있으니까 빨리 가서 만나. 기자 안 만날 거면 이 바쁜데 뭐하러 병원 들락날락해?
유추할 것도 없었다. 모든 게 너무나 명백했다.
이승오가 재산과 회사를 노리고 나를 죽이려 했다는 것. 엄마조차 그때의 충격으로 병원에 있고, 그 사이 이승오는 강윤컴퍼니 대표 자리를 꿰차고 이지수에게 디자인팀을 넘겼다는 것.
내가 선택한 남자가, 그 남자의 여자가, 그 남자의 엄마가 나를 배신한 것도 모자라 내 모든 걸 빼앗고 엄마마저 무너지게 했다는 것.
울부짖고 싶었다. 이승오를 찾아가 알고 있는 모든 욕을 퍼붓고 곤죽이 되도록 패면서 물어뜯고 통곡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토록 심장이 뜯어지는데, 이토록 분노하는데 눈물 한 방울조차 마음대로 흘리지 못한다. 서하는 육체에 갇혀 버린 의식만으로 혼자 고통스럽게 몸부림쳤다.
일어나게 해줘. 눈을 뜨고 움직이게 해줘. 이승오, 저 새끼만 갈가리 찢어 죽이고 나면 영원히 갇혀도 좋으니까. 제발, 제발!
***
이지수를 처음 만난 날은 이슬비가 촉촉하게 내린 저녁이었다. 아마 이승오와 이지수의 사랑도 그 날 시작되었을 거라고, 서하는 훗날 생각했다.
서하는 승오와 팔짱을 끼고 기다란 담장을 지나 대문 앞에 섰다. 그곳은 서하가 태어나 자란 곳이자 두 사람이 어릴 때부터 함께 살았던 집이었다.
“엄마가 깜짝 놀라겠다. 그렇지?”
연락도 안 하고 왔으니 두 배로 더 반가워하겠지.
서하는 놀라면서도 기뻐할 해선을 상상하며 한껏 들떴다. 승오는 그냥 덤덤했지만 늘 그랬기에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늘 그렇다'란 말엔 아주 오랜 세월과 그 이상의 것들이 녹아 있었다.
윤서하와 이승오는 서로에 대해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항상 모든 것을 공유하고 또 함께했다. 가사도우미의 아들과 고용주의 딸로 만난 유치원 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가느다란 빗줄기가 조금 더 강해지자 이승오가 들고 있던 우산을 무심하게 서하 쪽으로 더 기울였다. 그 바람에 비싼 슈트 한쪽이 다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서하는 미소를 지으며 승오에게 살짝 머리를 기댔다.
비 오는 날이면 조용히 젖어 버리는 그의 왼쪽 어깨를 사랑했다. 학교가 끝난 후 서하의 책가방을 당연하게 빼앗아 메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긴 그림자를 사랑했다.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해 번 돈으로 생일 선물을 사 와서 내밀던 상처투성이 손가락을, 서하에게 수능 도시락을 직접 싸줄 거라며 주방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가 옥순에게 잔소리 듣던 옆모습을 사랑했다.
이승오가 아닌 누군가를 사랑하고 결혼하는 일 같은 건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다.
“여보.”
살그머니 불러 보니 승오가 서하를 내려다보았다.
“사랑해.”
“나도.”
항상 조금은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목소리 또한 사랑했다.
-딩동, 딩동.
승오가 초인종을 눌렀다. 그 소리가 멈추기도 전에 문이 덜컹 열리더니 옥순이 기다렸다는 듯 뛰어나왔다.
“저녁 먹으러 왔어? 미리 전화하지!”
“전화하면 또 상다리 부러질까 봐요.”
너스레를 떨면서 정원으로 들어서는 서하 뒤에서 승오가 대문을 닫았다.
“집밥 먹고 싶어서 왔어. 우리 공주님은 절대 밥 안 해 주시거든.”
“얘는. 서하가 그런 걸 어떻게 하니?”
옥순이 눈을 흘기며 서하의 손을 꼬옥 챙겨 쥐었다. 고용인 휴게실을 개조한 작은 집에서 아들인 승오를 데리고 오랫동안 살아온 옥순은, 서하와 승오가 결혼한 후에도 이 집에서 해선과 함께 살고 있었다.
하지만 많은 것이 변했다. 고용인에서 사돈이 되었고, 정원의 작은 집에서 욕실과 거실이 딸린 2층 방으로 짐을 옮겼다. 서하가 옥순을 부르는 호칭도 이모에서 어머님이 되었다.
“잘 왔다. 안 그래도 혼자 저녁 먹기 쓸쓸했는데 너희 와서 너무 좋지 뭐니.”
“어머님 혼자 드세요? 엄마는요?”
“따로 저녁 모임 있으시다고 연락 왔어.”
“난주 이모는요? 오늘 쉬는 날인가?”
서하는 자신과 승오의 결혼 이후 새롭게 안살림을 맡게 된 박난주를 찾았다.
“오늘 내일 쉰대.”
“우리 어머님 심심하셨겠다. 더 빨리 올걸.”
“아유, 아직도 어머님 소리가 낯간지럽다 얘. 사부인 소리도 잘 안 나와. 너희 결혼한 지 삼 개월이나 됐는데.”
깔깔대는 옥순을 따라 서하도 웃었다.
“나도 그래요. 이모, 이모, 하고 불쑥불쑥 튀어나온다니까?”
“그치? 그냥 예전처럼 이모라고 부르면 안 되나?”
“저번에 그랬다가 엄마한테 혼났잖아요. 우리 잘 적응해 봐요, 어머님!”
“아이고, 그럽시다. 우리 귀한 며느님!”
서하와 옥순은 다정히 팔짱을 끼고서 정원을 거닐었다. 서하가 태어나던 날 아빠가 심었다는 소나무, 알록달록한 물고기 떼가 헤엄치는 연못, 신기한 모양의 정원석 등이 곁을 차례차례 지나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