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Princ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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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Princess
2022.04.06.
“이거 무슨 냄새죠?”
현관문을 열자마자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서하는 곧 그 냄새의 정체를 깨닫고 손뼉을 짝짝 쳤다.
“파전! 오늘 파전이다!”
서둘러 달려간 식탁에는 재료를 아낌없이 넣은 해물파전과 된장찌개가 멋진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거기에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쌀밥까지 놓이자 더 바랄 게 없었다.
“오늘 비 왔잖니. 엄마 전 부치는 솜씨 알지?”
“알지, 알지. 엄마 파전 솜씨도 알고.”
승오가 싱글벙글 웃으며 파전을 킁킁거렸다.
“파전만 최고게요? 난 우리 어머님 요리 때문에 입맛 완전 까탈스러워져서 외식하기도 힘들잖아. 책임져요.”
좀 수선스러운 서하의 칭찬도 진심이었다.
“항상 맛있게 먹어주니 고맙네요. 자, 서하야. 식기 전에 이것 좀 먹어 봐.”
옥순이 바삭한 파전 가장자리를 쭉 찢어다가 청양고추 동동 띄운 초간장에 찍어 내밀었다. 그것을 날름 받아먹는 서하를 보고선 승오가 얼굴을 조금 굳혔다.
“그걸 꼭 엄마가 먹여 줘야 먹어?”
“나도 먹여 드리면 되지? 자, 어머님. 아~ 하세요.”
서하가 찢어 준 파전을 옥순도 맛있게 먹었다. 그래도 승오의 미간에 생긴 주름 세 가닥은 옅어질 줄을 몰랐다.
“아, 목 막혀.”
밥상머리에서 불편한 티를 팍팍 내는 승오 덕에 서하는 기껏 먹은 밥이 체할 것 같아 가슴을 몇 차례 두드렸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물도 안 갖다 놨네.”
“됐어. 엄마는 앉아 있어.”
허둥지둥 일어나는 옥순을 승오가 당겨 앉히곤 물 한 잔을 서하 앞에 탁 내려놨다.
“물 정도는 혼자 갖다 먹을 수 있잖아.”
“내가 언제 갖다 달라고-.”
-딩동, 딩동.
작은 다툼이 시작되려는 순간, 절묘하게도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그 바람에 대화가 끊기고 시선들이 현관 쪽으로 향했다.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제가 나가 볼게요, 어머님.”
“아서라. 승오야, 일어선 김에 네가 갔다 와.”
옥순이 서하의 손을 잡아 앉히곤 손짓했다. 승오는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나 이 집 사위잖아. 사위는 백년손님이라는데 손님이 나가 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
승오는 종종 이렇게 어디서 배웠는지 모를 헛소리를 하곤 했다. 사랑의 힘으로 무시하면 되었기에 큰 문제는 아니었다.
“얘는. 엄마가 이 집에 사는데 네가 어떻게 백년손님이니? 여기가 친정집이고 시댁이고, 그런 거지.”
서하는 모자가 가볍게 말씨름하는 틈에 그냥 일어나서 직접 나갔다. 현관까지 오백 미터쯤 되는 것도 아니고, 저럴 시간에 나가 보는 게 훨씬 편하지 않나?
“…… 누구지?”
인터폰 화면을 기웃거리는 젊은 여자는 서하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조금 추레한 점퍼에 머리를 질끈 묶은 모습이 ‘도를 아십니까’나 잡상인과도 거리가 멀었다.
-딩동, 딩동.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그제야 옥순이 걸어 나오면서 물었다.
“누구니?”
“모르겠어요. 젊은 여자네요.”
“여자? 아아, 지수구나. 문 열어도 돼.”
“지수요?”
“난주 이모 딸이야, 이지수. 오늘 엄마 없는 거 모르고 왔나 보네.”
버튼을 누르자 여자가 화면 속에서 꾸벅 인사했다. 곧이어 정원을 가로지르는 발소리가 희미하게 가까워지더니 현관 앞에서 멈췄다.
-똑똑.
“들어와라, 지수야. 문 열려 있어.”
현관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딱 그 순간에 맞춘 양, 주방에 있던 승오까지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나왔다.
“왜 안 들어와? 다 식겠다.”
“아, 안녕하세요.”
승오가 투덜거리는 것과 여자가 엉거주춤 인사하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그 짧디짧은 찰나, 서하는 승오와 ‘지수’라는 여자의 시선이 정확히 맞물렸다고 느꼈다.
그리 유쾌하지 못한 우연이었다.
“엄마 보러 왔어? 어쩌지, 네 엄마 오늘 쉬는 날인데. 얘기 안 하디?”
왠지 어색한 공기 속에서 옥순이 살갑게 말했다.
“아, 그게……. 엄마 보러 온 게 아니라요.”
이지수가 치킨집 로고가 찍힌 헌 종이가방과 검은 비닐봉지를 쭈뼛쭈뼛 내밀었다.
“지난번에 오, 옷 빌려주신 거요. 그거랑 빈대떡 좀 부쳐 왔어요. 비 오니까, 주인님이랑 같이 드시라고…….”
“푸훗!”
갑자기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졌다. 서하가 요 며칠간 들은 승오의 목소리 중 가장 큰 소리였다.
“왜 웃어, 여보?”
“풋, 푸흐흡.”
대답도 없이 큭큭 웃던 승오가 이지수에게 성큼 다가섰다.
“지수 씨라고 했죠?”
“네? 아, 네.”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는 이지수의 목덜미가 어느 틈에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혹시 주인님이 내가 생각하는 분이에요? 이 집 주인 사모님?”
“…….”
이지수가 창피한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노란 고무줄로 대강 묶은 머리카락 사이로 새빨개진 귓불이 빼꼼 보였다.
“그만해, 여보. 초면에 실례잖아.”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진 서하는 승오를 살짝 밀어 뒤쪽으로 치우곤 이지수의 손에서 쇼핑백과 비닐봉지를 낚아채듯 받아들었다.
“죄송해요. 신랑이 아직 철이 없네요.”
이지수가 살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순박해 보이는 갈색 눈동자가 아주 빠르게 서하의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훑었다고 느껴진 건 단지 착각일까.
“아, 안녕……. 하세요.”
길거리에서 하루 세 명 정도 마주칠 만큼 평범한 여자였다. 피부는 푸석하고 낡은 트레이닝복 앞에는 기름 튄 자국이 있었다. 꼭대기에 녹이 슨 체크무늬 2단 우산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져 추레한 슬리퍼 주변을 더럽혔다.
“우산 이리 줘요. 내가 넣어 놓을게요.”
서하는 고용인들이 다시 닦아야 할 대리석 바닥이 영 신경 쓰여 친절하게 손을 내밀었다.
“아, 아니에요! 죄, 죄, 송합니다! 여기, 저……!”
“저기 넣으면 돼. 문 앞에.”
옥순이 승오의 우산이 꽂혀 있는 우산꽂이를 가리켰다. 이지수는 그 옆에 우산을 구겨 넣다시피 꽂고는 뒤돌아 굽신굽신 사과했다.
“죄, 죄송해요, 아가씨. 바닥은 제, 제가 닦을게요. 저기, 걸레가…….”
생쥐처럼 초라한 여자가 고급스러운 원피스를 차려입은 또래 여자 앞에서 잔뜩 주눅 들어 있는 모습이 썩 보기 좋진 않았다.
꼭 내가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잖아.
어릴 때, 조금 가난한 집 아이에게 화를 내면 서하가 나쁜 아이로 몰렸다. 잘잘못을 따져 보면 그 아이 탓인데도 비난은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서하는 불쾌함을 감추고 남들이 보기 좋게 행동하는 법을 일찍부터 깨우쳤다.
“바닥은 신경 쓰지 마요. 이지수 씨죠? 저는 윤서하예요, 이 집 딸. 이쪽은 제 신랑이자 우리 김옥순 어머님 아들인 이승오고요. 만나서 반가워요.”
미소지으며 붙임성 좋게 내민 손을 이지수가 마주 잡으려다가 멈칫하고선 바지춤에 손바닥을 문질러 닦았다.
“죄송해요. 제, 제 손이 더러워서요. 아가씨가 더러워하실까 봐…….”
서하는 어이가 없어 가만히 이지수를 쳐다보았다. 조선시대 공주 만난 천민 빙의해서 굽신굽신 손을 닦는 이지수를 보고 있자니 드는 생각은 딱 하나였다.
‘얘 뭐 하는 거지?’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지수는 손을 열심히 닦은 뒤에야 서하의 손끝을 살짝 잡아 흔들었다. 이어서 승오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이승오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이지수가 아까 닦은 손을 또 허둥지둥 문질러 닦곤 승오의 손을 꼬옥 맞잡았다.
“이, 이지수예요. 저, 저희 엄마는 박난주고요. 저어, 항상 주인님이 잘 해 주신다고 말씀……. 아니, 주인님이 아니라…….”
“푸하하하!”
입꼬리를 씰룩대던 승오가 결국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렇게 크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나. 서하는 평생을 사랑해 온 이승오에게서 낯선 이질감을 느꼈다.
“그냥 사모님, 하면 돼요. 엄마는 그런 얘기도 안 해 줬어?”
“사돈댁도 그냥 웃으시길래 언제까지 저렇게 부르나 놔뒀지 뭐.”
옥순까지 깔깔대자 이지수의 얼굴이 수줍은 복숭앗빛으로 변했다.
“그, 그럼 이, 이만 가볼게요. 버스 시간이 다 돼서요.”
“잠깐만, 지수야. 저녁은 먹었어?”
옥순의 물음에 이지수가 고개를 저었다.
“잘됐다. 빈대떡 해 왔댔지? 우리 이제 막 저녁 먹는데 빈대떡이랑 해서 같이 먹고 가라. 서하야, 승오야. 괜찮지?”
“어머니, 저는-.”
“당연히 괜찮죠!”
저는 불편해요, 하려던 말이 쩌렁쩌렁한 승오의 목소리에 묻혔다. 서하가 살짝 눈을 흘기자 승오는 답지 않게 구구절절 변명까지 했다.
“다 차린 밥상인데 숟가락 하나만 놓자. 비 오는 날에 밥도 굶기고 보내는 건 피도 눈물도 없는 짓이지. 안 그래?”
불편하다고 했다간 순식간에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되는 분위기였다.
“아무렴. 끼니때 사람 그냥 보내면 정 없어서 못쓴다. 들어와라, 지수야. 우리도 이제 막 차려놨어.”
옥순이 한술 더 떠서 이지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못 이기는 양 신발을 벗는 이지수의 입가에 쑥스러운 미소가 고였다.
그래. 밥 한 끼 먹을 수도 있지.
서하는 애써 불편함을 삼키고 주방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다 들고 있던 종이가방이 화분에 걸리는 바람에 끈이 툭 빠지고 내용물이 쏟아졌다.
“앗!”
서하가 허리를 숙여 옷을 주웠다. 누드톤으로 매끈하게 정리된 손가락 끝에 이국적 자수가 놓인 원피스가 딸려 올라왔다.
그 자수가 낯익었다. 양손으로 원피스를 잡고 펼쳐 본 서하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 내 옷이잖아?”
유럽의 작은 마을에서 플리마켓 상인이 팔던 수공예 원피스다. 한국에 똑같은 옷이 있을 리 없었다. 아니, 어떻게 있다 쳐도 서하가 보풀 제거기로 한 가닥 잘라먹은 자수 부분까지 똑같다는 건 불가능했다.
“이지수 씨.”
서하는 성큼성큼 주방으로 걸어가 원피스를 불쑥 내밀었다.
“이거 어디서 났어요?”
“그, 그거요?”
이지수가 둥그레진 눈을 껌벅거렸다.
“저, 그, 제가 설거지하다가요, 실수로 물을 쏟아서요. 순이 이모가 입고 가라고 주신 건데, 어…….”
눈가가 금세 빨개져선 어룽어룽 촉촉해지는 게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모양새였다. 얼핏 본 승오의 표정은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지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어머, 얘. 그거 내가 빌려준 거 맞아!”
옥순이 별일 아니란 식으로 손사래를 쳤다.
“지난번에 출퇴근 이모 한 명이 펑크 났거든. 제 엄마 힘들다고 얘가 와서 대신 일한 거야. 너랑 나이도 같은 애가 어찌나 열심히 했던지, 옷이 엉망이 됐길래 네가 버리고 간 옷 하나 꺼내서 줬지. 그냥 가져가도 됐는데 그걸 또 이렇게 빨아서 가져온 거 봐라. 너무 예쁘지 않니?”
이지수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서하로선 어이가 스타카토로 탈탈 털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 울 사람이 누군데. 울고 싶은 사람이 누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