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무례한 남자, 재수 없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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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무례한 남자, 재수 없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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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무례한 남자, 재수 없는 여자
2022.04.13.
사과는 일단 제쳐두자. 밖에 사람이 있는 걸 알고 열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더라도 디자인북을 제 것처럼 들고서 서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남자의 행동은 분명 이상하고 예의 없었다.
“그거 돌려주고, 길 좀 비켜 주실래요?”
기묘한 눈싸움 끝에 서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표실에 용무 있습니까?”
“네.”
“대표님 부재중이십니다. 나중에 다시 오시죠.”
‘당신이 뭔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간신이 넘어갔다.
“멀리 가셨나요? 회사 내에 계신 거면 들어가서 기다릴게요.”
“회사 안에 계시지만 부재중에 들여보내기엔 일정 전해 들은 바가 없습니다. 어디서 오신 누구시죠?”
“저야말로 궁금하네요. 어디 소속의 누구시길래 문을 막으시는 거죠?”
남자가 대답 대신 디자인북을 앞뒤로 뒤집어 살폈다. 수상한 물건이라도 대하는 태도였다.
“이리 줘요!”
서하는 그의 손에서 디자인북을 거칠게 빼앗았다.
“대단히 무례하시네요. 자기 소속 밝히기도 전에 남의 소속을 묻질 않나, 남의 물건을 주워서 멋대로 살펴보질 않나. 대체-.”
“윤 팀장!”
복도 저편에서 서하를 부르는 목소리가 카랑카랑 울렸다. 서하의 친엄마이자 강윤컴퍼니의 대표, 강해선이었다.
“와 있는 줄 몰랐네. 전화하고 오지 그랬어요.”
해선은 공과 사가 뚜렷해야 한다며 회사 내에서는 반드시 서하를 직급으로 불렀다. 서하 역시 누군가 볼 때면 대표님이라며 깍듯이 예의를 지켰다.
“좋은 아침입니다. 대표님. 새 디자인이 나와서 보여드리려고 가져왔어요.”
“새 디자인을 아침 댓바람부터 가져올 정도면, 윤 팀장 브랜드 관련이겠죠?”
해선은 서하에게 회사를 물려주기 전에 네 브랜드가 성공하는 것부터 볼 거라고, 항상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예. 검토 부탁드립니다.”
“검토가 아니라 의논이지. 디자인은 철저하게 윤 팀장의 영역이고, 나는 윤 팀장을 믿으니까요. 들어와요.”
해선이 몸을 틀자 남자가 허리를 가볍게 숙이며 옆으로 물러섰다.
서하는 해선을 따라 대표실로 들어가다가 그와 흘깃 눈이 마주쳤다. 빈말이라도 호의적이라곤 할 수 없는 시선. 대체 왜 초면에 저런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사람 누구야? 못 보던 얼굴인데.”
문을 닫자마자 서하가 물었다.
“아아. 류 비서?”
“비서?”
그러고 보니 그랬다. 오랫동안 일해온 최 비서가 그만두는 바람에 새로운 비서를 채용했댔지.
“최 비서가 그만두면서 소개해주고 갔어, 류경준 비서. 나이 젊은 건 그렇다 치더라도 사람이 너무 까칠한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일하는 거 보니 최 비서가 데려올 만하더라. 아주 똑똑하고 일을 잘해.”
“까칠한 사람이 일 잘할 때가 많지.”
서하는 류경준에 대해 그렇게만 말했다.
첫인상은 ‘예의 없고 이상한 사람’이지만 공은 공, 사는 사. 예민하고 독특한 사람이 넘쳐나는 의류 업계에 종사하면서, 비서가 무례한 언행을 일삼는다고 대표님께 쪼르르 일러바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비서가 왜 아무도 없는 대표실에서 나왔지?
슬쩍 들었던 의문도 금세 지워 버렸다. 간단한 정리라든가 서류 찾기 등도 비서의 일이니까.
서하는 소중히 안고 있던 디자인북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여기요. 새 디자인입니다, 대표님.”
“고생했어요. 윤 팀장.”
오랫동안 패션업계에서 회사를 이끌어 온 해선의 눈썰미는 웬만한 디자이너를 가볍게 압도할 정도였다. 물론 자신 있게 내놓은 디자인이지만, 서하는 해선이 책장을 넘기는 동안 긴장해서 침을 꼴딱 삼켰다.
“드디어.”
마지막 책장을 덮은 해선이 딸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강윤컴퍼니에서 새로운 브랜드를 내놓게 되었네요. 축하해요, 윤서하 디자이너.”
서하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번졌다.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꿈꾸는 목표, 자신만의 브랜드를 향해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청담동에 부티크를 열어야겠어. VIP와 셀럽들을 초대해서 런칭 쇼도 하고. 그다음 대전, 대구, 부산으로 내려가면서 팝업스토어를 여는 거야. 백화점 입점은 맨 마지막이야. 우리가 먼저 백화점에 입점시켜달라고 조르는 게 아니라, 백화점에서 먼저 입점 제안이 오게 만들어야 해. 할 수 있지, 윤서하?”
디자인을 보자마자 런칭 전략부터 짜는 해선은 정말 사업가다웠다.
서하는 이런 엄마를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기민하고, 강단 있고, 당당하고. 해선이 그 대단하다는 대성그룹에서 제안해 온 인수합병을 단칼에 거절했을 땐 정말이지 너무나 심하게 자랑스러워서 가슴이 팡 터지는 기분이었다.
“당연한 걸 묻네. 내가 누구 딸이야, 강 여사?”
“네, 네. 예쁜 내 딸이지요.”
해선이 까르르 웃으며 서하의 엉덩이를 팡팡 두드려 주었다.
“샘플 기다리고 있을게. 참, 며칠 전에 승오랑 왔다 갔다면서? 엄마한테 연락하고 오지 그랬어.”
파전 먹다 체할 뻔했던 그 날이었다. 서하는 애써 잊었던 불쾌한 기억을 떠올리곤 입술을 삐죽였다.
“엄마 있는 줄 알았지. 그런데 엄마는 없고, 이상한 여자만 만났어.”
“여자? 웬 여자?”
해선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있잖아. 난주 이모 딸. 이름이 지수랬나?”
“아아, 지수? 걔도 디자인 공부한다길래 엄마는 너랑 친해지면 괜찮겠다, 했는데. 왜? 별로였어?”
“응. 엄청나게.”
공은 공이고 사는 사. 이지수는 고맙게도 철저하게 사의 영역에 있었다. 비즈니스나 프로페셔널 같은 건 생각도 안 하고 엄마한테 쪼르르 일러바칠 수 있다는 거다.
“빌려 간 옷 돌려주러 왔다더라고. 그런데 그게 내 옷인 거야. 알지? 나 대학생 때 유럽 갔다가 사온 그거, 내가 엄청 아끼는 거. 내가 이거 어디서 났냐고 막 그러니까 있잖아…….”
서하는 내친김에 그날 짜증 났던 이야기들을 미주알고주알 풀어놓았다. 딴에는 가볍게 한풀이하듯 한 말이었는데, 해선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졌다.
“그런 일이 있었어?”
“내가 나쁜 사람 된 기분인 거 있지. 가만히 있다가 날벼락 맞은 사람은 난데.”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던 해선이 이윽고 말했다.
“앞으로 집에 드나들지 말라고 해야겠다. 너랑 승오도 당분간 오지 마. 오기 전엔 엄마한테 꼭 전화하고.”
“자기 엄마 만나러 오는 거라던데. 그래도 돼?”
“당연히 되지. 지수가 우리 집에 드나드는 건 당연한 게 아니라 편의를 봐준 거야. 왜 내가 내 새끼 속상하게 하는 사람 편의를 봐 줘야 하니?”
“난주 이모가 일하는 사람이니까, 괜히 엄마랑 불편해질까 봐 그러지.”
“서하야.”
해선이 애정 가득한 눈길로 서하를 보았다.
“엄마한테 중요한 사람은 이지수나 박난주가 아니라 윤서하야. 네 잘못으로 뭔가 틀어졌다면 당연히 바로잡아야겠지만, 넌 전혀 잘못한 게 없잖니? 사돈한테도 다시는 네 물건을 함부로 만지거나 네 방에 들어가지 말라고 얘기해 둘게. 네 방에 먹다 버린 과자봉지가 굴러다녀도 네 것이니까 절대로 손대지 말라고.”
“헤헤.”
서하는 조금 바보 같은 소리로 웃었다. 무조건 내 편을 들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든든하고 행복한 일인지 모른다.
금수저. 서하는 태어날 때부터 많은 걸 가졌지만, 그중에 엄마보다 좋은 건 없었다.
“이제 내려가 봐. 디자인 잘 챙겨서 보물상자에 꼭꼭 넣어 놓고.”
해선이 말했다.
‘보물상자’는 작지만 튼튼한 금고였다. 서하는 모든 디자인을 종이에 색연필로 그려 금고에 보관했고, 그 비밀번호는 오직 서하와 해선만이 알고 있었다.
“알았어요. 가보겠습니다, 대표님!”
서하는 꾸벅 인사하고 대표실에서 나왔다. 류경준이라고 했나. 아까 그 이상한 남자가 아직도 문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류경준 비서님?”
이름을 부르자 또 호감 없는 눈빛이 돌아왔다. 서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꼬리를 가볍게 끌어올려 흠잡을 데 없는 비즈니스 미소를 만들었다.
“대표님께 이야기 들었어요. 저는 윤서하예요. 수석 디자이너고, 디자인실에서 팀장을 맡고 있죠.”
“아, 예.”
혹시 무슨 말을 더할까 싶어서 기다렸으나 류경준은 정말로 ‘예’. 하나 말곤 더 할 말이 없는 듯했다. 서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을 이었다.
“종종 보게 될 거예요. 다음부터 웬만하면 길을 막지 말아 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도 ‘예’, 한마디 할 줄 알았다. 그러면 편하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돌아갔을 텐데.
“언제든 약속 없이 대표실에 드나드실 겁니까?”
류경준은 전혀 호의적이지 못한 말투로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요?”
“최 전무님도 비서실 통한 후에 출입하십니다.”
“저는-.”
“압니다. 대표님 딸.”
‘대표님 딸’이라고 말할 때, 경준의 입가에 경멸 섞인 비웃음 같은 게 스쳤다.
“어때요? 대표님 딸인 기분.”
“무슨 의도로 질문하시는 거죠?”
경준이 허리를 약간 숙였다. 나직한 목소리가 서하의 귀에서 한 뼘 정도 거리를 두고 속삭였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 젊은 나이에 수석 디자이너로 팀장까지 달고, 대표실도 내 방처럼 들락거리고, 개인 브랜드 런칭도 약속받고. 인생이 걸림돌 하나 없이 탄탄대로로 쫙 뻗은 그쪽 같은 사람은 매일매일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다시 자세를 바로잡은 경준이 싱긋 웃었다.
“이상입니다.”
서하에겐 매우 익숙한 편견이었다. 공부를 잘해도, 악기를 잘 다뤄도, 미술과 디자인에 재능을 보여도 어떤 사람들의 결론은 늘 한 가지였다. 윤서하는 금수저니까.
그래서 별로 화나거나 당황스럽진 않았다.
“생각씩이나 할 게 있겠어요? 뭐, 굳이 말하자면-.”
서하가 오른손을 약간 올려 까딱거렸다. 그 손짓에 끌려오듯, 경준이 다시 허리를 조금 숙여 그녀의 입가에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X나 신난다.”
경준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서하는 좀 더 낮은 목소리로 또렷하게 덧붙였다.
“금수저 만만세. 다음 생에도 금수저로 태어나서 오픈카 뚜껑 열고 탄탄대로 드라이브해야지!”
“…….”
고개를 든 경준이 헛것이라도 본 표정으로 서하를 쳐다보았다.
“원래 그렇게 저급한 말투를 씁니까?”
“류 비서님이 원래 그렇게 무례하듯이요.”
“평판은 걱정 안 하시고?”
“류 비서님이 잘릴 걱정 안 하듯이요.”
“내가 소문이라도 내면?”
서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처럼 완벽히 정석적인 애티튜드로 움직였다. 그래야만 쓸데없는 구설수에 오르지 않는다는 걸 너무 일찍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가서 열심히 소문내 보세요. 윤서하가 X나 신나서 수저 자랑 하더라고. 사람들이 잘도 믿어주겠네?”
그래서 이렇게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있었다.
가식적인-서하가 보기엔- 페이스를 유지하던 류경준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선공은 했으되 반격이 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제 퇴각할 타이밍이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류 비서님!”
서하는 경준이 대답할 틈도 없이 경쾌한 구두 소리를 내며 복도 저편으로 멀어졌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경준은 엘리베이터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혼자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여전히 재수 없네, 윤서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