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외도 현장을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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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외도 현장을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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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외도 현장을 목격했다
2022.04.16.
여름과 가을이 한바탕 지나는 동안 서하는 이지수에 관한 걸 까맣게 잊어버렸다. 마주칠 일도 없는 데다 브랜드 런칭 준비로 너무나 바빴기 때문이었다.
“엄청 춥다. 어제까진 그래도 좀 포근했는데.”
서하는 밤새 부쩍 추워진 날씨에 코트 자락을 꼭꼭 여미면서 차에 탔다. 수능 뉴스를 본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완연한 초겨울이었다.
“옷이 얇아.”
승오가 서하의 코트 자락을 만져 보곤 혀를 찼다.
“뒷좌석에 머플러 있으니까 하고 가. 점심때 추워.”
“고마워.”
등받이를 약간 눕혀 머플러를 잡았을 때 뒷좌석 아래에서 무언가 눈에 띄었다.
“……?”
손을 휘저어 간신히 꺼내 보니 마카롱이었다. 누군가 한 입 베어먹고 떨어뜨린 핑크빛 마카롱.
“웬 마카롱? 여보 이런 거 싫어하잖아.”
승오가 마카롱을 흘끔 보곤 태연하게 말했다.
“어제 우리 직원이 내 차 썼어. 먹다가 흘렸나 보네.”
뭔가 영 시원찮은 대답이었다. 게다가 자세히 살펴보니 베어 문 자국 근처에 빨간 립스틱 자국까지 선명했다.
“여직원한테 차를 빌려줬어?”
“외근 나갔다가 오는 길에 다른 여직원 픽업해서 왔더라.”
무언가 찜찜했다. 꼭 집어 설명할 수 없는,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씹고 뱉은 껌처럼 찐득하게 달라붙는 그런 찜찜함이었다.
뭘까. 먹다 흘린 마카롱 반 개가 왜 이렇게 신경 쓰일까.
고민하느라 조용해진 서하에게 승오가 다시 말을 걸었다.
“원단 공장 바뀐 거 알지? 샘플 보냈다니까 출근해서 확인해 줘.”
“응. 그런데 왜 바꿨어? 전에 거래하던 공장도 나쁘지 않았는데.”
“공장 규모도 더 크고, 여러모로 마음에 들어서.”
정확히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었는지는 샘플을 만져 봐야 알 일이었다. 서하는 일단 마카롱에 대한 생각을 접어놓고 오늘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모두 좋은 아침!”
서하가 디자인실로 들어가며 활기찬 인사를 던지자 여기저기서 직원들이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굿모닝이요, 팀장님!”
대표 딸이든 뭐든, 처음 이 디자인실에 들어왔을 때는 서하도 잡다한 일을 도맡아 하는 막내 디자이너였다.
하지만 서하가 내놓은 디자인들이 연달아 히트를 치면서 자연스럽게 수석 디자이너가 되었고, 연차가 쌓인 후에는 팀장 명함까지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하산이나 금수저라고 쑥덕거리는 사람들은 항상 있었다. 예를 들면, 오며 가며 마주칠 때마다 차가운 얼굴을 하고선 깔보는 눈으로 대충 인사하는 류경준 비서라든가.
그가 쑥덕거리는 걸 직접 보거나 들은 건 아니다. 하지만 기회가 있으면 그러고도 남을 거라고 서하는 확신했다.
“굿모닝, 아라 씨. 새 공장에서 샘플 도착했을까요?”
“팀장님 책상에 놔뒀어요. 막내 디자이너 지원자들 이력서랑 포트폴리오는 회의실에 세팅해 놨고요.”
“땡큐. 샘플 체크하고, 삼십 분 있다가 회의할게요.”
서하는 유리 부스로 분리된 자신의 자리에 가서 원단책을 펼쳤다. 페이지마다 반듯하게 정리된 샘플을 만지고 당기고 잘라 보며 이리저리 체크한 결과는 이랬다.
“…… 별 차이 없는데?”
미세하게 좋긴 하지만 굳이 번거롭게 바꿔야 하 나, 싶을 정도. 어쨌든 아주아주 조금 더 괜찮은 건 사실이고 기존 공장은 규모가 작아 불편한 부분도 있었기에 그냥 컨펌하기로 했다.
“자, 이제 회의합시다. 회의실로 집합!”
사무실로 나가서 손뼉을 짝짝 치자 직원들이 우르르 회의실로 몰려와 앉았다. 서하는 맨 위에 놓인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부터 찬찬히 살펴보고 팀원들의 의견을 물었다.
“김예림. 감각 있네. 어떻게들 생각해요?”
“확실히 센스가 있어요.”
“유니크하긴 한데, 우리 타깃이 소화하기엔 무리수가 있지 않아요?”
이력서 한 장마다 괜찮네 별로네, 나이가 많네 적네, 경력이 어쩌네 하는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그렇게 넘기고 넘겨 이윽고 마지막 이력서를 보자마자 서하가 눈을 찌푸렸다.
“이지수?”
얘가 왜 여기서 나와.
“아는 사람이에요?”
서하의 표정을 보고 윤정이 물었다.
아는 사람이다마다. 이름과 사진을 두세 번씩 확인해도 이지수였다. 새로 들어온 도우미 이모 딸, 빈대떡 부쳐 온 이지수.
그러고 보니 디자인 전공한다고 했었나? 하필이면 우리 회사에 이력서를 냈네.
별로 기분 좋진 않았지만, 따지고 보면 잘못한 것도 아니었다. 서하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아니. 의견 제시하세요.”
“이 지원자는 경력이 너무 부족한데요, 팀장님.”
누군가의 말에 곧장 반박이 나왔다.
“하지만 베이스가 좋아요. 딱 대중적이네요.”
“저도 같은 생각요. 막내로 들어와서 배운다 치면 빨리 성장할 것 같아요.”
사진 속 이지수는 서하가 기억하는 모습보다 훨씬 깔끔하고 화사했다.
차마 버리진 못하고 깊이 넣어 둔 원피스와 승오가 맛있다며 먹어 치운 빈대떡, 그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이지수의 빨개진 얼굴이 단정한 사진 위에 겹쳐져서 떠올랐다.
서하는 이력서를 옆에 밀어 놓고 포트폴리오를 한 장씩 넘겨 보았다. 누군가의 의견처럼 대중적인, 나쁘게 말하면 개성 없는 디자인들이었다. 사적이고 불쾌한 경험과는 별개로 포트폴리오 자체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케이. 이지수 지원자는 탈락.”
이력서를 탁 뒤집는 것으로 신규 디자이너 채용 회의가 끝났다.
포트폴리오가 좋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만약 이지수가 단연 돋보이는 디자인을 선보였다면 서하는 주저 없이 이 서류를 합격 명단에 올렸을 테니까.
엄마와 아빠가 당신들의 성을 하나씩 따서 만들고 맨바닥부터 뛰어다니며 키워낸, 강윤컴퍼니를 위해서.
***
[미팅이 있어서 나가봐야겠다. 오늘은 같이 퇴근 못 하겠어.]
퇴근 무렵, 승오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덕분에 퇴근길 택시 잡기 전쟁 당첨이었다.
겨울 해는 성급하기도 하지. 서하가 회사 밖으로 나왔을 땐 벌써 하늘이 어둑하고, 꽉 막힌 도로에 빨간 브레이크등이 미적미적 기어가고 있었다.
물론 까치발을 들어 가며 미어캣처럼 아무리 기웃거려도 모자에 불 켠 택시는 보이지 않았다.
“으으, 춥다.”
빌딩숲의 칼바람이 인정사정없이 뺨을 베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진눈깨비까지 투둑투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눈은 꼭 이럴 때 오네.”
서하는 승오의 머플러를 더욱 단단히 고쳐 멨다. 여기서 한 시간쯤 기다려 봤자 택시는 올 것 같지 않고, 좀 걸어가서 지옥철 타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패딩 입고 털부츠 신어야 하는 날이었네.
아침엔 예뻤던 얇은 코트와 베이지색 롱부츠가 괜스레 원망스러웠다.
후회를 친구 삼아 걷다 보니 그나마 툭툭 털어낼 만하던 진눈깨비가 차가운 빗줄기로 바뀌었다. 뛰다시피 겨우겨우 도착한 지하철역 입구엔 공사 중이라는 팻말이 덩그러니 붙어 있었다.
정말, 되는 게 하나도 없는 날이었다.
서하는 자꾸 굵어지는 빗줄기를 피해 바로 옆 버스 정류장으로 뛰어들었다. 한 평쯤 되는 정류장 지붕 아래는 이미 버스를 타려는 사람과 서하처럼 비를 피해 뛰어온 사람들로 초만원이었다.
“죄송합니다. 잠깐만요!”
최대한 어깨를 움츠려도 낯선 사람들과 부대끼는 건 마찬가지였다. 광택이 흐르는 캐시미어 코트도, 부드러운 가죽 부츠도 지금은 그저 짐스러운 존재였다.
비가 계속 오려나. 엄마한테 전화해볼까?
빗줄기를 바라보던 서하의 시선이 어느 순간 도로 건너편에 고정되었다.
“……?”
처음엔 색이 같은 차라고 생각했다. 더 자세히 보고선 차종까지 같다고 생각했고, 눈을 가늘게 뜨고 번호판을 확인하고서야 그 생각이 파스스 부서졌다.
“이승오?”
미팅이 있다고 했는데. 약속 장소가 이 근처인가. 방어적인 생각과 다르게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쿵쿵, 쿵쿵쿵, 쿵쿵쿵쿵. 나쁜 느낌은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반응하는 모양이었다.
승오의 차는 그 복잡한 지하철역 앞에 비상등을 켜고 서 있었다. 뒤에서 신경질적으로 빵빵대는 다른 차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곧 웬 여자가 뛰어와 아주 당연하게 차에 올라탔다. 아침에 서하가 탔던 승오의 옆자리에.
마카롱.
한 입 먹고 떨어뜨린 핑크색 마카롱이 거대한 얼음덩이처럼 서하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서하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엔 아까 확인하고 닫지 않은 승오의 메시지가 그대로 띄워져 있었다.
[미팅이 있어서 나가봐야겠다. 오늘은 같이 퇴근 못 하겠어.]
그대로 통화 버튼을 누르자 신호음이 시작됐다. 귀로는 그 신호음을 듣고 눈으로는 멀어져 가는 승오의 차를 바라보면서, 서하는 창백해진 입술을 혀로 축였다.
[여보세요.]
“응, 여보.”
내 목소리가 너무 떨리진 않았길.
“어디야? 갑자기 비가 오는데. 나 좀 데리러 와줄 수 있어? 택시도 안 잡히고…….”
‘금방 데리러 갈게. 나오지 말고 기다려’ 하고 말해주길.
[지금 못 가.]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말투로 승오가 대답했다.
[나 지금 경기도야. 미팅 있다고 말했잖아.]
그랬구나. 그런 거였구나.
머리 꼭대기가 차갑게 식었다. 불쾌한 두근거림이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다.
“…… 알았어.”
이상하게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종료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집에는 어떻게 갈 거냐, 하다못해 우산은 있냐 정도의 형식적인 물음조차 없이.
서하는 아까보다 더 굵어진 빗줄기 사이로 발을 내디뎠다. 절대 젖으면 안 되는 캐시미어 코트나 가죽 부츠의 안부 따윈 이제 아무렇지 않았다. 그저 걷고 또 걸어서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눈보다 차가운 겨울비를 온몸으로 맞으면서, 목적지도 없이 얼마나 걸었을까.
쏟아지던 비가 갑자기 뚝 그쳤다. 서하는 걸음을 멈추고 흐려진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돌아다닙니까? 잘나신 금수저께서.”
세상에. 정말 끔찍하게 되는 일 없는 날이었다. 하필이면 이럴 때 이 인간과 마주치다니.
그는 무릎 아래까지 오는 검은 롱코트 차림이었다. 사방이 어두워서 그런지 피부는 오늘따라 더 희고 싸가지 없이 생긴 입술은 더 붉었다.
머리는 단정하게 넘겨 꼴 보기 싫고 커다란 우산을 든 손에는 가죽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류 비서님이 상관하실 바가 아닌 것 같네요.”
서하는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냉랭하게 대꾸했다. 신경 끄고 너 가던 길이나 가라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