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가장 비참한 순간에 류경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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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가장 비참한 순간에 류경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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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가장 비참한 순간에 류경준이 있었다
2022.04.20.
경준은 서하와 그렇게 긴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또 연락 없이 올라왔습니까’, ‘아시다시피 대표님 금지옥엽이라서요’, 등의 유치하고 소소한 말싸움이 전부였다.
그러니까 보고도 지나치면 됐을 걸. 어울리지도 않게 비 맞고 걷는 이 여자가 뭐라고 뛰어왔는지.
“차는 어쨌습니까? 탄탄대로 뚜껑 열고 드라이브하는 그 오픈카.”
윤서하가 ‘네가 그걸 왜 궁금해하냐’라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비 오길래 남 줬어요.”
“그럼 따라오시죠.”
경준은 휙 돌아서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잠깐 걷다 보니 누군가 따라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다시 뒤를 돌아본 그는 저 멀리에서 겨울비를 맞으며 빠르게 멀어지는 윤서하의 뒤통수를 발견했다.
“저 여자가 진짜!”
인파를 헤치고 달려가 어깨를 탁 잡았더니 무슨 범죄자 만난 사람처럼 거칠게 뿌리친다. 어이 없게도.
“놔요. 뭐 하는 거예요?”
“그쪽이야말로 뭐 하는 겁니까? 이 겨울에 비가 이렇게 오는데 우산도 없이 어딜 가게?”
“은근슬쩍 말 잘라먹지 마. 누군 혓바닥 길어서 존댓말 하는 줄 알아?”
윤서하가 사납게 대꾸했다. 마음만 먹으면 더 사납게 받아칠 수도 있지만, 경준은 그러지 못하고 가만히 서하를 쳐다보았다.
몰골이 엉망이었다. 흠뻑 젖어 얼어붙은 머리카락은 일단 그러려니 하자. 빗물인지 눈물인지에 잔뜩 번진 눈화장과 하얗다 못해 보랏빛으로 질린 입술은 엉망이다 못해 차마 못 봐줄 꼴이었다.
“알겠으니까, 윤서하 씨.”
경준은 어이없는 걸 꾹 참고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일단 같이 갑시다. 이러다 감기 걸리면 대표님이 많이 걱정하실 겁니다.”
“……엄마?”
강해선을 들먹인 건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경준은 한 번 더 강조했다.
“예. 윤서하 씨 어머님이요.”
마스카라가 얼룩덜룩 번진 윤서하의 속눈썹이 두어 번 깜박이는가 싶더니, 갑자기 굵은 물방울이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경준과 다르게 사랑만 받고 자라 제 잘난 맛에 사는 여자였다. 한 번쯤 당황하거나 우는 모습을 보고 싶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뚜껑 열리는 스포츠카 대신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길바닥에서 소리도 없이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는 모습 같은 건 정말이지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이봐요. 윤서하 씨.”
괜히 심란해진 경준은 급히 코트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당연히 윤서하는 받지 않았다.
“그만 울어요, 좀. 사람들이 내가 울린 줄 알잖아.”
실제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죄다 두 사람을 흘끔흘끔 곁눈질하고 있었다. 경준을 쓰레기 취급하는 시선도 느껴졌다.
하나하나 잡고 내가 울린 게 아니라 이 여자가 그냥 혼자 우는 거라고 해명할 수도 없고, 경준으로선 대단히 억울한 노릇이었다.
“누가 비서님더러 여기 있으래요? 가던 길이나 계속 갔으면 됐잖아요. 지금이라도 빨리 가세요.”
눈물도 못 그치는 주제에 말은 잘한다. 경준은 못마땅하게 혀를 차곤 몸을 돌렸다. 하지만 몇 걸음 떼어놓기도 전에 주변에서 저것 좀 보라며 수군대는 소리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아, 젠장.”
그는 하는 수 없이 성큼성큼 돌아가 윤서하의 손에 들고 있던 우산을 꽉 쥐여주었다. 얼떨결에 우산을 받은 윤서하가 멈칫하는 사이 손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탈탈 털고 얼굴도 좀 닦아 줬더니 그나마 몰골이 좀 나아졌다.
“이거라도 쓰고 가요. 그러고 다니다가 감기 걸려서 대표님 방해하지 말고.”
“류 비서님.”
다행히 눈물을 그친 윤서하가 조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엄마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주실래요?”
“그러죠.”
어차피 말할 생각도 없었다. 윤서하가 길바닥에서 울든 버스킹 하면서 헤드스핀을 돌든 무슨 상관인가. 못 본 척 지나가는 대신 우산을 준 것조차 경준에겐 이해가 안 되는 오지랖이었다.
그런데 윤서하는 경준이 뭐 대단한 은혜라도 베풀어 준 양, 어울리지 않는 인사를 했다.
“고마워요.”
입술이 보라색으로 얼어붙은 주제에. 그 재수 없도록 완벽한 미소까지 지어 보이면서.
갑자기 심장이 짜증날 만큼 쿵쾅거렸다. 저 잘난 맛에 사는 이 여자가 왜 길바닥에서 구질구질하게 울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순순히 따라와 주기만 한다면 따뜻한 곳에 데려가서 마른 옷으로 갈아입히고 달콤한 핫초코 한 잔을 먹이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이럴 수가. 내가 무슨 생각을.
경준은 정신이 더 이상해지기 전에 서둘러 반대쪽을 향해 걸었다. 몇 번이나 뒤통수가 당겨 돌아보려는 것도 겨우 참았다.
곧 남들보다 한 뼘은 더 위에 있는 경준의 머리와 펄럭이는 코트 자락이 색색의 우산 속으로 사라졌다. 서하는 경준의 체온이 남은 우산을 꼭 쥐고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 쪽팔리게.”
하필이면 인생에서 가장 비참한 순간을 들켰다. 더욱 비참하고 쪽팔린 건, 그가 건넨 우산이 아주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는 거다. 정작 남편인 이승오는 바람피우느라 아내가 우산을 가졌는지조차 궁금해하지 않았는데.
***
“떨어졌어요.”
이지수가 힘없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지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로 시작해서 ‘좋은 인연으로 뵙길 바랍니다’로 끝나는 상투적인 탈락 문자가 길게도 적혀 있었다. 승오는 속으로 안도하면서 괜히 인상을 썼다.
“네가 왜 떨어져? 윤서하가 일부러 견제한 거 아냐?”
“아가씨는 안 그래요. 내가 모자라니까 떨어진 거죠, 뭐어. 괜찮아요.”
바보같이 헤헤 웃는 눈꼬리에 눈물이 그렁그렁한데도 괜찮댄다. 이럴 때면 차라리 서하처럼 말끝마다 따박따박 따지고 드는 게 낫지, 싶었다. 그러면 덜 안쓰럽지 않겠냐고.
“그러게 디자인은 조금만 참으랬잖아. 오빠가 너 하나쯤 다른 부서에 충분히 꽂아 줄 수 있어.”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걸요. 아무리 해도 아가씨보단 못하겠지만…….”
“아가씨 소리도 그만하라니까. 네가 하녀야?”
“하녀 맞잖아요. 아가씨랑 나랑은 신분이 다른걸.”
“조선 시대도 아니고 무슨 신분 타령이야.”
“대, 대한민국에도 신분은 있어요. 아가씨는 아가씨, 오빠는 도련님, 나는……. 그냥 하녀.”
지수가 핸드백에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번들거리는 합성피혁에 명품 로고를 어설프게 프린팅해 만든 그 가방을 보고 승오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그 가방은 또 뭐야. 어디서 났어?”
“예쁘죠? 어제 시장 갔다가 샀어요. 원래는 이만 오천 원인데요, 아, 아줌마가 하나 남았다고 만팔천 원만 달래서 얼른 샀죠.”
“…….”
아주 어릴 적, 승오의 엄마도 꼭 저런 싸구려 가방을 사서 자랑스럽게 들고 왔더랬다. 물론 어렸던 승오는 그게 싸구려인지 몰랐다. 강해선이 기겁하지 않았다면 아주 오랫동안 몰랐을 것이다.
-‘승오 엄마, 어디서 이런 걸 사 왔어요?’
-‘시장 갔다가 샀어요. 주인 아줌마가 싸게 준다길래. 예쁘지요?’
-‘예쁘긴 예쁜데…….’
승오는 머뭇거리는 강해선의 표정에서 그 가방이 전혀 예쁘지 않다는 걸 알았다. 싫은데 티는 못 내겠고, 동정하지만 알량한 자존심 지켜주자고 선뜻 말은 못 하는 그런 표정.
-‘봐요, 여기 박음질이 잘못됐네. 이건 물건 좀 넣으면 금방 터져서 못써. 내가 튼튼한 거 하나 줄 테니까 도로 갖다 줘요. 승오 엄마 우리 식구인 거 사람들이 다 아는데, 이렇게 망가진 거 들고 다니면 내가 욕먹어요.’
강해선이 드레스룸에서 갖고 나온 가방은 번쩍거리는 비닐 합성피혁이 아니라 은은하게 광택이 흐르는 가죽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런 걸 받아도 되냐고 연신 되물으면서 기뻐하던 옥순과 아무렇지도 않게 가방을 건네고 미소짓는 강해선 사이의 간극은 어린 승오의 뇌리에 문신처럼 짙게 남았다.
지수의 말처럼, 그건 신분 차이였다. 신분이라는 단어보다 명확한 표현은 아마 없으리라.
그래서 처음부터 이지수가 신경 쓰였다. 온몸에 배인 억척과 순박함이 꼭 엄마 같아서. 찢어지게 가난한 주제에 해맑고 씩씩한 이 여자를 꼭 지켜줘야 할 것 같아서.
“미치겠다, 진짜.”
혼자 내뱉은 중얼거림을 이지수가 주워듣곤 어깨를 움츠렸다.
“나, 나, 또 뭐 잘못했어요?”
“당장 갖다 버려. 내가 하나 선물해 줄 테니까.”
“네에? 아녜요!”
지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아, 안 예뻐서 그래요? 다음부턴 안 들고 나올게요. 그런 거 사주지 마요, 오빠.”
“다음 주에 네 생일이잖아. 생일 선물 주는 거야.”
“오빠아…….”
퍽 감동받은 듯, 이지수가 수줍은 웃음을 피웠다. 승오는 픽 웃으면서 신호 대기에 맞춰 지수의 이마에 다정하게 키스했다. 윤서하가 늘 뿌리는 고상한 향수 냄새 대신 상큼한 비누향이 코를 간질였다.
그나저나, 어떻게 선물을 사지.
모든 가계 수입은 윤서하가 관리하고 있었다. 몇 백이나 되는 현금을 통장에서 꺼내 쓰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고, 신용 카드는 명세서가 날아오는 순간 추궁당할 게 뻔했다.
법인 카드도 마찬가지. 명품관에서 결제한 내역이 떴다간 개인 카드보다 더 큰 일이 벌어질 것이었다.
“난 오빠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없는데. 이렇게 받기만 해서 어떡하죠?”
고민에 빠진 승오에게 지수가 조심스레 물었다. 풀죽은 목소리마저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네가 해줄 수 있는 게 없긴. 오늘 저녁 반찬 뭐야?”
“순두부찌개 끓였어요. 바지락 넣고, 청양고추 넣고.”
“칼칼하게?”
“완전 칼칼하고, 진짜 시원하게.”
윤서하에겐 아침밥 한 번 못 얻어먹어 봤다. 도우미 없으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속옷 한 장까지 백화점에서 사 입어야 하는 공주님이라, 차려 달라고 할 생각조차 못 해봤다.
하지만 이지수는 달랐다. 사치할 줄도 몰라 대형마트 대신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항상 승오에게 모든 걸 맞춰줬다.
지수가 정성껏 차린 저녁 밥상을 비우고, 후식이라며 가져온 사과에 믹스커피 한 잔을 마시며 알콩달콩 꽁냥대는 시간이 요즘 승오에겐 가장 행복했다.
오늘도 그랬다. 지수의 집에 가서 얼큰한 순두부찌개로 저녁밥을 맛있게 먹은 후 소파에서 텔레비전을 봤다. 그러다 분위기 타서 침대로 갔다가 뜨거운 시간이 끝난 후엔 꼭 안고 잠들어 새벽에 눈을 떴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살금살금 돌아간 집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승오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드레스룸 문부터 열었다가 퍼뜩 기발한 생각을 떠올렸다.
“여기 이렇게 많이 있었네.”
지수네 집 거실보다 훨씬 넓은 드레스룸 한쪽에 온갖 가방과 신발이 가득히 진열되어 있었다.
승오는 붙박이장을 열어 몇 개나 되는 가방 상자를 모조리 끄집어냈다. 대부분 서하가 한두 번 들어 본 후 여러 가지 이유로 넣어 둔 물건이었다.
“하여간 사치스럽다니까. 돈 무서운 줄 몰라.”
서하의 사치를 탓하면서 상자를 하나씩 열어 보던 승오는 낯익은 물건을 발견했다.
“이게 여기 있었네.”
아마 윤서하는 이것 존재조차 잊어버렸을 것이다.
승오는 가방을 상자에 도로 넣어 서재 구석에 숨겼다. 지수의 생일에 갖고 나가서 짠, 하고 선물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