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남편이 사랑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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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남편이 사랑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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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남편이 사랑에 빠졌다
2022.04.27.
외도를 처음 안 순간보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남편이 다른 여자의 손을 잡고 ‘내 사랑이 잘못이 되어 버리잖아’ 같은 헛소리를 지껄이는 지금이 현실이라곤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이승오. 너 지금 불륜 들키고 이혼당하게 생긴 거야. 상황 파악이 잘 안 돼?”
“그러니까 네가 선택해, 윤서하. 정말 이혼할지, 앞으로도 부부로 살아갈지.”
둘은 아주 어릴 때부터 친구이자 연인이었다. 그래서 이승오는 윤서하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지나치게 잘 알았다.
이 더러운 자신감의 원처이었다.
“부부로 살아간다 만다, 그런 소리 할 거면 그 손이나 놓고 말해.”
“아니. 나는 이 손 못 놔.”
서하가 그를 버리지 못할 것임을 너무나 잘 아는 이승오가 오히려 지수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서하 너는 가진 게 많잖아. 지수한테는 나 하나뿐이야. 이혼하든 안 하든, 나는 끝까지 지수를 사랑하고 지켜줄 거야.”
“오빠…….”
감동 받은 이지수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승오에게 살포시 머리를 기댔다. 입가에 승리의 미소 같은 게 보인 건 착각일까?
서하는 머리가 텅 비는 걸 느꼈다. 아까의 당당함은 어디 가고 밑바닥까지 떨어진 비참함만이 남았다. 함께 살아온 시간과 사랑했던 기억이 녹슨 톱날처럼 심장을 썰어냈다.
“잠깐만, 여보. 우리-.”
반쯤 넋이 나가 버린 서하가 막 입을 열었을 때였다.
세기의 연인이 되어 손을 꼭 맞잡은 이승오와 이지수 뒤로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류 비서?’
언제부터 있었는지, 눈을 깜박이고 다시 봐도 류경준이었다. 그는 소파에 다리를 꼰 채 혼자 앉아 이쪽을 응시하다가 서하와 눈이 마주치자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찬물을 맞은 듯 서하의 정신이 확 돌아왔다. 여기서 구질구질하게 이승오에게 매달리는 꼴을 류경준에게 보여주느니 허리에 노란고무줄 묶고 63빌딩에서 번지점프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우리, 뭐?”
승오가 재촉했다. 서하는 경준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카페인이 금세 돌아 훨씬 정신이 맑아졌다.
“…… 우리, 깨끗하게 이혼하는 거지? 나중에 재산 분할해 달라고 소송하지 마. 어차피 거의 다 혼인 전에 형성된 재산이라 분할 대상도 아냐.”
승오의 표정이 조금 멍청해졌다.
“다 끝난 사이에 이래라저래라 잔소리 듣는 거 피곤하다는 말도 동감이야. 양가 어머님께는 서류 절차 다 끝나고 네가 사표 제출하는 날 말씀드리는 걸로 하자.”
“사, 사표?”
이번엔 이승오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서하는 아까 그가 했던 것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왜 그렇게 놀라? 설마 우리 집 가정부 딸이랑 바람나서 이혼당하는 주제에 우리 엄마 회사에 계속 다니려고 한 건 아니지?”
언젠가는 강윤컴퍼니를 물려받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살았겠지. 참 같잖은 인생 계획이었다.
“회사는 건드리지 말자. 너 항상 말했잖아.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고.”
“개소리 좀 그만해, 이승오.”
일평생 처음 듣는 서하의 욕설에 승오가 멈칫했다.
“뭐라고?”
“너 짐승 새끼인 거 잘 알았으니까 닥치고 도장이나 찍어 오라고. 이혼 서류랑 사표 둘 다.”
“아, 아가씨! 말이 너무 심하잖아요!”
씩씩거리며 언성을 높이려는 지수를 승오가 진정시키곤 눈을 부라렸다.
“윤서하. 너 이렇게 천박한 여자였어?”
“내가 아무리 천박해져도 너랑 네 애인보다는 고상할걸.”
서하는 말 같지도 않은 이승오의 비난을 한마디로 일축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몰래 웃지 않아도 돼, 이지수 씨.”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이지수가 승오에게 딱 붙어 파고들었다.
“그 남자, 개천에서 난 용이 아니라 그냥 개천이거든. 나한테 위자료 주고 나면 단칸방 얻을 돈이라도 있으려나?”
이승오의 얼굴이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크게 일그러졌다. 당황해서 그를 쳐다보는 이지수의 표정도 볼 만했다. 그동안 명치에 꽉 막혀 있던 것이 조금은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아마 바람도 피울 거야. 처음도 쉬웠는데 두 번은 껌이지. 그 여자는 이지수 씨보다 좀 더 잘났으면 좋겠네.”
악담이라기보단 확신에 가까운 말을 던져 놓고서, 서하는 이승오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아직도 소파에서 그녀를 쳐다보는 이승오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내놔.”
“뭘?”
“차 키. 재산은 각자 명의대로 가져간다, 벌써 잊어버렸어?”
이승오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차 키를 꺼냈다. 그것을 홱 빼앗은 서하는 키링을 손가락에 걸고선 작별의 미소를 던졌다.
“잘 지내. 두 사람 참 잘 어울린다고, 내가 얘기했던가?”
또각, 또각.
차가운 구두 굽 소리가 우아한 클래식 선율 사이를 두드리며 멀어졌다.
“오, 오빠.”
뒤에 남은 이승오는 사고 회로가 정지된 채 출입문을 바라보다가 지수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미안해요. 나, 나 때문에…….”
그녀의 무릎엔 얼마 전에 승오가 준 가방이 소중하게 올려져 있었다. 윤서하는 그다지 기뻐하지도 않았던 이 가방을, 이지수는 세상 다시 없는 보물처럼 꼭 안고 다니곤 했다.
그게 좋았다. 뿌듯했다. 윤서하 옆에서 한없이 기죽고 초라해 온 자신이 이지수와 함께 있으면 세상 누구보다 멋지고 당당한 ‘진짜’ 남자가 되는 기분이었다.
-‘여자는 제가 아무리 잘나도 못났다, 하고 살아야 해. 그래야 남자 기가 살지. 우리 승오가 그런 애를 만났어야 하는데…….’
옥순의 말은 정말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너무 잘난 윤서하는 존재 자체로 남자 기를 죽이다 못해 소멸시키는 여자였다.
“괜찮아. 울지 마, 지수야.”
승오는 냅킨을 집어 지수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 그래도, 감동했어요, 나. 오빠가, 나 사, 사랑한다고 말해 줘서.”
“지금까지 내가 사랑한다고 말한 건 다 어디로 들은 거야?”
“하, 항상 조금은 모, 못 믿었거든요.”
지수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수줍어했다.
“그렇잖아요. 오, 오빠처럼 머, 멋지고 대단한 사람이, 나, 나 같은 걸 진심으로 마, 만날 리가 없으니까……. 그것도, 저, 저렇게 예쁘고 능력 있는, 서하 아가씨가 옆에 있는데.”
윤서하는 예뻤다. 서하의 별명이 ‘ㅇㅇ중 원톱’에서 ‘ㅇㅇ고 여신’, ‘ㅇㅇ대 한애슬’로 변하는 동안 승오 역시 덩달아 주목받았다. ‘윤서하 옆에 걔’, 혹은 ‘남데렐라’ 등으로.
“예쁜 건 너야. 윤서하가 아니라.”
승오는 그 기억을 부정하듯 힘주어 말했다. 지수의 얼굴에 기쁜 웃음이 살포시 떠올랐다.
“나, 그런 말도 오빠한테 처음 들어요. 맨날 놀림만 바, 받았는데.”
“놀림 받아? 네가 왜?”
“마, 말더듬이라고요. 못생겼다고. 그리고…….”
고개를 푹 수그린 지수는 우물우물 덧붙였다.
“거, 거지라고…….”
울컥한 승오는 그만 지수를 힘주어 꽉 끌어안고 말았다.
“괜찮아. 이제 오빠가 있으니까, 그런 건 다 잊어버려.”
“오빠, 나, 난 괜찮아요.”
지수가 아까보다 좀 더 울먹거리면서 승오를 살짝 밀어냈다.
“오빠가 나 진짜로 사, 사랑하는 거 알았으니까 행복해요. 그 기억만으로 앞으로도 행복하게 살 수 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가요. 아가씨한테 가서 미안하다고 하고요, 잠깐 정신이 나가서 허, 헛소리한 거라고 빌어요.”
“이지수. 지금 무슨 얘기 하는 거야?”
“헤어지자고요. 나, 나 같은 애 때문에 너무 많은 걸 포기하지 마요. 오빠는 아가씨랑, 좋은 집에서 좋은 차 타고 나중에 회사 사장도 되고, 그래야 해요.”
더듬더듬 말을 끝낸 지수가 벌떡 일어섰다.
“지금까지 내가 부, 분수에 안 맞게 행복했어요. 절대 안 잊을게요. 고, 고마워요, 승오 오빠.”
“이지수!”
지수는 붙잡는 승오의 손을 거세게 뿌리치고 뛰어서 카페를 빠져나갔다. 승오는 차마 그녀를 붙잡지 못하고 멍하게 앉아 있었다.
지수가 한 말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당연했다. 지금 윤서하한테 이혼당하면 뭐가 남나. 집도, 차도, 회사도 잃고 심지어 옥순까지 살던 집에서 나와야 한다.
대표이사 사위라고 떵떵거리면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다가 어릴 때처럼 좁아터진 집에서 빌빌거리고 살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젠장, 윤서하!”
원망의 화살은 생각지도 못하게 단호했던 윤서하에게 날아갔다.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붙어 다니다가 결혼한 사이였다. 그동안 승오는 모든 스케줄을 윤서하에게 맞추면서 최선을 다했고, 윤서하가 이승오를 사랑하지 않았던 순간은 단 1초도 없었다.
“이혼? 내가 왜 다른 여자를 만났는지는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 잘못 고칠 생각은, 아니.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다짜고짜 이혼이라고? 남자라도 생긴 거야? 어떻게 나한테……!”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던 승오는 옆자리에 놓인 가방을 발견하고 말을 멈췄다.
그 바보 같은 여자가 이것마저 돌려주려 놓고 간 게 분명했다. 가방 속에는 다 낡아빠져 실밥이 튀어나온 하늘색 지갑과 얼마 전에 사준 립스틱이 들어 있었다.
승오는 떨리는 손으로 지갑을 열었다. 내용물은 체크카드 한 장, 만 원짜리 세 개, 얼마 전 둘이서 찍은 스티커 사진이 전부였다.
“…… 지수야.”
벌떡 일어선 승오는 한 손에 지수의 가방을, 한 손에 스티커 사진을 꼭 쥐고 바깥으로 나왔다. 지수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뛰고 또 뛰다 보니 8차선 도로 건너편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힘없이 걷는 지수가 보였다.
“지수야!”
단전에서부터 기를 끌어올려 있는 힘껏 사자후를 터뜨리자 행인들이 깜짝 놀라 전부 이쪽을 쳐다보았다.
“이지수! 여기 봐! 이지수!”
하지만 지수는 돌아보지 않았다. 못 들은 건지. 못 들은 척하는 건지.
다급해진 승오는 무작정 도로로 뛰어들어 중앙분리대를 넘었다.
-끼익!
-빠아아앙-!
“야이 시X로매 새끼야! 뒈지려고 환장했어!”
사방에서 차들이 빵빵거리고 운전자들이 욕설을 퍼부었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이지수!”
고개를 든 지수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커졌다.
“오빠……?”
“지수야!”
승오는 순식간에 8차선 도로를 무단횡단하고도 용케 잘 붙어 있는 팔로 지수를 꽉 끌어안았다.
“사랑해, 지수야! 영원히!”
“오빠, 흑, 흐윽…….”
지수가 울면서 까치발을 들었다. 두 입술이 꼭 맞는 퍼즐처럼 빈틈없이 겹쳐졌다. 운전자들의 쌍욕을 bgm삼아 강남대로 한복판에서 키스를 나누는 순간, 두 사람은 애절하고 로맨틱한 영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내가 지켜줄게. 평생 공주님으로 모시고 사랑할게. 우리 헤어지지 말자. 지수야.”
승오는 지수의 눈에 맺힌 눈물을 입술로 핥으면서 생각했다.
윤서하만 없으면 돼. 지금 이 상태에서 윤서하만 사라진다면 전부 지킬 수 있어.
돈도, 사회적 지위도, 사랑하는 사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