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머저리를 위하여
(9/45)
9. 머저리를 위하여
(9/45)
#9. 머저리를 위하여
2022.04.30.
“언제까지 따라올 거예요?”
서하는 승오에게서 빼앗은 스마트키를 누르며 물었다. 아까부터 티 나게 따라오던 발소리가 좀 더 가까워지다가 바로 뒤에서 멈췄다.
“나 그냥 내 차 타러 가는 길인데요. 윤서하 씨 자의식 과잉 있으신가? 아니면 도끼병?”
“도끼로 확 찍어버리기 전에 류 비서님 차 타시죠.”
“말 잘하네. 아까 남편한테나 그렇게 하지.”
서하가 빙글 돌아 경준을 노려보았다.
“상쾌한 주말에 할 짓 없어요? 카페 앉아서 남의 사생활이나 엿듣게?”
“엿들은 게 아니라, 내가 거기 앉아 있는데 들렸습니다. 그 조용한 데서 불륜이다 뭐다 하면서 대놓고 드라마 찍는데 안 들릴 수가 있나?”
“아까부터 말이 슬슬 짧네요. 입 헤 벌리고 드라마 구경하다가 혀 깨무셨어요?”
“눈물이나 닦고 말합시다. 산타 할배가 선물 들고 오다가 유턴하겠네.”
경준이 성의 없이 던진 손수건이 서하의 머리 위에 안착했다. 서하는 지난번에 이 인간한테 고맙다고 인사했던 자신을 매우 쳐버리고 싶었다.
“나 안 울었거든요.”
“눈 밑에 마스카라 국물은 요새 유행하는 화장법인가?”
서하는 머리에 올라간 손수건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물기나 마스카라 얼룩은커녕 깨끗하기만 했다.
“지금 장난해요?”
도로 휙 던진 손수건을 경준이 공중에서 낚아챘다.
“자기가 울었는지 안 울었는지도 모르네. 그렇게 둔하니까 쓰레기한테 당하지.”
경준은 또 날아올 독설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를 매섭게 노려보던 윤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게 아닌데.
돌아선 윤서하가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왠지 이대로 보내면 더럽게 찜찜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경준은 급히 뛰어가 조수석 문을 열고 냉큼 올라탔다.
“뭐 하는 짓이에요? 당장 내려요!”
“같이 좀 갑시다. 상쾌한 주말에 할 짓 없어서 그래요.”
뻔뻔하게도 벌써 안전벨트까지 찼다. 자신에게는 너무 좁게 맞춰진 조수석 좌석을 넓게 조절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내려요. 신고당하고 싶어?”
“나 신고해서 감방 가면 대표님 보좌는 누가 합니까? 나만큼 일 잘하는 비서 구하기 힘들 텐데.”
“…….”
서하는 이 의미 없는 말싸움을 그만두기로 했다. 이승오와 이지수에게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 뒤라 더 싸울 힘도 없었다.
혼자 초라하게 있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긴 했다. 조오금, 아주아주 조금.
항상 승오가 타고 다니던 서하의 차가 호텔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서하는 그대로 우회전해서 8차선 도로에 접어들었다. 이렇게까지 막힐 시간이 아닌데 차가 잘 움직이지 않고 앞쪽이 소란스러웠다.
“뭐지? 사고라도 났…….”
소란이 일어난 쪽을 자세히 살피던 서하의 시선이 도로 건너편에 멈췄다.
이승오가 중앙분리대를 넘어 반대편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평생 본 적조차 없는 열정으로 이지수를 꽉 끌어안고 격렬한 키스를 나누는 그를 향해 운전자들이 경적과 욕설을 쏟아냈다. 한심하고 수치스러운데 화나고 슬픈, 이상한 광경이었다.
“이야. 끝내주는 머저리네.”
서하가 하고 싶은 말을 경준이 정확하게 내뱉곤 커다란 손으로 서하의 눈을 가렸다.
“보고 있지 마요. 멋지게 이혼 서류 던졌잖아. 윤서하 씨가 좀 재수 없고 싸가지긴 하지만, 저런 머저리한텐 상당히 아깝지.”
기분 나쁜데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그쪽 재수도 만만치 않거든요.”
서하는 경준의 손을 잡아 치웠다. 흘깃 보니 이승오와 이지수는 아직도 염병중이었다.
“보지 말라니까.”
경준이 서하의 머리를 양손으로 잡고 똑바로 앞을 보게 만들었다.
“엑셀 밟아요. 앞으로 가야지.”
서하는 경준이 시키는 대로 엑셀에 발을 올렸다. 자동차가 아직도 염병 삼매경에 빠진 세기의 커플을 지나쳐 직진 차선으로 진입했다.
“운전 잘 하네.”
경준이 씩 웃으며 라디오 버튼을 눌렀다. 까마득한 중학생 시절에 유행했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류 비서 집이 어디예요?”
“집은 왜요?”
“집에 갖다 놔야 내릴 거 아녜요.”
“집까지 데려다주시게? 생각보다 친절하십니다.”
“나 피곤하니까 빨리 말해요.”
“을왕리.”
“네?”
서하는 이 인간이 장난치나 싶어 옆을 휙 돌아봤다. 의외로 경준의 표정이 진지했다.
“을왕리 산다니까요. 빨리 갑시다. 데려다준다면서요?”
“을왕리에서 강남까지 출퇴근해요? 매일?”
“평일에는 회사 근처 오피스텔에서 지내고, 주말에는 을왕리에 있습니다. 오늘은 주말이고.”
뭔가 그럴듯했다. 그래도 을왕리는 아니지.
“너무 멀어요. 여기 내려줄 테니까 알아서-.”
“좀 갑시다. 내가 도와줬잖아요.”
“뭘 도와줬다는 거예요?”
“내가 지켜봐 줬잖아. 윤서하 씨 또 울까 봐.”
“말 잘라먹지 말라니까. 그리고, 울긴 누가 울어요?”
“눈물 참는 거 다 보이던데. 우나 안 우나 계속 봤습니다.”
“그걸 왜 쳐다보고 있어요? 변태야? 스토커야?”
“울면, 그냥 가서 끌고 나오려고 했지.”
서하는 말이 탁 막혔다. 류경준이 상당히 도움 된 건 맞다. 이성을 잃고 구질구질해지려는 순간 마주친 류경준의 시선 덕분에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왜요?”
“말했잖습니까? 윤서하 씨가 아무리 재수 없어도 그 머저리한텐 아까워. 내가 모시는 대표님 따님을 그렇게 놔두는 건 직무 태만인 것도 같고.”
잠시 창밖을 바라보던 경준이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그래도 잘했습니다. 그 머저리, 뒤통수만 봐도 시원하게 한 방 먹었던데.”
그는 정말 이상한 남자였다. 서하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무례하고 싸가지 없는 주제에 툭툭 던지는 말이 위로가 되고 가슴이 시원해졌다.
어차피 혼자 집에 가면 기분만 싱숭생숭할 거, 그냥 드라이브 겸 을왕리까지 데려다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포화 상태인 도로를 뚫고 을왕리까지 오는 데는 장장 세 시간이 걸렸다. 경준은 그동안 등받이까지 눕혀선 아주 편안하게 잘 자고 눈을 떴다.
“으아, 잘 잤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는 경준을 서하가 어이없이 쳐다보았다.
“어쩜 그렇게 대놓고 자요?”
“졸리니까 자지. 윤서하 씨는 졸리면 안 잡니까?”
서하는 푹 자서 한결 뽀얘진 피부로 싱글싱글 웃는 그의 얼굴에 딱밤 한 대를 날리려다 참았다.
“집 어디예요?”
“직진해서 우회전. 어. 맞아요. 쭉 가서……. 그래. 이제 저기서 좌회전. 여기 들어가서 또 쭉 직진.”
경준이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네비게이션처럼 지시했다. 그대로 따라가다 보니 웬 바닷가 조개구이집이었다.
“저기. 주차장에 넣어요.”
“류 비서님 조개구이집 해요?”
“일단 넣어요. 뒤에서 빵빵거리잖아.”
서하는 경준과 뒤차의 재촉에 떠밀려 할 수 없이 조개구이집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차가 멈추자마자 쏙 빠져나간 경준이 운전석 쪽으로 돌아와 문을 벌컥 열었다.
“내려요.”
“왜요?”
“을왕리 와서 조개구이도 안 먹고 가려고 했어요?”
문이 활짝 열린 차 안으로 고소한 가리비 버터구이 냄새가 둥실둥실 파고들었다.
맛있겠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간 제대로 밥을 먹은 적이 없었다. 그걸 깨닫자마자 배가 꼬르륵꼬르륵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 참. 뭘 그렇게 멍때립니까?”
경준이 불쑥 상체를 밀어 넣고 서하의 안전벨트를 더듬었다. 갑자기 훅 다가온 목덜미에서 상쾌한 냄새가 났다. 비 온 뒤 풀밭 냄새 같기도, 초겨울에 불쑥 찾아온 바다 냄새 같기도 했다.
“류 비서님.”
안전벨트 버튼을 찾던 경준이 그대로 서하를 돌아보았다.
“향수, 뭐 써요?”
항상 위에서 차갑게 서하를 내려다보던 눈동자가 두어 번 느리게 깜박였다.
“…… 비누.”
“네?”
“비누 씁니다.”
찰칵, 드디어 안전벨트가 풀렸다. 경준이 미련 없이 일어선 자리에 상쾌한 비누 냄새가 맴돌았다.
“아. 비누.”
서하는 차에서 나와 문을 탁 닫았다. 경준은 그새 앞서 나가 조개구이집 현관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뭐 합니까? 빨리빨리 좀 와요! 아, 두 명이요. 창가 자리로 부탁합니다.”
서하는 그의 재촉에 쫓기듯 달려가 2층 창가 테이블에 앉았다. 커다란 창문 밖에 막힘 없이 펼쳐진 바다가 한가득 눈으로 안겨들었다.
“와아. 바다다!”
바쁘게 사느라 볼 생각도 안 했던 바다인데 막상 보니 좋았다. 두 손으로 창문을 짚고 탄성을 내뱉는 서하의 입가에 환한 웃음이 걸렸다.
경준은 등받이에 기대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비즈니스적이지 않게 웃는 얼굴은 처음 봤다. 원래도 꽤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가 환하게 웃으니까 정말 예뻤다. 주관적으로 재수 없는 여자긴 하지만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것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는 것보다 훨씬 낫네.
‘사업’때문이긴 했지만, 그 호텔 카페에 앉아 있었던 게 제법 괜찮은 우연처럼 느껴졌다. 차도 없이 집에 돌아갈 일은 좀 막막하긴 했다.
뭐, 그건 조개구이 다 먹고 생각해야지.
“음식 나왔습니다.”
연탄불과 잘 손질된 각종 조개가 테이블에 등장했다. 아까 서하를 유혹했던 가리비 버터구이도 있었다.
“…….”
“…….”
두 사람은 그것들을 사이에 놓고 멀뚱멀뚱 앉아 서로를 쳐다보다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안 구워요?”
“안 굽습니까?”
“…….”
“…….”
1초간 침묵 뒤에 또 둘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나 이런 거 못 구워요.”
“나 이런 거 못 굽습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서하는 그를 처음 봤을 때 했던 생각을 똑같이 되풀이했다.
“류 비서님이 오자고 했잖아요. 빨리 구워요.”
“내가 살 테니까 윤서하 씨가 좀 구웁시다.”
“내가 조개구이 살 돈 없어서 몸으로 때울 사람으로 보여요? 여기까지 운전한 사람 누구예요?”
“그러네.”
조개 굽는 집게는 결국 경준의 차지가 되었다. 이왕 잡았으니 그는 최선을 다해 조개를 굽고 뒤적였다. 비록 곧 피어오르는 연기에 직원이 달려오긴 했지만, 어쨌든 조개는 먹음직스럽게 익었다.
“술 합니까?”
경준이 방금 나온 소주병을 흔들면서 물었다.
“대리비 줘요?”
“까짓거.”
“콜.”
서하는 지나가는 직원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여기요. 맥주 한 병이랑 맥주잔 두 개 주세요!”
막 소주병을 따던 경준의 손이 멈칫했다.
“…… 소맥?”
“소맥.”
“보기보다 뭘 좀 아네.”
“이래 봬도 유학파거든요.”
서하는 잔 두 개에 맥주 반 잔씩을 따르고 소주잔을 통째로 빠뜨린 후 냅킨으로 입구를 막아 쑥 내밀었다.
“원샷. 머저리를 위하여.”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평생 사랑한 남편이 바람 나서 이혼 서류 던진 날에, 원수 같은 남자랑 을왕리 와서 조개 굽고 소맥 말고 있다니.
“머저리를 왜 위합니까? 속도 좋아.”
경준이 서하가 내민 잔을 받아 탁 쳐서 회오리를 만들었다.
“원샷. 머저리 전처, 윤서하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