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서하가 눈을 뜬 날 (12/45)


#12. 서하가 눈을 뜬 날
2022.05.11.


인정하기 싫지만, 이승오는 쫄았다.

대표실에 올라갈 때마다 류경준과 마주쳤지만 그에 대해 별로 깊이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항상 무표정이고 모든 사람에게 정중하다는 것 정도가 경준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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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대답이 없어? 나랑 윤서하가 어떤 사이길래 핸드폰이 그 차에 있었는지, 궁금하지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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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야, 당신. 말투가 왜 그따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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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투 같은 건 밀어 둬.”

경준이 다시 싱긋 웃곤 허리를 바로 하더니 주머니에 양손을 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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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이승오 씨. 나랑 비즈니스로 거래 하나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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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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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가 태양 그룹 회장 아들이거든.”

멍한 표정으로 경준을 바라보던 이승오가 이윽고 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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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비서, 생각보다 재밌는 사람이었네. 어차피 얼굴 볼 날 얼마 안 남았다고 장난 좀 쳐보고 싶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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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전임자 최 비서, 안 왔다 갔지?”

경준이 여전히 싱글싱글 웃으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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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한테 십 억 일시불로 받아갔거든. 이 자리에 나 꽂아 주고 다시는 접근하지 않는 조건으로.”

이승오의 표정이 다시 굳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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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가 직접 제안한 인수합병을 여기 강 대표가 제대로 듣지도 않고 거절했어. 그 자존심 대단한 양반이 얼마나 열 받았게? 여태껏 태양 그룹이 인수 못 한 회사는 하나도 없었는데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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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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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 소설 같은 기연이 지금 당신한테 왔어.”

경준은 윤서하가 누워 있는 커튼 너머를 흘깃 보고선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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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자고. 당신은 임시 대표로 일단 회사를 잘 키워. 그러고 나서 적당한 타이밍에 내가 태양 그룹 통해서 다시 인수합병 제안을 할게. 그때 못 이기는 척 도장 찍고 돈이든 태양 그룹 요직이든 받아서 손 터는 거야.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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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말이 사실일까.

이승오는 류경준에게 완전히 압도당한 채 눈을 껌벅였다.

태양 그룹은 분명 작은 회사들을 흡수해 사업을 키워왔다. 그 태양 그룹이 유일하게 갖지 못한 회사가 이 강윤컴퍼니라는 것도, 태양 그룹 회장이 ‘류’씨라는 것도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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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말이 사실이라는 근거가 어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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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비서한테 전화해서 물어 봐. 그래도 의심되면 지금 내 아버지랑 통화하든가.”

경준이 핸드폰에서 ‘류 회장님’이라는 번호를 찾아 화면에 띄웠다. 당장이라도 통화 버튼을 누를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이승오에겐 그런 거물과 직접 통화를 할 만한 깡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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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알았어!”

이승오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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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말이 맞다 치자. 그런데 왜 강 대표가 쓰러진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인수합병을 하자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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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가 쓰러졌어. 외동딸은 죽은 거나 다름없고. 그런데 이 상황에 사위가 냉큼 회사를 판다? 이승오 씨는 팔고 튀면 그만이지만, 그 회사를 산 태양 그룹 이미지는 누가 책임질 건데?”

듣고 보니 매우 맞는 말이자 태양 그룹의 시각에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기회다.

엄청난 행운이 바로 앞에 있었다. 이승오는 터질 듯 부푼 가슴을 안고 웃음을 삭이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처음엔 불쾌하던 류경준의 무례함마저 가진 자의 여유와 멋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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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듣고 보니 나쁘진 않네요.”

그는 짐짓 태연한 척 거드름을 피우면서도 자신이 다시 깍듯하게 존댓말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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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합병을 준비할 동안 류경준 씨가 원하는 건 뭡니까? 그쪽도 원하는 게 있을 거 아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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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한 타이밍에, 적당한 조건으로 인수합병만 성사된다면 별로 바라는 건 없지만.”

경준이 다시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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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 회사가 성실하게 커가는지 확인해야 하니, 내가 계속 비서실장을 맡는 게 좋겠습니다. 임원 겸직으로.”

조건 축에도 못 낄 간단한 조건이었다. 최 비서에게 확인해서 저 말들이 허언증이라면 해임할 이유도 충분하고. 계속 이끌어가기엔 골치 아픈 회사를 현금과 명예로 바꾸는 데 이보다 더 달콤한 기회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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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하나 더.”

경준이 집게손가락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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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얘기는 우리끼리만 하는 걸로 합시다. 괜히 새나가면 인수합병 반대다 뭐다 해서 골치 아파지니까.”

이것 역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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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습니다. 인수합병까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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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말로.”

이승오가 내민 손을 류경준이 맞잡고 한 차례 흔들었다.

***

윤서하의 비극적인 사고 이후, 해가 세 번 바뀌었다.

이승오는 예정대로 임시 대표 직함을 달고 회사를 경영했다. 이지수는 막내 디자이너로 입사한 지 세 달 만에 팀장 명함을 달았다.

실력에 비해 너무나 과분하고 파격적인 그 승진은 세 명이나 되는 실력파 디자이너들을 떠나게 했다.

경준은 비서실장이자 사내 이사로서 이승오 옆에 딱 붙어 그 모든 과정을 하나도 남김없이 지켜보았다. 강해선과 윤서하가 만들고 지켜낸 것들이 하나씩 망가질 때마다 그 역시 쓰린 속을 삼켰다.

목표인 인수합병에 대한 의지는 아직 확고했다. 대한민국에서 누가 류 회장의 뜻을 거스를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은 시간을 벌어야 했다. 어느 날 눈을 뜬 윤서하가 이미 팔린 회사 앞에서 망연자실해 있는 꼴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인수합병 놓고 윤서하와 서로 죽이니 살리니 싸워 가며 가져오는 게 낫지, 강 대표와 윤서하가 무력하게 누워 있는 사이 도둑처럼 훔치고 싶진 않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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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갔다 오겠습니다. 불편하시면 퇴근하셔도 됩니다.”

병원에 도착하자 이승오가 깍듯하게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류경준이 아니라 이승오가 비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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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편히 시간 보내시죠.”

경준도 이승오에게 표면적인 예의를 지켰다.

병원 입구로 걸어가는 이승오의 팔에 뒤따라온 이지수가 찰싹 달라붙었다.

경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차를 주차장에 세우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목적지는 수십, 수백 번이나 드나들었던 윤서하의 병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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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하지 마요. 간병인 아줌마 오면 어쩌려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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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으러 갔잖아. 한 시간은 있어야 올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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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오……. 꺄앗!”

닫힌 문을 뚫고 역겨운 대화가 흘러나왔다.

경준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하얗게 불거진 손마디 안에서 손톱이 여린 살을 파고들었다.

차트를 손에 든 의사와 간호사들이 나타났다. 경준은 다행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약간 숙여 인사하고 위층으로 향했다.

-똑똑.

문을 두드리고 잠시 후, 대답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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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세요.”

환자복을 입고 창가에 앉아 있는 강해선은 언뜻 예전과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신체적으로는 매우 건강하고 몸가짐도 단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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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좀 어떠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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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좋아요. 그런데…….”

강해선이 미안한 듯 살짝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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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하지만 누구시죠?”

윤서하의 사고 이후 벌써 삼 년.

강해선은 더 이상 혈혈단신으로 회사를 이끌고 임원진을 호령하던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감당할 수 없는 충격으로 인해 이십 년도 더 전, 보물 같은 딸이 아장아장 걷던 시절에 스스로 갇혀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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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새로 입사한 비서 류경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경준은 삼 년간 수백 번도 더 해온 인사를 오늘도 똑같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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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우리 회사에 젊은 인재가 들어왔네요. 나야말로 잘 부탁해요, 류 비서.”

생긋 웃은 해선이 갑자기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곤 화들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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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류 비서, 최 비서한테 나 먼저 퇴근한다고 전해 줘요. 오늘 우리 딸 생일이라서 꼭 일찍 간다고 약속했거든.”

일찍 가서 서하를 만나야 하는 이유는 매일매일 바뀌었다. 생일이라서, 날씨가 좋아서, 비가 와서, 아이스크림을 사 주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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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서하 양은 발레 교실에 갔습니다. 나중에 제가 챙겨서 데려오겠습니다.”

그러나 해선은 오늘도 서하를 만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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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시간이 좀 있네. 다음 일정은 어떻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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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후에 미팅 있습니다. 쉬고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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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류 비서.”

경준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병실 앞 복도에서 기자들과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던 옥순이 그를 보고 재빨리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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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비서. 이 대표는 어디 갔어? 기자님들이 기다리시는데 영 연락이 안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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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서하 씨 병실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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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거기로……. 아니다. 지수도 같이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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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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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야겠네. 땡큐!”

들어올 때도 없었던 경호원이 지금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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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자르고 새로 구해야겠어.”

경준은 팔짱을 끼고 문 앞에 버티고 서서 혼잣말을 뱉었다. 호시탐탐 병실 안을 기웃거리던 기자들이 그가 노려보는 눈빛에 슬쩍 딴청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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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야가 온통 새하얬다. 서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서너 번 눈을 깜박이는 동안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다.

병원?

시야를 가득 채웠던 흰색은 다름 아닌 병원 천장이었다. 조용히 웅성거리는 말소리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발소리도 들렸다.

몸을 움직이고 싶은데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몸과 생각이 따로따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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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간신히 달싹인 입술에서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용케 그 소리를 듣고 돌아본 간호사와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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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간호사가 깜짝 놀라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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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분, 정신이 드세요? 제 말 알아들으시겠어요?”

서하는 고개를 힘없이 끄덕였다. 곧 의사를 비롯한 의료진이 열 명쯤 달려와 침대 주변을 둘러쌌다. 막 깨어났을 땐 몰랐는데, 얼굴에 산소호흡기까지 붙어 있는 걸 보니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었던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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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왜 여기 있죠?”

의료진이 조심스레 산소호흡기를 제거하자마자 서하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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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로 실려 오셨어요. 벌써 삼 년 넘게 코마 상태였는데 기적적으로 깨어나신 겁니다. 혹시 연락하실 가족이나 친지분 있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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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가족, 가족.

서하는 그 단어를 멍하니 되뇌었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텍스트만 건조하게 반복될 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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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안 나요.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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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사고나 혼수상태 후에는 일시적으로 기억이 안 날 수 있어요. 조서하 씨 경우에는 특히 더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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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서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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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이름이에요. 기억나세요?”

또렷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서하’라는 울림이 몸에 꼭 맞는 옷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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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름인 것 같아요. 서하.”

서하.

그 이름을 입으로 내뱉자 머릿속에 말소리가 흐릿하게 윙윙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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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무서운 건 말야, ...가 이렇게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나 앉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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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곤 말하는 거지. 이혼 서류는 어떻게 됐어? 위자료는 준비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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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차가 지나치게 튼튼했어. 어떻게 트럭으로 갖다 박았는데 멀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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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악!”

안구 안쪽으로 뇌가 뒤틀리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갑작스러운 비명에 놀란 의료진들이 서하를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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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분!”

서하는 머리를 감싸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두통은 금세 사라졌지만 차갑고 불쾌한 기분은 그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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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였지?’

실제로 있는 기억일까. 뇌가 만들어낸 착각일까.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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