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돌아온 기억 (13/45)


#13. 돌아온 기억
2022.05.14.


3년간 누워 있었던 환자가 스스로 걷는 데에는 제법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서하는 매일 검사와 치료를 받고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재활로 보냈다. 그거 말곤 딱히 할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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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좋네.”

좀 비틀거리면서도 보조기 없이 혼자 걸을 수 있을 만큼 회복한 후에는 컨디션도 훨씬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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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산책 갔다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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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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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서하는 그새 안면을 튼 간호사들에게 쾌활하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모처럼 좋은 날씨 덕분에 서하처럼 산책을 하는 환자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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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을 데가 없네.”

서하가 그나마 사람이 적은 뒤꼍에서 빈 벤치를 찾아 앉았을 때, 어디선가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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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봐요. 우리 서하한테 딱 맞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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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손재주가 좋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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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

반사적으로 주변을 살핀 서하의 시선이 화단 구석에 가 닿았다.

환자복을 입은 아주머니와 정장 차림의 젊은 남자가 쪼그리고 앉아 토끼풀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질적인 광경에 호기심이 생긴 서하는 슬쩍 일어나 그 옆으로 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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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리 딸 어렸을 때는 옷도 내 손으로 만들어 입혔어요. 지금은 너무 바빠서 그럴 시간도 없네.”

인기척을 느낀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머쓱해진 서하는 재빨리 지나가려다가 그만 화단 경계석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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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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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토끼풀 엮던 아주머니가 급히 달려와 서하를 부축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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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아가씨? 많이 다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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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괜찮아요.”

얼얼한 무릎을 문지르면서 고개를 든 서하가 아주머니와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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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야!”

아주머니가 주변이 떠나가라 큰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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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를 아세……?”

서하는 아주머니가 갑자기 자신을 품에 꽉 끌어안는 바람에 말을 잇지 못하고 바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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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애기 어디 있었어! 엄마가 얼마나 찾았는지 아니? 얼른 가자. 엄마랑 집에 가자, 서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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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남자가 아주머니를 억지로 서하에게서 떼어 놓으며 정중하게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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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저희 대표님이 아직 편찮으셔서. 괜찮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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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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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야, 다리 보자. 많이 다쳤어? 아파? 엄마가 호 해줄게. 아이고, 예쁜 내 새끼가 아파서 어떡하니.”

아주머니가 뻗은 손은 남자에게 잡혀 서하에게 닿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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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 저 아가씨는 따님이 아닙니다. 들어가 계시면 제가 따님 모셔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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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고……?”

조금 초췌하지만 고운 분이었다. 아주머니는 서하를 쳐다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곧 생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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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예쁜 아가씨네. 그리고 그쪽은 처음 보네요. 신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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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경준이라고 합니다, 대표님. 이번에 새로 비서실에 들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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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류 비서. 잘 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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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시죠. 바람이 찹니다.”

뭔가 이상한 남자와 아주머니는 대화를 나누면서 나란히 등을 돌려 걸어갔다. 몇 걸음 걷던 남자가 뒤를 돌아보곤 서하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미안하다는 뜻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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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일도 다 있네.”

서하는 얼떨떨해져선 다시 벤치에 앉았다. 그러곤 다친 무릎을 살피려 고개를 숙였을 때, 바닥에 떨어진 토끼풀 팔찌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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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거.”

급히 그것을 주워들고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남자와 아주머니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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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지, 뭐.”

다행히 무릎은 많이 다치지 않았다. 서하는 혼자 앉아 토끼풀 팔찌를 손목에 대어 보았다. 처음부터 서하의 것이었던 듯 꼭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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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가슴이 시큰 아팠다. 이유 모를 눈물이 툭 떨어져 토끼풀꽃 위에 어룽거렸다.

다음 순간, 잃어버렸던 기억이 한꺼번에 휘몰아쳤다. 아주 어릴 적부터 사고 직전까지, 윤서하로서 살아온 모든 기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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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목소리를 내뱉자마자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가슴이 너무 아파 제대로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서하는 손에 팔찌를 꼭 쥐고서 비틀비틀 달려 나갔다. 아직 튼튼하게 움직이지 못하는 두 다리가 못내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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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엄마!”

해선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찾아서 서하 여기 있다고 말해야 하는데. 엄마는 경준이 태양 그룹의 스파이라는 것도 모를 텐데.

미친 사람처럼 엄마를 부르면서 뛰어다니던 서하는 로비 앞에서 유리에 비친 자신을 발견하고 딱 멈추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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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누구야?’

서하는 양손을 들어 자세히 살폈다. 재단 가위에 깊이 베어 여섯 바늘이나 꿰맸던 흉터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엄마를 닮아 살짝 휘어진 새끼손가락도 반듯했다.

조서하.

의료진들은 지금 이 이름으로 그녀를 부른다.

서하는 유리에 한 발짝 더 다가섰다. 낯선 여자의 이목구비가 더욱 뚜렷해졌다.

삼 년이 넘게 지난, 하지만 서하에겐 어제의 기억인 사고.

그 마지막 기억에서 빨간 벽돌을 들고 차 앞에 뛰어들었던 여자가 거울 속에서 서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이 와중 엄마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강하게 지배했다. 다시 비틀거리며 로비로 들어선 서하는 뒤에서 누군가에게 밀려 철퍽 엎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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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얏!”

서하에게 힘이 있을 리 없는데도, 상대방은 자신이 밀린 듯 되려 짜증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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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어디 놓고 다니는 거예요?”

안 그래도 약한 몸이 두 번이나 넘어지는 통에 너무 아팠다. 잘 일어나지 못하고 끙끙거리는 서하 앞에 남자의 구둣발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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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야,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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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실수로 부딪혔어요. 기, 기분이 많이 상하셨나 봐요. 정말 죄송해요. 아프신 분한테…….”

갑자기 여자의 말투가 바뀌었다.

그 남녀의 목소리를 듣자 등줄기에 소름이 쫙 끼쳤다. 서하는 바닥에 쓰러진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승오, 이지수.

이승오가 아내를 트럭으로 밀어 버린 사람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다정한 얼굴로 이지수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있었다.

이지수는 더욱 끔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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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나잖아!’

서하가 봐도 윤서하인 줄 알 정도로 똑같은 모습이었다. 머리, 액세서리, 화장, 옷, 가방, 신은 구두, 심지어 향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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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미안해서 어쩌죠? 다친 데는 없어요? 여기요. 내 손 잡고 일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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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리 치워!”

서하는 몸서리를 치면서 이지수의 손을 탁 쳐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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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앗!”

힘도 없는 환자가 쳐 봐야 얼마나 세게 쳤을까. 하지만 이지수는 서하가 야구 방망이로 때리기라도 한 것처럼 새된 비명을 내며 남자에게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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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아니, 이봐요! 아무리 그래도 실수한 것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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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 괜찮아요. 내가 먼저 잘못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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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같이 착하다니까. 어휴.”

두 쓰레기가 서로를 끌어안고 염병하면서 태연하게 걸어갔다. 서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터져 나오는 악을 속으로 삼켰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 몸은 조서하다. 지금 달려들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엄마부터 찾아야 해.

서하는 두 사람이 들어간 복도를 노려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VIP병실 전용 통로]

그나마 다행인 건, 엄마가 저 몇 개 안 되는 VIP병실에 있을 거란 사실이었다.

그리고 진짜 ‘윤서하’의 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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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황빛 노을이 창문을 넘어 새하얀 시트 위에 쭉 드러누웠다. 물방울 모양 가습기가 차가운 김을 폭폭 쏟아낸다. 서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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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우리 아가 어디 갔지?”

해선은 화들짝 자리를 떨치고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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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야. 엄마 아기, 어디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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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닫혀 있던 문이 홱 열리더니 젊은 여자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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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왔어요.”

해선이 멍한 눈을 껌벅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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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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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언제 알아봐 줄 거예요? 엄마.”

윤서하와 같은 헤어스타일, 윤서하의 옷, 윤서하의 액세서리와 가방, 윤서하의 구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윤서하처럼 꾸민 지수는 방그레 웃으면서 해선을 부축해 침대에 앉히곤 자신도 그 옆에 걸터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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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보러 왔어. 이 서방은 바빠서 못 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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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참이나 껌벅껌벅 지수를 쳐다보던 해선이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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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치지 말아요. 우리 딸은 어디 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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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좀! 나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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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우리 서하 못 봤어요? 키는 요만하고 눈이 동그랗고, 아주 예쁘게 생겼어요. 머리는 양쪽으로 묶어서 노란 머리방울 달았고요.”

지수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디자이너로 입사하자마자 초고속 승진을 한 것까진 좋았다. 그녀를 무시하고 따돌리던 디자이너들이 제 발로 퇴사한 것도 만족스러웠다.

문제는 중단된 새 브랜드의 디자인이었다.

책상 아래 놓인, 부수거나 태우는 것도 불가능한 조그만 금고 안에 윤서하의 디자인북이 들어 있었다.

이승오는 그 금고의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세상에 오직 두 명뿐이라고 말했다. 한 명은 당연히 윤서하, 한 명은 강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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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라니까. 왜 자꾸 못 알아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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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팔찌를 놓고 왔네. 우리 애기 주려고 만들었는데.”

샐쭉해진 지수는 주스 한 병을 꺼내 꿀꺽꿀꺽 마시곤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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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수 씨.”

경준이 들어와 잡상인 쫓아내듯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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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 가시죠. 대표님이 피곤해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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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오 분도 안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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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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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장님은 대체 무슨 권한으로 항상 사람을 이렇게 쫓아내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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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대표님 병실에 들락거리는 건데?”

경준이 싸늘하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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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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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

사내 이사라지만 실제 직책은 비서실장일 뿐인 류경준에게 이승오는 늘 저자세였다. 지수에게조차 그 이유를 알려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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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칫!”

어쨌든, 승오를 따라야만 하는 지수는 분풀이로 반쯤 남은 주스병을 일부러 탁 쳐서 바닥에 깨뜨리곤 쌩하니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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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경준은 한숨을 쉬면서 유리 조각과 엎어진 주스를 치웠다. 이 소란에도 해선은 여전히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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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 가보겠습니다, 대표님. 내일 또 뵙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온도, 습도, 방의 비품까지 체크를 끝낸 경준은 정중히 인사하곤 밖으로 나왔다. 문 앞에서 경호원이 가벼운 묵례를 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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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세요. 자리 비우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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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실장님.”

이제 이승오를 집에 데려다주면 하루의 스케줄이 끝난다. 사실 안 데려다줘도 아무 상관없지만, 조금이라도 허튼짓할 시간을 줄이는 게 나았다.

경준은 조용한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뒤쪽에 있는 비상구 문은 닫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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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취!”

그 닫힌 문 너머에서 조그만 재채기 소리가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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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경준은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레 비상구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손잡이를 잡아 확 열어젖히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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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

비상구에 숨어 제 입을 틀어막고 있던 여자와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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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기자가 아니라 환자였다. 오늘 산책 시간에 뒤꼍에서 마주친, 윤서하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데도 해선이 서하라고 부르며 끌어안았던 여자.

어쨌든 좋은 의도로 왔을 리가 없다. 경준의 눈매가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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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봤던 그 사람 맞지? 왜 여기 숨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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