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면접장의 경준 (17/45)


#17. 면접장의 경준
2022.05.28.



16583722760976.jpg

“저기, 그……. 이거, 진짜 상황인가요?”

여자가 승오의 명함을 몇 번이나 읽어보고 물었다. 혹시 구겨질까 봐 꼭 쥐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들고 있는 모습도 우스웠다.

16583722760982.jpg

“내가 할 일 없는 사람처럼 보여요?”

16583722760976.jpg

“그건 아니지만…….”

16583722760982.jpg

“그러니까 줘 봐요. 이력서.”

승오는 손을 척 내밀고 재촉했다. 머뭇거리던 여자가 서류봉투에서 이력서를 꺼내 그에게 건네려 할 때였다.

16583722760997.jpg

“내가 먼저 보, 볼게요!”

이지수가 갑자기 이력서를 팩 낚아챘다.

16583722760976.jpg

“아얏!”

그 바람에 손이 베인 여자가 울상을 지었다. 승오는 급히 손가락을 살폈다.

16583722760982.jpg

“베었어요?”

16583722760976.jpg

“아녜요. 괜찮아요.”

여자는 황급히 손을 뒤로 숨기고 괜찮은 척했다. 승오는 얼굴을 찌푸리고 지수를 쳐다보았다.

16583722760982.jpg

“뭐 하는 거야?”

16583722760997.jpg

“입사하면 어, 어차피 내가 봐야 하잖아요. 나도 궁금해서 그래요.”

여자는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이지수에게서 이력서를 빼앗지 못했다. 안쓰럽게도.

16583722760997.jpg

“진짜 고졸이네요.”

16583722760976.jpg

“하지만, 디자인은 독학이나마, 공부했고…….”

곧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용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여자가 아까보다 더욱 안쓰러워졌다. 승오는 정색하고 지수에게 손을 뻗었다.

16583722760982.jpg

“이리 줘.”

16583722760997.jpg

“나, 나 아직 보고 있어요.”

16583722760982.jpg

“달라니까.”

16583722760997.jpg

“치이.”

지수가 입을 삐죽이면서 승오에게 이력서를 돌려주었다.

16583722760982.jpg

“조서하? 이름이 조서하예요?”

16583722760976.jpg

“네.”

‘서하’라는 이름은 승오에게 채워진 황금 족쇄였다. 옥순도 그걸 잘 알았다.

16583722779344.jpg

-‘여자가 잘나도 너무 잘났어. 불쌍한 우리 아들, 여자 잘못 만나서 기도 한 번 못 펴고.’

종종 승오를 붙잡고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던 옥순의 말은 아직도 종종 생각났다.

같은 ‘서하’인데, 이쪽 ‘조서하’는 ‘윤서하’와 너무나 달랐다.

이력서부터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학력은 고졸, 토익, 토플 점수 없음, 유학 및 관련직 종사 경험 전무. 이런 건 인사과에 직접 가져간다 하더라도 여자가 돌아서는 순간 파쇄기에 들어갈 게 뻔했다.

16583722760982.jpg

“디자인 한 번 봅시다.”

여자가 서류봉투를 통째로 내밀었다. 그 안에서 되는 대로 종이 한 장을 꺼내 본 승오의 표정이 약간 진지해졌다.

16583722760982.jpg

“괜찮은데?”

16583722760976.jpg

“정말요?”

불안해하던 여자가 승오의 말 한마디에 환하게 웃었다.

16583722760982.jpg

“강윤의 아이덴티티를 잘 해석한 느낌이네요. 진짜 독학으로 공부했어요?”

16583722760976.jpg

“네. 학비도 그렇고, 집에 돈 벌 사람이 저밖에 없어서요.”

16583722760982.jpg

“일은 계속 했어요? 이력서에는 없던데.”

16583722760976.jpg

“경리였어요. 최근에는 몸이 너무 안 좋아서 몇 년 쉬었고요. 그런데 강윤에서 디자이너를 구한다길래……. 저 너무 뻔뻔하죠?”

16583722760997.jpg

“그만 가요, 오빠. 우리 시간 너무 지체했어요.”

지수가 승오의 팔을 잡아끌었다. 승오는 여자에게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돌려주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16583722760982.jpg

“이력서는 우편으로 접수해요. 면접장에서 봅시다.”

걸어가면서 흘긋 뒤돌아보니 여자는 아직도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16583722760997.jpg

“오빠.”

지수가 승오를 톡톡 쳐서 주의를 끌었다.

16583722760997.jpg

“나, 기, 기분이 아, 안 좋아요.”

16583722760982.jpg

“왜? 뭐 때문에?”

16583722760997.jpg

“오빠가 다, 다른 여자를 너무 뚫어지게 쳐다봐서…….”

지수는 평소에 괜찮다가도 불안하거나 무서우면 말을 더듬곤 했다. 승오는 픽 웃으며 지수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16583722760982.jpg

“질투하는 거야?”

16583722760997.jpg

“지, 질투는 아니고요. 그, 그냥.”

금세 고개를 푹 숙여 버리는 지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사랑스러웠다. 고작 다른 여자랑 말 몇 마디 섞었다고 말을 더듬어 가며 질투하는 게 귀엽기도 했다.

16583722760982.jpg

“여보.”

귓가에 대고 다정하게 속삭이자 지수가 수줍게 웃었다.

16583722760982.jpg

“진심으로 사랑해. 아까 그 여자는 그냥 재밌어서 말 몇 마디 해 본 거야.”

16583722760997.jpg

“그, 그러면 이, 이력서는? 진짜 하, 합격시켜 주는 건 아니죠?”

16583722760982.jpg

“그건 생각 좀.”

승오는 대강 얼버무리면서 빠른 걸음으로 로비에 들어섰다. 어느 틈에 지수는 머릿속에서 반쯤 밀려나고, 길 한가운데에 혼자 멍하게 서 있던 여자가 그 자리를 채웠다.

16583722814007.jpg

 

***

[서류 전형 통과를 축하드립니다. 면접 일자는…….]

서하는 강윤에서 온 서류 합격 축하 메시지를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16583722760976.jpg

“이게 되네.”

물론 이승오가 늘 그 시간에 그 장소를 지난다는 걸 알고 기다린 건 맞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서류를 통과시키려 계획한 것도 맞다.

하지만 그 계획이 실패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학력도, 경력도 미달인 이력서를 대표 권한으로 통과시킨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이승오는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당당히 실행함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회사를 개판으로 운영하고 있는지 증명한 꼴이었다.

16583722760976.jpg

“그래. 회사에서 또 보자고.”

서하는 이승오의 한심함에 치를 떨면서 옷장 문을 열었다가 또 허탈해졌다.

면접에 입고 갈 옷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촌스러울 수 있나 싶을 만큼 촌스러웠다.

16583722760976.jpg

“꽃무늬 블라우스 뭐야? 이 티셔츠는 재질이 또 왜 이래?”

디자이너 면접이라고 하면, 다른 사무직과 달리 한껏 꾸미고 개성을 뽐내면서 가야 한다. 자신의 스타일도 실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서하는 한참이나 옷장을 뒤진 끝에 가장 구석에서 세탁소 비닐에 싸인 옷 한 벌을 찾아냈다. 산 지 십 년도 더 되어 보이는 그 정장은 조서하의 것이 아니었는지 사이즈조차 맞지 않았다.

하지만 원단만은 제법 고급이었다.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16583722760976.jpg

“할머니, 반짇고리 좀 빌릴게요.”

재봉틀이나 마네킹 같은 건 없다. 옥탑방에 왔을 때 딱 한 번 열어 본 할머니 방에서 빌려온 반짇고리와 옷걸이가 전부였다.

먼저 정장을 전부 분해했다. 패턴지도 없어 신문지에 패턴을 그리고 부엌 가위로 재단한 다음 손바느질로 한 땀 한 땀 조립했다.

다른 옷에서 가장 좋아 보이는 부자재를 떼어 붙이고 역시 할머니 방에서 가져온 오래된 다리미로 마무리했다.

그 작업에는 장장 일주일이 걸렸다. 제대로 된 옷만 있었다면, 아니. 하다못해 고물 재봉틀이라도 있었으면 하루 만에 완성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디자인을 그릴 수 있었을 텐데.

가난은 그런 거였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24시간조차 온전히 내게 주어지지 않는 것.

서하는 간신히 완성한 옷을 입고 면접장으로 향했다. 저마다 한껏 꾸민 공작새들 가운데서 정장 차림의 서하는 미운오리새끼처럼 초라했다.

16583722831837.jpg

“32번, 들어오세요.”

면접관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모여들었다. 모두 서하가 아는 얼굴들이었다.

차 상무도 있네. 저 사람은 디자인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데. 이지수는 팀장 자격으로 온 건가? 이승오는 됐고. 그런데 류경준은 여기 왜 있어?

비서가 디자이너 면접에 참여한다는 얘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 게다가 서하를 알아본 듯 눈썹이 가운데로 모여 있었다.

16583722760976.jpg

“안녕하세요. 32번 지원자, 조서하입니다.”

서하는 모른 척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맨 끝에 앉은 이지수가 굉장히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통에 이마에 구멍이라도 날 것 같았다.

16583722831845.jpg

“조서하 씨는 이력서가 특이하네요.”

경준이 서하의 이력서를 들어 보이면서 건조하게 말했다.

16583722831845.jpg

“학력도 기준 미달이고, 관련 경력도 전무. 도대체 어떻게 서류에 통과했는지 궁금할 정도입니다.”

이지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할 말이 매우 많은 눈치였다.

16583722760976.jpg

“제 디자인을 좋게 봐주신 게 아닐까요? 디자이너에게 있어서 중요한 건 학력이나 경력이 아니라 영감과 재능이니까요.”

16583722760997.jpg

“아하하하!”

갑자기 노골적인 웃음소리가 터졌다. 그 웃음의 주인공인 지수는 여러 사람의 시선을 한몸에 받자 조금 부끄러운 듯 헛기침을 했다.

16583722760997.jpg

“웃어서 미안해요. 영감과 재능이라는 말이 좀……. 조서하 씨가 입고 온 옷이랑 영 매치가 안 되어서요.”

이지수는 너무 길어 보이는 서하의 치마와 그 아래 보이는 낡은 운동화를 노골적으로 쳐다보았다.

16583722760976.jpg

“한 번 보여드려도 될까요?”

서하의 역질문에 이승오가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16583722760997.jpg

“뭘 보여준다는 거죠?”

16583722760976.jpg

“제가 입고 온 옷이요.”

서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종아리 아래까지 오는 긴 치마는 뒤가 깊이 트여 과감하고 단정한 컬러의 재킷에는 코르셋으로 포인트가 잡혀 있었다.

16583722760976.jpg

“형편이 좋지 않아 대학은 나오지 못했습니다. 면접에 입고 올 옷도 없었어요. 이건 아주 오래된 어머니의 옷으로 제가 직접 만든 겁니다. 단정하지만 과감한 포인트를 주어 흔하지 않은 정장을 완성했죠.”

화장기 없는 얼굴에서 자신감이 빛났다. 낡은 운동화조차 빈티지하게 연출한 믹스매치 룩으로 보였다.

16583722760976.jpg

“저를 뽑아 주세요. 학력 같은 건 디자이너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실 겁니다.”

 

***

경준은 조서하를 보자마자 볼펜을 떨어뜨릴 뻔했다. 병원에서 내내 알짱거리던 이상한 여자가 디자이너로 뽑아 달라며 나타났는데, 안 놀라면 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16583722831845.jpg

“도대체 이 여자는 뭡니까?”

그것도 이승오 대표가 직접 합격시키라고 지시한 이력서란다. 더욱 어이가 없어진 경준은 대표실 까지 찾아가 이승오를 닦달했다.

16583722831845.jpg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말라고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서류를 합격시킨 겁니까? 특별 지시까지 해 가면서!”

16583722760982.jpg

“실력을 봤습니다. 류 비서님도 면접에 오셨고, 포트폴리오 확인했으면 아실 텐데요.”

16583722831845.jpg

“…….”

어처구니없게도, 조서하는 제법 괜찮은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 좀 더 솔직히 말하자. 조서하의 디자인은 이번 공고에 올라온 그 어느 디자인보다도 훌륭했다.

16583722831845.jpg

“그 실력을 어디서 봤습니까? 이력서를 하나하나 본 것도 아닐 텐데.”

16583722760982.jpg

“그게…….”

우물쭈물하던 이승오는 찌르는 듯한 경준의 눈빛에 겨우 사실을 털어놓았다.

16583722760982.jpg

“회사 근처에서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이력서를 내러 간다기에 호기심이 생겨 보여달라고 했더니 보여주더군요.”

16583722831845.jpg

“하.”

몇 번이나 경고하고 쫓아냈는데도 강 대표 주변을 맴돌던 여자다. 경준은 이승오가 조서하를 만난 게 우연이 아니었다고 맹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왜일까. 단지 강윤에 입사할 기회를 노리기 위해서일까?

16583722760982.jpg

“별로 마음에 안 드시면 합격은 취소시키겠습니다. 아직 합격 공지가 나가지 않았으니까요.”

경준은 생각에 잠겼다.

수상한 여자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여자에게서 윤서하가 보였다. 그 자신감, 말투, 디자인까지.

16583722831845.jpg

“…… 입사시켜요.”

승오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16583722760982.jpg

“마음에 안 드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16583722831845.jpg

“대표님 말대로 디자인은 괜찮으니까. 일단 입사시키되, 삼 개월간은 인턴으로 합시다.”

무슨 목적으로 접근했든, 세 달이면 충분히 파악할 수 있겠지.

경준은 책상에 놓인 서하의 이력서를 차곡차곡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도대체 뭐 하는 여자인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볼 생각이었다.

16583722867778.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