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다시, 회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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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다시, 회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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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다시, 회사로
2022.06.01.
“취직했다고?”
너무 놀란 나머지 재욱의 손에서 비닐봉지가 툭 떨어졌다. ‘취직’이 저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싶었다.
“네. 임대인께 언제까지 신세 질 수 없는 노릇이니까요. 지금까지 먹은 식사비는 표준 물가 및 원재료, 시간당 임금과 기회비용 추산해서 한 끼에 8000원으로 계산해 드릴게요. 횟수는 제가 적어 뒀으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뭔 말 같잖은 소리야?”
재욱이 버럭 짜증을 내며 떨어진 비닐봉지를 주워들었다. 안에 든 것은 선홍빛이 선명한 돼지고기였다.
“단가 책정이 마음에 안 드시면 협상해서-.”
“아니, 집어치우라고. 돈 필요했으면 삼 년 치 월세나 내놓으라고 털었겠지.”
그는 싱크대 안에 돼지고기를 던져 놓고 김치를 숭덩숭덩 썰기 시작했다. 곧 조그만 부엌 안에 매콤한 김치찌개 냄새가 가득 찼다.
“잘했어.”
“네?”
재욱의 목소리는 탕탕거리는 도마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잘했다고!”
“잘하면 잘했지. 왜 소리를 지르세요?”
“못 들은 것 같으니까 크게 말한 거지!”
재욱이 툴툴거리면서 김치찌개를 냄비째 턱 내려놓았다. 싱싱한 오이와 당근도 쌈장과 함께 놓였다.
“할매가 좋아 죽겠어. 너 취직한 거 보면.”
“…….”
이건 조서하의 삶이다. 본의 아니게 몸을 빌려 쓰게 되었지만 과거까지 빌린 건 아니기에 서하는 그 이야기를 알고 싶지 않았다.
“김치찌개, 좀 싱겁네요. 좀 맵게는 안 돼요?”
“매운 거 잘 먹는 것도 좋아할 거고. 갑자기 똑똑해져서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것도 좋아할 거고. 그래서 회사는 어딘데? 거기서 무슨 일 해?”
“아직 인턴이요. 강윤컴퍼니라고, 옷 만드는 회사예요.”
부지런히 움직이던 재욱의 숟가락이 허공에 딱 멎었다.
“강윤? 너 지금 강윤이라고 했어? 옷 만드는 강윤?”
“네. 무슨 문제라도?”
재욱이 숟가락을 든 채 서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 많은 눈치였다. 그 모든 할 말을 억지로 누르고 있는 눈치기도 했다.
몇 번이나 떠올랐다 사그라든 기억과 의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미 사방이 어둑해진 초겨울 밤. 헝클어진 채 마구 흩날리던 머리카락. 공허하게 앞유리를 바라보던 눈동자. 그리고 손에 든 빨간 벽돌.
그날 밤, 조서하는 왜 벽돌을 들고 내 차 앞에 뛰어들었을까.
“나, 강윤이랑 뭐 있어요?”
이건 조서하의 과거이자 윤서하의 과거이기도 했다. 하지만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한 재욱은 대답 대신 멈췄던 숟가락만 다시 움직였다.
“있긴 뭐가 있어. 너 좋아하는 채소 쪼가리나 먹어.”
“뭐 있네. 좋은 쪽이에요? 안 좋은 쪽이죠?”
“모른다고. 내가 네 보호자야? 집주인이지.”
더 캐물어도 수확은 없을 것 같았다. 서하는 의문을 그대로 품은 채 손가락만 한 오이를 쌈장에 찍어 아삭아삭 먹었다. 숟가락에 비친 조서하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욱 낯설고 쓸쓸해 보였다.
***
“남색 월남치마. 끔찍하네.”
서하는 디자이너의 시각에서 끔찍하기 그지없는 옷을 깨끗하게 다려 입고 첫 출근길에 나섰다. 평생 타볼 생각도 안 해본 마을버스를 타고 나가 지하철로 갈아타야 하는 엄청난 여정이었다.
“타.”
그래서 재욱의 제안이 살짝 고마웠다.
“배달 안 가세요?”
“새벽에 다 돌고 왔어. 너 데려다주고 저녁에 다시 나갈 거야.”
“그러면 오늘 기준으로 기름값 및 시간당 임금 책정해서-.”
“그딴 것 좀 집어치우라고.”
“그럼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알겠습니다.”
“뭐? 그거 네이버 웹툰 제목 아냐?”
“호의 감사히 받겠다고요.”
“계집애가 머리 다치더니 어려운 말 쓰고 있어.”
재욱은 쉼 없이 투덜거리면서도 트럭 문을 열고 서하가 올라탈 수 있게 도와주었다. 지난번에 탔을 땐 담배 냄새가 심하게 났었는데 오늘은 좀 나았다.
“저기, 저 앞에 내려주시면 돼요.”
과일트럭이 교통체증을 뚫고 회사 앞에 도착했다. 트럭에서 톡 뛰어내린 서하는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깊이 숙여 보이곤 정문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이승오와 이지수가 보고 있었다.
“트럭 타고 출근하는 직원이 있네.”
대표실 의자에 앉아 바깥을 구경하며 노닥거리고 있던 참이었다. 지수는 무심결에 중얼거린 승오의 말에 고개를 쭉 빼고 아래를 보았다.
“……?”
너무 멀어서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
“이상한 옷 입었네요. 옛날 할머니 치마 같아.”
그러나 바람을 타고 국기처럼 펄럭거리는 남색 월남치마의 존재감은 이렇게 멀리서도 또렷했다.
“여보도 전에 저런 옷 입지 않았어?”
“그랬나? 헤헤.”
“엄마가 사주셨다고 했잖아. 저런 색은 아니고 좀 더 밝은……. 파란색이었나?”
“뭐 그런 걸 다 기억해요.”
지수는 승오의 무릎에서 폴짝 내려왔다.
물론 저런 옷을 입고 다니긴 했다. 학교에 있는 재봉틀로 가방을 만들어 들고 졸업작품 만들 원단값이 없어 동기들이 버린 자투리 원단을 모아 썼다.
지긋지긋한 가난이었다.
“나 갈게요. 출근 시간 됐어요.”
“오늘도 고생해.”
“응. 사랑해, 오빠.”
“나도.”
이승오는 그 가난의 늪에서 지수를 건져 주었다. 엄마가 한탄하듯 이야기하던 서하 공주님의 삶을 지수에게 선물하고 곰팡이 핀 옥탑방 대신 새하얀 대리석 바닥을 깐 고급 아파트에 살게 해 주었다.
-‘제일 무서운 건 말야. 윤서하가 이렇게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나 앉는 거야.’
언젠가 일어날지도 모를 그 일을 가장 두려워하는 건 사실 승오가 아니라 지수였다.
그럴 리 없어. 벌써 삼 년 동안 식물인간이었잖아.
지수는 희망적인 생각을 하며 대표실에서 나오다가 흠칫 멈춰 섰다. 문 바로 앞에 경준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던 것이다.
“뭐, 뭐예요?”
지수를 바라보는 경준의 눈에는 늘 그렇듯 노골적인 경멸이 담겨 있었다.
“아침부터 대표실에 잘도 들락거리네요. 이 팀장.”
“그, 그게 왜, 왜요?”
“갈수록 조심성을 잃는 것 같아서. 조심하라고 대표님께 말씀드려 놓겠습니다.”
“오, 오늘부터 새 직원들 출근해서, 그, 그것 때문에 일찍 올라간 거예요!”
“그게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고. 조심합시다.”
이 회사에서 경준에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서보다는 이사라는 직함으로 더 많이 불렸고 실무에서는 이승오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직원들 사이엔 ‘류 이사 없었으면 회사 망했다’라는 말이 우스갯소리처럼 나돌 정도였다.
“흥!”
아직도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지수는 콧방귀를 뀌고 디자인실로 내려갔다.
***
널찍한 디자인실은 온갖 원단과 부자재 등으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공기보다 많은 먼지 탓에 필터 달린 마스크가 박스로 구비되어 있지만 각자 작업에 매달리다 보면 그런 건 잊혀지기 일쑤였다.
내가 여기를 많이 그리워했구나.
서하는 수백, 수천 번이나 드나들었던 문 앞에 이방인처럼 서서 그곳을 바라보았다.
“아, 인턴?”
바쁘게 돌아다니던 직원 한 명이 서하를 발견하고 물었다. 아직 눈밑에 다크서클이 연한 걸로 보아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막내 직원인 듯싶었다.
“네. 오늘부터 출근하게 된 조서하…….”
“어어. 저기로 앉아.”
직원이 구석 자리를 손가락으로 대충 가리켰다.
서하는 매우 당황했다. 적어도 이 사무실 안에서는 서로 예의와 존중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얼마나 애써왔는데. 아무리 인턴이라도 이렇게 아랫사람 대하듯 한다고?
“왜 그렇게 멍청하게 있어? 방해되니까 가서 좀 앉아.”
또 다른 낯선 직원이 짜증을 냈다. 서하는 일단 자신에게 배정된 자리에 가서 앉았다.
뭐지, 이거? 강윤이 진짜 망해가고 있는 거야?
혼란 속에서 한 여자가 사무실에 등장했다. 동시에 서하와 다른 신입 두 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문을 향해 똑바로 서서 허리를 숙였다.
“나오셨어요, 이지수 팀장님!”
이제 어이가 없다 못해 어질어질하기까지 했다.
이 분위기 뭐지? 군대야, 뭐야? 쓰리스타라도 납셨어?
이지수가 사무실을 둘러보더니 곧 서하를 발견하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어머, 우리 신입 직원들이네. 반가워요.”
방긋방긋 미소 짓는 얼굴이 그렇게 선해 보일 수 없었다.
“다들 인사해. 이쪽은 황주희 씨, 여기는 정소연 씨. 그리고 조서하. 서하 씨는 인턴이니까 다들 좀 더 잘 가르쳐 줘. 알았지?”
그 카페에 앉아 독설을 퍼부은 지 삼 년이 지났다. 이지수에겐 케케묵은 그 날이 서하에겐 바로 엊그제와 같았다.
다스렸다고 생각한 분노가 깊은 곳에서 일렁였다. 서하는 그것을 티 내지 않으려 눈을 내리깔았다가 이지수의 발에 신겨진 구두를 발견했다.
서하의 구두였다. 한정으로 본인에게만 판매하는 저 구두를 사겠다고 퇴근하자마자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까지 날아갔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뭘 그렇게 봐?”
서하는 이지수의 물음에 시선을 들었다.
다시 뼈저리게 느껴졌다. 이승오가, 그리고 이지수가 윤서하의 모든 것을 빼앗고 망가뜨렸다는 사실이.
“구두가……. 예뻐서요.”
“이거?”
이지수가 아무렇지 않게 구두를 보곤 픽 웃었다.
“예쁘겠지. 파리 컬렉션에서 제일 핫했던 디자인이거든. 이거 구하느라 고생 좀 했어.”
그걸 구하느라 고생한 건 나야. 내 것을 훔쳐 신은 주제에 어쩜 저렇게 당당히 거짓말을 늘어놓지?
서하는 아무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그리고 이 사무실에서 밀고 나갈 조서하의 캐릭터를 확고하게 성립했다.
“네? 파리 컬렉션이요? 밀라노가 아니라?”
누가 와도 절대 이길 수 없는 무적의 캐릭터. ‘넌씨눈’이었다.
“밀라노라니. 무슨 소리야?”
“그거 2018 밀라노 컬렉션이잖아요. 패션위크에서 라스트로 나와서 한동안 떠들썩했는데, 기억 안 나세요?”
평범하고 착해 보이는 조서하의 외모가 처음으로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눈을 반짝이면서 순진하게 말해도 아무 위화감이 없잖아.
“조서하 씨, 인턴 주제에 아는 게 많나 보네. 하지만 이건 확실히 파리 컬렉션이야. 안 그래, 윤정 씨?”
“네. 2018 파리 컬렉션이에요.”
이 안에서 눈치가 제일 빠른 듯한 직원이 냉큼 대답했다. 서하는 흐으응, 하고 미묘한 콧소리를 냈다.
“밀라노 맞는데에……. 팀장님이 헷갈리신 것 같아요. 직접 가서 사셨어요?”
“그래. 내가 파리 가서 직접 샀어.”
“신발 바닥 한 번 보세요. 밑창 가운데에 그거 만든 장인 이름이랑 팀장님 이름 적혀 있을 거예요. 이탈리아어로요.”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이지수가 날카롭게 물었다. 기존 직원들은 물론, 서하와 함께 입사한 신입들까지 조용히 식은땀을 흘렸다.
서하는 제발 그만 하라고 뒤에서 눈치를 주는 것을 철저하게 모른 척하고 해맑게 대답했다.
“제가 틀렸을 수도 있잖아요. 인턴은 배우러 온 건데, 잘못 알고 있으면 팀장님이 가르쳐 주셔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