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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그녀의 목적 (20/45)


#20. 그녀의 목적
2022.06.08.


경준의 하루는 남들보다 조금 빠른 시각. 새벽 네 시에 시작되었다.

운동과 샤워부터 끝내고 현관문을 열면 매일 아침 배달되는 아침 식사와 각 신문사의 신문들이 쌓여 있다.

먹는 둥 마는 둥 샌드위치를 씹으면서 신문을 펼쳐 그 날의 주요 기사를 체크한다. 옷을 입고 머리를 만진 후 이승오를 데리러 가서 함께 출근한다.

그 출근길.

경준은 대표실 앞에서 여기 있으면 안 될 여자와 마주치고 인상을 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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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녕하세요. 대표님.”

조서하가 두 사람을 보자마자 꾸벅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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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무슨 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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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오라고 했습니다. 물건 받을 게 좀 있어서.”

이승오가 경준의 말을 끊고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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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와요. 회사는 어땠는지도 좀 듣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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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서하는 얼른 이승오를 따라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통창 밖으로 펼쳐진 도심도, 이 회사만큼이나 오래된 호두나무 책상도, 천장부터 바닥까지 책이 가득한 책장도.

다른 것도 있었다. 예를 들면 책상 위에 놓인 명패라든가.

[강윤컴퍼니 대표 이승오]

그 명패는 우리 엄마 거야. 너 따위가 가질 수 없어.

기껏 잘 다려 온 손수건이 서하의 손 안에서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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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은 먹었어요?”

이승오가 소파에 걸터앉으며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서하는 얼른 눈빛에서 증오를 지우고 소파 끄트머리에 조심조심 엉덩이를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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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누룽지 먹고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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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맛있었겠네.”

흥미롭다는 듯, 재미있다는 듯 웃는 표정이 이지수를 처음 만난 그날과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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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도 누룽지 좋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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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소화도 잘되고, 구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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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

서하는 신기하다는 양 조그맣게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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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누룽지 좋아하는 사람 처음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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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냥……. 그런 거 안 드실 줄 알았어요. 대표님은. 사실 어제 어묵 드신다고 해서 그것도 좀 놀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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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소박한 거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인데.”

이승오가 뒤로 기대어 앉았던 몸을 앞으로 약간 당겼다. 그만큼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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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룽지, 다음에 한 번 먹을 수 있어요?”

저 표정 좀 봐. 대가리 뚜껑 톡 따다가 해물 누룽지탕을 해버릴라.

서하는 욕설을 당황한 표정 뒤에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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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좀…….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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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주기는 아까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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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니라요. 대표님은 결혼하셨다고 들어서……. 드리는 건 어렵지 않은데, 그러면 사모님께서 기분 나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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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결혼.”

이승오가 아무렇지 않게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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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상관 안 해도 돼요. 결혼했긴 한데, 아내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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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멀리 가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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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원해 있거든요. 몇 년째.”

네가 그랬잖아.

이승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갓 내려진 원두커피 두 잔을 따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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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그렇게 애틋한 사이도 아니었고. 내 아내는 뭐랄까……. 비너스 조각 같았거든요. 인간미라고는 없고, 남편 기 하나 살려줄 줄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들을수록 없는 정이 나락까지 뚫고 떨어졌다.

먹여 주고 재워 주고, 대학에 유학까지 보내 준 사람이 누군데. 내가 그 사람 딸인데. 은혜도 모르는 더러운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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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사랑해서 결혼한 거 아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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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이승오가 말도 안 된다는 양손을 휘휘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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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를 사랑할 남자는 세상에 없어요. 예쁘고 돈도 많으니까 처음에야 우와, 하겠지. 고상 떠는 거 세 번만 보면 부담스러워서라도 야반도주할걸.”

서하는 잠시, 저 책상 위에 있는 명패 모서리로 이승오의 정수리를 찍어 버리는 상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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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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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잖아요. 난 소박한 거 좋아한다고.”

볼 때마다 가슴이 뛰었던 이승오의 미소가 지금은 뱀처럼 징그러웠다. 이런 식으로 비교하는 것조차 뱀에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서하는 내내 쥐고 있던 손수건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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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만 가 볼게요. 곧 업무 시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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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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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이 늦으면 안 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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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이승오가 손수건을 집어 냄새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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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 좋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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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빌려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오늘은 이 정도가 딱 좋다. 제가 치어 죽이려고 한 아내의 뒷담화를 자리에 앉아 계속 듣는 것도 곤욕스럽고. 뒷담화 듣는 사람이 바로 그 아내라면, 그런데도 명패로 정수리를 찍어 버릴 수 없다면 더욱 그렇고.

서하는 문을 빼꼼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곤 분노와 역겨움으로 어질어질해진 머리를 식히기 위해 차가운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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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보네요. 조서하 인턴.”

이승오 못지않게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목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들려왔다.

류경준. 빌어먹을 스파이.

천천히 눈을 떠 보니 과연 경준이 대놓고 탐탁잖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지금 매우 찜찜한 기분이었다. 저 수상한 인턴이 대표실까지 올라온 것도 모자라서 이렇게 한참이나 있다가 나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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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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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이 아침부터 대표실에는 어쩐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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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오 대표님께 드릴 게 있어서……. 어제 와도 된다고 하셨어요. 말해 놓으신다고 하셨……. 는데…….”

말해 놓는다고?

기억을 더듬어 보니 생각났다. 어제, 이승오가 내일 아침에 대표실에 누군가 올라오면 그냥 들여보내 달라고 말한 것.

그게 이지수인 줄 알았는데. 조서하를 말한 거였나.

경준은 불쾌감을 그대로 드러내며 조서하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낡은 운동화와 정체 모를 패션을 장착한 촌스러운 여자였다. 하지만 저 순박한 외모 뒤에 얼마나 시커먼 속셈이 숨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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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완이 대단한데. 조서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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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조서하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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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자격 미달인데도 고작 말 몇 마디 섞고 나서 입사. 입사한 지 하루 만에 대표실 출입. 다음 단계는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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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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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맞춰볼까?”

경준이 허리를 약간 숙였다. 나직한 목소리가 서하의 귀에서 한 뼘 정도 거리를 두고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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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을 가장하고 몇 번 더 마주치겠지.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술도 한 잔 마시고. 어느 날 자고 일어나면 이승오의 두 번째 첩이 되어서 외제차 타고 출근할 거야.”

다시 자세를 바로잡은 경준이 싱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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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입니다.”

서하가 대충 그린 그림이긴 했다. 이승오와 잔다는 끔찍한 방법까진 안 쓸 거지만. 내 몸이어도 안 할 짓을 잠깐 빌린 남의 몸으로 한다는 건 너무 양심 말아먹은 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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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이 풍부하시네요, 류 비서님. 그런데 제법 괜찮은 시나리오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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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하는 ‘윤서하’일 때보다 좀 더 위에 있는 그의 얼굴을 향해 오른손을 까딱거렸다. 그 손짓에 끌려오듯, 경준이 다시 허리를 숙여 그녀의 입가에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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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수 디자인, X나 구리잖아.”

경준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서하는 좀 더 낮은 목소리로 또렷하게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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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수가 메인 디자이너로 앉아 있는 한, 강윤은 망해.”

고개를 든 경준은 헛것이라도 본 표정으로 서하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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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서하가 입꼬리만 살짝 올려 미소지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 얼굴 위로 윤서하가 겹쳐졌다가 금방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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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당히 당당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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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류 비서님이 원하시는 답이니까요. 제가 뭐라고 말하든 안 믿으실 거잖아요.”

조서하가 옆으로 걸어 벽과 경준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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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경준은 조서하의 뒷모습이 엘리베이터 홀로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정말 이상하고 수상한 여자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

갓 상반기 시즌이 끝난 디자인실은 전쟁터였다. 두꺼운 겨울 원단이 털갈이하는 고양이처럼 먼지를 내뿜고 디자이너들은 무표정으로 회의와 작업을 반복했다. 신입 디자이너들도 지시받은 잡일들을 해내느라 바빴다.

그 바쁜 와중에 덩그러니 책상에 앉은 서하만 다른 세계 사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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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연 님, 많이 바빠요? 내가 할 건 없어요?”

서하는 함께 입사한 정소연 디자이너에게 살짝 말을 걸었다. 동그란 이마에 착해 보이는 눈을 가진 소연은 고개를 들더니 기쁜 듯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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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걸린 옷, 다림질 좀 해줄래요? 정은 님이 부탁하셨는데 저는 여기 단추도 달아야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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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지금 뭐 해?”

이지수가 다가와 물었다. 움찔한 소연이 놀란 토끼눈을 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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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 님 손이 비어서요. 다림질 좀 부탁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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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림질은 아까 서정은 씨가 시킨 거 아닌가?”

이지수는 방긋 웃으며 서하에게서 다림질감을 빼앗아 소연의 책상 옆에 던졌다. 지은 죄 없이 욕먹은 소연의 어깨가 더욱 작아졌다.

이토록 뻔하고 유치하게 사람을 따돌리다니. 서하가 디자인실을 이끌던 시절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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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저는 뭐 할까요?”

서하는 순진한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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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 씨는 앉아 있어. 딱히 할 거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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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시키실 일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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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다시피 많이 바빠서. 서하 씨가 괜히 손댔다가 사고라도 치면 일이 더 많아지잖아. 안 그래? 나도 마음이 편치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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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감사합니다!”

서하는 꾸벅 인사하고 자리에 앉아 디자인북을 펼쳤다. 깎아 둔 연필과 색연필도 가지런히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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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해, 서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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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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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 씨 인턴 아니야?”

지난번부터 느낀 건데. 이지수는 자기보다 약한 사람 앞에서는 절대 말을 더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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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은 원래 디자인을 못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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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은 디자이너가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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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도 디자인을 인정받아서 들어온 건데요.”

어디까지나 정말 몰라서 묻는다는 태도였다. 이지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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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해 봐, 그럼. 서하 씨는 참 열정이 넘쳐서 좋단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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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 감사합니다, 헤헤.”

서하도 방실방실 웃어 보이곤 연필을 들었다.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 혼자 앉아 수백 장, 수천 장의 스케치를 그리고 또 버렸다. 꿈을 꿔도 디자인하는 꿈을 꾸고, 그 꿈이 완전히 깨기 전에 벌떡 일어나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스케치를 휘갈긴 후 쓰러져 다시 자곤 했다.

그 모든 스케치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들이 아직 이 사무실에 있었다. 지금 이지수가 차지한 서하의 책상 아래, 아무도 비밀번호를 모르는 조그만 금고 속에.

어떻게 생겼더라.

서하는 금고 속에 넣었던 마지막 스케치를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손을 움직였다. 윤서하의 이름을 건 브랜드를 위해 그려냈던 마지막 디자인이 종이 위에 서서히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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