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찢어진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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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찢어진 페이지
2022.06.11.
[오늘 시원한 조개찜이 당기네. 퇴근하고 승오랑 같이 와라.]
안 그래도 꿀꿀한 오후. 지수는 옥순의 메시지를 받고 잔뜩 인상을 썼다.
백번 양보해서, 퇴근하자마자 가서 앞치마를 두르고 조개찜을 만들어야 하는 것까진 괜찮다. 문제는 지수가 조개를 전혀 못 먹는다는 점이었다.
“무슨 조개찜이야.”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마침 지나가던 정은이 듣고 되물었다.
“조개찜이요?”
“응? 아아.”
지수는 휴대폰을 엎어 놓고 방긋 웃었다.
“시어머니셔. 오늘 맛있는 조개찜 해주신다고 오라시네.”
“우와. 진짜 자상하시네요.”
“내가 시댁 복 하나는 타고났지.”
“그러게요. 엄청 부러워요.”
뻔히 살아 있는 윤 팀장님을 두고 첩이 본처 행세를 한다며 길길이 날뛰던 팀원들은 진작에 물갈이되었다.
지금 있는 사람들은 이승오의 전 부인이 식물인간이라는 걸 모르거나 알아도 모르는 척했다. 둘 중 뭐든 지수에게는 상관없었다.
남의 집을 청소하는 대신 청소해 주는 아주머니를 쓴다. 다 허영 덩어리라며 애써 무시하던 명품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휘감는다.
사무실에 들어가면 모두가 벌떡 일어나 인사한다. 윤서하가 악의적으로 떨어뜨렸던 디자인을 모두 인정하고 극찬한다.
‘완벽한 삶이야. 조개찜 정도, 뭐 만들면 어때? 어차피 집에 가면 저녁밥 차려야 하는데.’
그날 저녁.
지수는 양손 가득 재료를 사들곤 낑낑대며 초인종을 눌렀다.
철컥.
거대한 철문이 열렸다.
지수에겐 이 집이 신데렐라의 궁전이었다. 잘 관리된 잔디 사이로 이어진 돌길. 잉어 몇 마리가 헤엄치는 조그만 연못과 소나무. 날씨 좋은 오후에 차 한 잔 마실 수 있는 테이블과 파라솔.
궁전에 가고 싶어서, 엄마를 만난다는 핑계로 몇 번이나 찾아왔는지 모른다.
그러다 얻어 입은 ‘그 집 공주님’의 옷은 생각보다 소박했다. 자수 부분은 조금 찢어져 있고 보드라운 향기가 났다.
이 옷 주인은 얼마나 예쁠까. 동화 속 공주님 같은 사람이니까, 분명 천사처럼 착하겠지. 디자이너라니 정말 멋있어. 어쩌면 친해질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옷 주인과 그녀의 남편을 처음 보는 순간, 지수의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부모 잘 만나서 호강하는 주제에 고상한 척하긴? 내가 저 남자랑 결혼했으면 백 배는 더 잘해 줄 수 있는데.
지금 그 원피스는 갈기갈기 찢어진 채 드레스룸에 걸려 있다. 찢어 놓고 버리지 않은 이유는, 그 꼴을 볼 때마다 기분도 찢어지게 좋기 때문이었다.
“저 왔어요.”
“어, 지수 왔니? 네 엄마 부엌에 있으니까 얼른 가 봐라.”
옥순이 내다보지도 않고 커다랗게 말했다. 그 목소리 밑에 텔레비전 소리가 섞여서 들려왔다.
“네? 저희 엄마가 왔어요?”
“다 같이 먹으면 좋잖니.”
지수는 서둘러 부엌으로 갔다. 평생 남의 집에서 일만 해 온 엄마가 여전히 앞치마를 두르고 분주하게 육수를 끓이고 있었다.
“엄마!”
빽 소리치자 난주가 소스라치며 돌아보았다.
“깜짝이야. 너는 왜 갑자기 소리를 질러?”
“여기서 뭐 해?”
“뭐 하긴. 조개 사 왔어? 해감하게 이리 주고, 너는 앉아서 좀 쉬어. 이 서방은 늦니?”
“곧 올 거야. 내가 할 테니까 엄마나 좀 쉬어.”
“아유, 다 했어. 조개 씻어 넣기만 하면 돼.”
“그 조개 씻는 거 내가 한다니까!”
“그럼 넌 옆에서 부추 좀 씻어서 다듬어.”
지수는 조개를 소금물에 담그고 바락바락 씻어내는 난주 옆에서 찬물로 부추를 다듬었다.
“다음부터 엄마는 오지 마. 그냥 집에서 혼자 밥 먹어.”
“그래도 엄마가 와야 네가 일이 좀 쉽지.”
요리, 청소, 빨래. 정원 잡초 뽑기까지.
난주는 이제 이 집의 가사도우미가 아닌데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와서 이 모든 일을 했다.
난주 말대로, 모두 옥순이 지수에게 시키곤 하는 일들이었다.
“…… 조금만 참아, 엄마.”
윤서하만 죽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 윤서하가 가진 지분과 재산은 전부 승오에게 상속되고, 정식으로 혼인신고하고 나면 엄마도 지수가 버림받을까 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
지수는 앞치마를 두르고 열심히 조개찜을 만들었다. 하지만 막상 저녁상이 차려진 후에는 밥과 김치로 배를 채웠다.
연애할 때도 바지락 넣은 순두부찌개를 끓이고 나면 김에 밥을 싸 먹어야 했는데. 지금도 그리 달라진 게 없었다.
***
“아, 잘 먹었다. 안 그래도 조개 먹고 싶었는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운전하는 승오에게 지수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 저기, 오빠.”
“왜?”
“우리, 겨, 결혼식부터 하면 안 돼요?”
“또, 또.”
잠시 신호가 걸린 사이 승오가 지수를 돌아보면서 장난스럽게 눈을 찌푸려 보였다.
“혼인 신고할 때 다 해준다고 했잖아. 오빠 못 믿어?”
“미, 믿긴 하는데……. 그치만 회사 사람들 보기에도 그렇고.”
“윤서하 관뚜껑도 안 닫혔는데 결혼식부터 하는 게 보기 더 그래. 그건 그렇고, 새로 들어온 애들은 어때?”
“좋아요. 하, 한 명 빼고.”
“한 명?”
“있잖아요. 고졸 인턴.”
“조서하? 왜?”
“눈치가 너무너무 없어요. 할 말 못 할 말 구분을 모, 못 해요.”
“흐음.”
“진짜로요. 가끔 보면 너무 또, 똑똑해서 눈치 없는 척 하고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것 같다니까요?”
“아아.”
“어, 어디 손만 대면 엉망이 돼서 가만히 있으라고 했더니, 아, 알았다고 디자인 그리고 있는 거 있죠. 인턴이.”
“디자인을 했어?”
기계적인 반응만 보이던 승오는 디자인이라는 말에 흥미를 보였다.
“네. 다, 다른 선배 디자이너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럼 가져와 봐.”
지수는 말을 멈추고 승오를 쳐다보았다.
“네?”
“벌써 디자인을 했다며. 내일 받아서 가져와 봐.”
“가져와 봤자 별거 없을 텐데…….”
“디자인 하나 보고 입사시킨 애야. 내일 받아서 바로 대표실로 올라와.”
괜히 말했네.
지수는 입을 다물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배고파서 말할 힘도 없었다.
***
“안녕하세요!”
서하가 활기차게 인사하면서 디자인실로 들어섰다. 썩 좋은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
“어, 응.”
뭐, 별로 상관은 없었다.
서하는 자리에 앉자마자 디자인북부터 폈다. 오늘도 느긋하게 디자인이나 하다 갈 생각이었다.
“조서하 인턴!”
꼬박꼬박 인턴이라고 잘도 부르는 이지수가 자기 자리에서 손짓했다.
“네.”
“디자인 가져와 봐요.”
각자 바쁘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고개를 들고 서하를 쳐다보았다. 서하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디자인이요?”
“어제 하루종일 그렸잖아요. 결과물 봐줄 테니 가져오라고요.”
예감이 안 좋았다.
“잠시만요.”
서하는 재빨리 디자인북에서 몇 장을 찢어내 감추고 나머지만 지수에게 가져갔다.
“흐응.”
그것을 보는 둥 마는 둥 들춰 본 이지수가 턱짓으로 서하의 책상을 가리켰다.
“가서 앉아 있어요. 좀 보고 나서 줄 테니까.”
굉장히 예감이 안 좋았다.
잠시 후, 이지수가 디자인북을 들고 일어섰다. 서하는 자신에게 신경 쓰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후 슬쩍 뒤를 따라갔다.
-띠링.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이지수가 올라탔다. 서하는 엘리베이터가 대표실이 있는 꼭대기 층에 멈춘 것까지만 확인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한편, 엘리베이터에 탄 지수는 손이 바빴다.
“어디 보자. 이건 안 되겠어. 이것도. 이건 별로네.”
조서하의 디자인북에서 좋다 싶은 부분은 죄다 뜯어내서 다른 서류철에 감춰야 했기 때문이다.
재빠르게 작업을 마친 지수는 빼돌린 파일을 화분 뒤에 살짝 감추고 태연하게 대표실로 들어섰다.
“조서하 디자인 가져왔어요.”
“이리 줘.”
승오는 얼른 디자인북을 받아 펼쳤다.
하지만 결과물은 실망스러웠다. 기본기나 센스가 제법 괜찮았지만 딱 이거다 싶은 건 보이지 않았다. 포트폴리오로 가져왔던 디자인보다 못해 보이기도 했다.
“별로 신통한 건 없죠?”
지수가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배운 게 없잖아요. 내가 잘 가르쳐 보겠지만……. 워낙 일을 못 해서 어려울 것 같긴 해요. 고작 삼 개월이다 보니 다른 디자이너들도 별로 신경을 안 써주고요.”
“그러네. 딱 눈에 띄는 건 없어. 포트폴리오보다 못한 것 같기도 하고.”
이승오의 얼굴에 실망한 빛이 역력했다. 지수는 속으로 크게 안도했다.
“별거 없다고 했잖아요. 디자이너는 많으니까 걱정 마요.”
그러곤 디자인북을 다시 가져오려는 순간.
-똑똑.
밖에서 누군가 노크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대표님?”
류경준이었다.
“들어오세요.”
승오가 대답하자 경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떻게 된 건지, 손에 지수가 감춰 둔 파일을 들고서.
“말씀 도중 죄송합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이걸 발견했는데.”
지수를 지나쳐 걸어온 경준이 책상 위에 파일을 내려놓았다.
“이지수 디자이너가 떨어뜨린 것 같아서요.”
지수는 있는 힘껏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이거요? 제, 제 거 아닌데.”
“그럴 리가요. 방금 화분 뒤에 떨어뜨리고 가는 걸 제가 보고 주워 온 건데.”
저 불여우 같은 인간. 그걸 보고 있었단 말야?
지수는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 그거였구나. 이리 줘요, 오빠. 별거 아닌데 들고 다니기 번거로워서 잠시 놔둔 거예요.”
“잠깐만.”
파일을 향해 뻗은 지수의 손을 피해서 승오가 내용물을 꺼냈다.
전부 스케치였다. 누군가의 디자인북에서 찢어낸…….
“…….”
승오는 굳은 표정으로 방금 덮은 조서하의 디자인북을 펼쳤다. 종이도, 그림체도, 스타일도, 실수로 크게 찢어진 부분까지 완벽하게 일치했다.
“여보. 아니, 이 팀장. 조서하 디자인이 왜 여기 따로 들어 있지?”
“내 선에서 먼저 고, 골라낸 거, 거예요. 오, 오빠가 너무 바쁘니까, 하나하나 볼 시간이…….”
“잠시, 실례.”
경준의 손이 쑥 들어와 목표물을 낚아챘다.
“뭐 하시는 거예요?”
“구경 좀 하겠습니다. 대표님, 괜찮겠습니까?”
승오가 고개를 끄덕이는 통에 지수는 더 항의할 명분이 사라졌다.
경준은 찢어진 부분을 끼워 넣어 가며 신중하게 디자인북을 넘겼다.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찢어진 건 남아 있는 것보다 훨씬 괜찮은 디자인이었다.
“그런데.”
경준의 손가락이 찢어진 페이지를 만졌다.
“없는 부분이 더 있네요.”
“자, 잘못 그려서 찢어냈겠죠. 아니면 마,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든가.”
“조서하 씨가 지원하면서 낸 포트폴리오는 이것보다 훨씬 나았는데. 마음에 안 들어서 찢었다면 지금 남아 있는 걸 찢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내, 내가 그걸 어, 어떻게 알아요?”
경준이 디자인북을 탁 덮었다.
“이건 제가 가져가서 자세히 보겠습니다.”
“비서님이 무, 무슨 권한으로요?”
“사내이사 권한으로.”
그는 손에 디자인북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직접 디자인실에 가서 사라진 나머지 부분을 찾아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