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금고 속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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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금고 속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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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금고 속 디자인
2022.06.15.
“서하 님.”
자리에 돌아와 앉은 서하에게 황주희가 불안한 표정으로 살그머니 말을 걸었다.
“방금 팀장님이 서하 님 디자인북 가져가지 않았어요? 무슨 일일까요?”
이 디자인실에서 서하에게 인간적인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황주희뿐이었다. 함께 입사했으니 동질감이라도 느끼는 걸까.
“글쎄요. 별일 아니겠죠?”
“그랬으면 좋겠네요.”
서하는 디자인북 대신 A4용지 몇 장을 가져다 그 위에 스케치를 시작했다. 그걸 또 흘긋 본 주희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속닥속닥 탄성을 터뜨렸다.
“와아. 서하 님, 독학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독학은 무슨. 초중고등학교 내내 미술과 디자인을 배우고 이 바닥에서 최고라는 대학교에 진학해 유학까지 다녀왔다.
“그냥……. 열심히 공부했어요.”
서하는 양심에 찔려서 어색한 웃음만 지어 보였다. 빨리 황주희가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주길 바랄 뿐이었다.
“서하 님은 재능이 있어요. 나도 그냥 신입이지만…….”
“안녕하세요. 류 이사님!”
서하의 마음도 모르고 열심히 속닥거리던 주희의 말이 누군가의 인사에 막혀 끊어졌다.
류 이사? 류 스파이?
서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재수 없게도, 완벽한 타이밍에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인사를 해야 해. 말아야 해.
고민하는 동안 류경준이 성큼성큼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책 같은 것을 탁 내려놓았다.
서하의 디자인북이었다.
“이것도.”
경준이 디자인북 위에 파일철을 놓았다. 서하는 그 안에서 뜯어진 스케치를 발견하고 경준을 쳐다보았다.
“이걸 왜 류 비서님이 가져오세요?”
“잠깐 일어나 봐요.”
예전 같았으면 콧방귀만 뀌고 말았을 텐데. 서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이쪽에 시선을 집중하는 팀원들을 흘끔 둘러보곤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순순히 비켜준 것을 금세 후회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경준이 얼마 있지도 않은 서하의 짐을 마구 뒤지기 시작한 것이다.
“찾을 게 있어서.”
“그러면 저한테 찾아달라고 하셔야지. 이건 너무 무례한 거 아닌가요?”
“…….”
경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하가 한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한 듯, 그의 시선은 방금 책 사이에서 후두둑 떨어진 스케치 몇 장에 고정되어 있었다.
“조서하 씨.”
한참 만에야 스케치를 집어 든 경준이 싸늘하게 말했다.
“따라오세요.”
그러곤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성큼성큼 나가 버렸다.
“무, 무슨 일이에요, 서하 님?”
주희가 멍해진 서하를 잡고 불안하게 물었다. 그 질문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질문이 날아들었다.
“인턴, 사고 쳤어?”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사고를 쳐!”
“류 이사님 저런 표정 처음 봤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도 몰라. 모른다고. 저 인간이 왜 저러는지 내가 알 게 뭐야.
서하는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저도 아는 게 없어요. 일단 부르시니까 다녀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당황스럽기로 따지면 서하보다 더 당황스러운 사람이 있을까.
저 스파이가 이지수 통해서 디자인북을 넘겨받은 건 알겠다. 그런데 왜 넘겨받았으며, 페이지는 왜 찢어져 있으며,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나머지 페이지를 직접 찾은 거지?
서하는 얼굴 근육을 꾹꾹 눌러 표정을 가다듬고 경준을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경준의 사무실이었다. 스파이 주제에 사무실도 있고. 출세한 스파이놈이었다.
탁.
경준이 문을 닫고 자리에 앉았다.
“당신, 뭐지?”
강렬한, 한편으론 어딘지 모르게 흔들리는 시선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이 남자가 조서하의 껍데기 속에 숨은 윤서하를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비서님이 무슨 의도로 물으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이거. 뭐냐고.”
경준이 책상 위에 스케치 서너 장을 아무렇게나 펼쳤다. 모두 서하가 그렸다가 빼돌린 디자인이었다.
“제 디자인이에요. 아시다시피.”
“거짓말 마!”
경준이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이건 당신 디자인이 아니야. 어디서 본 거지?”
평정을 유지하던 서하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조서하고 윤서하고 간에, 디자이너로서의 자존심에 대단한 스크래치가 난 탓이었다.
“제가 어디서 베껴 왔다는 말투시네요.”
“그렇지 않고서야-!”
“하.”
서하는 무심결에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어디서 비슷한 모양을 봤나 본데, 사람의 뇌는 항상 오류를 범하죠. 지금 생각하시는 디자인이 뭔진 모르겠지만 막상 가져다 비교하면 절대 똑같지 않을걸요?”
경준은 또 말이 없었다. 그런데 왜 저렇게 복잡한 눈빛으로 서하를 쳐다보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제가 남의 디자인을 훔쳤다고 확신하는 표정이신데.”
서하가 한 손을 스케치 위에 탕, 하고 대차게 얹었다. 묵묵히 서하를 쳐다보던 경준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뭐 하는 겁니까?”
“걸어요. 그 디자인 갖다 놓고, 제가 베꼈으면 책상 정리할게요.”
“안 베꼈으면? 내가 퇴사하나?”
“정식 디자이너로 채용해주세요.”
갓 입사한 인턴 주제에 너무나 배짱 넘치는 제안이었다. 경준은 서하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픽 웃었다.
“내가 그 디자인을 가져올 순 없습니다. 다른 디자이너의 것이라.”
“확실하지도 않은 기억으로 저를 모욕하셨다는 뜻이네요.”
“이렇게 하죠.”
경준은 서하의 손 밑에서 스케치 세 장을 빼서 탁탁 정리하곤 제 책상 한편에 놓았다.
“이건 내가 갖고 있겠습니다. 이 아이덴티티로 디자인 열 장 더 가져오세요. 진짜 조서하 씨 디자인이라면 무리한 일은 아닐 겁니다.”
조서하의 입술이 적당한 호선을 그렸다. 비즈니스적으로 볼 때 흠잡을 데 없는 호감형 미소였다.
“좋아요. 류 비서님.”
스케치를 누르고 있던 손을 들어 내밀자 경준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 손을 마주 잡았다. 평생 키보드 두드리고 펜만 잡았을 것 같은데, 의외로 단단하고 까칠하게 굳은살이 밴 손이었다.
“한 달 주세요. 이 라인으로 컬렉션 만들 정도로 그려 오겠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허공에서 맞잡았던 두 손이 쿨하게 풀어졌다. 서하가 머리만 살짝 숙여 인사하곤 돌아서 문손잡이를 잡았을 때였다.
“아참, 조서하 씨.”
경준이 무언가 생각난 듯 서하를 불러세웠다.
“네?”
“윤서하라고. 혹시 압니까?”
“…….”
서하의 얼굴이 아주 잠깐 굳었다가 금세 본래대로 돌아왔다.
“네. 알아요.”
이번에는 경준의 얼굴이 굳었다. 서하는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리 인턴이지만 윤서하 디자이너는 알죠. 당연한 거 아닌가요?”
“…… 그렇군.”
경준은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이만 나가 보라는 뜻이었다.
서하가 다시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 나갔다. 그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던 경준은 문이 닫히자마자 조서하의 스케치 세 장을 책상에 반듯하게 늘어놓았다.
“…… 절대 아니야.”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기억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윤서하가 대표실 앞에서 떨어뜨린 디자인북에 있던 스케치가 분명했다.
그때 받았던 충격이 아직도 선명하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완벽한 윤서하가 재능과 실력까지 가졌다는 사실에 자신이 품었던 질투까지 기억한다.
그 스케치는 지금 디자인실의 금고 속에 들어 있다. 이지수가 비밀번호를 알아내기 위해 해선의 병실에 수없이 드나들었던, 윤서하의 금고.
“조서하. 대체 뭐지?”
경준은 난데없이 인턴의 손에서 살아난 그 디자인을 눈앞에 놓고 중얼거렸다.
***
“조서하 인턴. 회의실로 와요.”
오늘은 너무나 힘든 날이다. 서하는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자신을 맞는 이지수의 목소리에 한숨을 쉬면서 회의실로 들어갔다.
“류 이사가 불러서 나갔다면서?”
“네.”
“무슨 얘기 했어요?”
말해 줄까, 말까. 서하는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디자인 얘기했어요.”
“디자인?”
이지수가 의심스럽다는 듯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류 이사가 고작 인턴한테 디자인 얘기를 했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팀장님도 고작 인턴이 한 디자인을 찢어서 빼돌리셨잖아요.”
표정을 보니 맞나 보다. 디자인 중에서도 괜찮은 것만 찢어져 있었다면, 그건 가져간 이지수 짓이겠지.
“조서하 인턴. 지금 아주 건방진 거 알아?”
“물으시길래 대답한 것뿐인데. 건방지게 느껴졌다면 죄송합니다.”
죄송함이라곤 모기 빨대만큼도 들어 있지 않은 말투였다.
“조, 조서하 인턴!”
이지수가 언성을 높였다. 서하는 조금 놀란 눈으로 이지수를 쳐다보았다.
언성을 높이는 바람에 놀란 건 물론 아니다. 약자 앞에서는 잘만 말하는 이지수가 갑자기 말을 더듬어서였다.
“뭐, 뭘 그렇게 봐요?”
“…… 아니에요.”
“기가 막혀서.”
이지수가 혼잣말을 하곤 후우, 숨을 가다듬었다.
“그래서. 디자인에 대해 류 이사랑 무슨 얘기 했는데요?”
“제 디자인이 인상 깊으셨나 봐요. 같은 라인으로 열 장 더 가져오라고 하셨어요.”
서하는 이지수의 얼굴이 숨길 수 없이 일그러지는 걸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자신이 이 정도에 즐거워할 만큼 유치할 줄은 몰랐는데, 유치한 인간을 상대하다 보면 본인도 유치해지는 모양이었다.
“류, 류 이사가, 디자인을 가, 가져오라고 했다고요? 인턴한테?”
저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돌아다니는지 빤했다.
사람 보는 눈 다 똑같다. 이지수가 찢어낸 페이지는 디자인북에서도 가장 괜찮은 것들이었다. 류경준이 지시까지 한 디자인이 직접 위에 올라갔을 때, 자신의 디자인과 얼마나 비교될지 걱정하는 거겠지.
그것도 고작 인턴의 디자인이.
“그래서 뭐, 뭐라고 대답했어요?”
“그러겠다고 했어요. 한 달 내에 만족하실 디자인으로, 열 장 가져오겠다고.”
“한 달.”
한 달 안에 쫓아내려고 애쓰겠네.
서하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애써 봐. 뭣하면 이승오처럼 트럭이라도 고용해 보든가.
“이야기 끝나셨으면 나가 봐도 될까요?”
뭔가 곰곰이 생각하던 이지수가 시선을 들었다.
“나가서 황주희 씨한테 일 맡겨 놓은 거 물어봐서 나눠 해요. 끝나면 원단 창고 정리하고, 부자재 모자란 거 체크해서 동대문 다녀오고.”
“…….”
빤해도 저렇게 빤할 수가 있나. 한 달 동안 개처럼 굴려서 디자인을 못 하게 하고, 그 와중에 뭐 실수라도 하면 몰아붙여서 쫓아내겠다는 속셈이 그림처럼 눈앞에 보였다.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지수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서하만큼 이 디자인실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는 것.
서하는 그렇게만 대답하고 나가려다가 멈칫 덧붙였다.
“아, 맞다. 류 비서님이 물어보신 게 있어요.”
“뭔데?”
“혹시, 윤서하 아냐고.”
이지수의 얼굴이 지금까지와 비교도 안 될 만큼 차갑게 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