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 류경준과 윤서하 (23/45)


#23. 류경준과 윤서하
2022.06.18.



“유, 윤서하, 라니? 그걸 왜 조서하 인턴한테 묻지?”

“저야 모르죠. 그냥 팀장님이 무슨 얘기 했냐고 물으셔서 대답한 거예요.”

서하의 시선이 지수의 발 쪽으로 흘긋 내려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가 보겠습니다.”

지수는 텅 빈 회의실에서 혼자 바르르 몸을 떨었다. 류경준이 저 인턴한테 윤서하를 아냐고 물은 이유를, 그녀도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재, 재수 없다 해, 했더니.”

닮았다.

물론 외모는 아니다. 전혀 닮은 구석이 없으니까. 하지만 이따금 풍기는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윤서하를 떠올리게 했다.


“기분 나빠…….”

정말 등골이 오싹하고 기분 나쁜 일이었다.

지수는 벌떡 일어나 자기 자리로 가서 가방을 챙겼다. 이런 기분으론 도저히 남은 하루의 일을 할 수 없었다.


“나 먼저 갈게요.”

“네? 갑자기 어디 가세요?”

“급한 일이 생겨서.”

지수가 그 길로 향한 곳은 병원이었다. 평소엔 해선의 병실을 찾아 윤서하인 척하고 온갖 아양을 떨어왔지만, 오늘 지수의 발길은 윤서하의 병실로 향했다.

-똑똑.

간병인이 있을지 몰라 문을 두드렸다. 안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지수는 살그머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 한가운데 놓인 침대에 윤서하가 있었다. 전신에 산소호흡기와 링거를 달고도 좀비처럼 질기게 살아 있는 꼴을 보니 구역질이 났다.


“윤서하.”

윤서하가 여기 시체처럼 있다는 사실에 반쯤 안도하고 반쯤 악에 받친 지수가 조그맣게 말을 걸었다.


“그냥 좀 죽자. 너 여기서 일어나 봤자 아무것도 못 해. 네 엄마는 정신이 나갔고 회사는 오빠가 팔아 버린대. 너 하나 죽으면 몇 사람이 편한데 왜 꾸역꾸역 목숨이 붙어 있는 거야?”

당연히 윤서하는 대답이 없고, 지긋지긋한 목숨을 연장하는 기계만이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지수는 일정하게 움직이는 심박측정기 화면을 노려보다가 윤서하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윤서하는 여전히 자는 듯, 죽은 듯 누워 있었다. 반투명한 산소호흡기를 붙인 채로.

지수의 손이 심박측정기에 닿았다. 그러곤 조금 머뭇거리다가 단번에 그것을 떼어냈다.

처음엔 조용했다. 그러나.

-삐-삐-삐-삐-삐-

평화롭게 흘러가던 심박측정기가 크고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지수는 깜짝 놀라 산소호흡기를 도로 붙여 놓고 도망치듯 병실에서 나왔다.


“큰일 날 뻔했네.”

윤서하의 병실로 달려가는 의사들을 보면서 지수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바로 그 시각, 사무실.


“…… 님? 괜찮아요?”

서하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방금까지 작업하고 있었는데.


“무슨 일이에요? 어지러워요?”

주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천천히 고개를 든 서하는 왠지 얼얼한 이마를 문지르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사무실이고, 자신은 황주희와 나란히 작업대 앞에 앉아 있었다.


“저, 뭐 했어요?”

“갑자기 앞으로 쓰러졌어요. 책상에 앉아 있어서 다행이지 뭐예요. 빈혈이에요?”

“아. 그렇구나.”

서하는 원래 빈혈이 있다고 둘러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 좀 마시고 올게요.”

등에 식은땀이 나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서하는 가슴께를 문지르면서 방금 환각처럼 스쳐 지나간 장면을 더듬었다.


“분명……. 병실이었어.”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턱턱 막혔다. 입을 벌려 외치려 해도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윤서하의 몸으로 병실에서 잠깐 깨어났을 때와 똑같았다.

그러다 한순간, 아주 잠깐 눈을 떴다.

이지수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손을 뻗어왔다. 바로 다음 순간, 서하는 사무실에서 정신을 차렸다.

뭐였지? 환각?

서하는 아직도 멍한 기분으로 차가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잠깐.

아까 이지수가 가방 들고 나갔잖아?

시계를 보니 이지수가 나간 지 한 시간이 다 되어 간다. 꼭 여기서 병원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었다.


 

***

이승오가 이지수의 전화를 받고 일찍 퇴근해 버렸다. 할 일이 남았던 경준은 회사에 남아 있었고, 덕분에 모처럼 마음 편한 저녁을 보냈다.


“이 매출에 인센티브는 잘도 챙겨가는군.”

서류를 보면서 혼자 투덜거릴 수도 있었다.

본인은 잘 깨닫지 못했으나 경준은 이 회사를 지키는 데 진심이었다. ‘류 회장을 만족시켜 태양그룹에 팔기 위해서’라는 명분도 벌써 증발한 지 오래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달갑지 않은 전화가 울렸다. 경준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 회장님.”

[다음 협상 때 인수 가격을 반으로 낮춰.]

류 회장이 밑도 끝도 없이 지시했다.


“처음 제시하신 가격의 절반 말입니까?”

[지금 실적에는 그것도 과해. 싸게 살 수 있는 기회다.]

“그 가격에는 안 팔려고 할 겁니다.”

[이런 것까지 내가 하나하나 말해 줘야 하냐!]

버럭 성을 낸 류 회장이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하반기 매출 떨어지고 재무재표 개판 나면 팔겠지. 안 팔곤 못 버티게 만들어! 그게 네 일 아니냐!]

부자지간의 통화는 그게 끝이었다. 경준은 차갑게 끊어진 핸드폰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옆에 엎어놓고 다시 서류를 뒤적였다.

아까와 다르게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사랑받거든.’

하고, 반쯤 꼬인 발음으로 웅얼거리던 윤서하가 떠올랐다.


-‘난 우리 엄마 아빠의 자랑이고 보물이야. 남편 같은 거 없어도 돼. 다시 엄마랑 알콩달콩 살면서 우리 회사 키우고 전 세계에 내 브랜드를 보여줄 거야.’

윤서하는 항상 그렇게 반짝거렸다. 그게 참 부럽고 얄미웠다. 경준이 아주 어린 꼬마였을 때부터.

경준의 어머니는 한물간 지 오래인 여배우였다.

잘 나갈 때 벌어 놓은 돈은 진작에 바닥나고 남은 건 자존심과 시들어가는 미모뿐일 때 그녀는 류 회장을 만났다. 재벌 회장의 첩으로 평생 놀고먹기를 바랐던 모양이지만, 사업가가 그렇게 만만한가.

류 회장이 임신한 그녀를 쫓아내다시피 해외로 보내 놓곤 생활비도 끊어 버린 통에 몇 년이 지난 후에야 간신히 귀국할 수 있었다.

경준은 부모님의 사랑 따위는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제대로 먹지 못해 비쩍 마르고 키도 또래보다 훨씬 작았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내 인생이 이 모양 이 꼴이 났어! 너만 없었어도!”

술 취한 엄마는 항상 경준에게 소리를 질러 댔고.


“그만, 그만. 소리 지르다가 목 다 상하겠네. 옜다, 이거 갖고 가서 떡볶이나 사 먹어라.”

그런 엄마에게 치근덕거리는 아저씨들은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던져 주곤 했다.

그 떡볶이조차 경준은 먹지 못했다.


“너, 아까 받은 돈 어쨌어? 내놔.”

꾸깃한 만 원짜리는 엄마 몫이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학교는 좋은 곳으로 다녔다. 경준은 어쩌면 그게 다른 형태의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는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네 아빠가 언젠간 너를 찾을 거 아니니? 그때 쓸모 있게 보여야 내가 너 낳은 값을 받지.”

그 학교에서 경준은 윤서하를 보았다.

항상 기죽어 있고 혼자였던 경준과 달리, 윤서하는 가는 곳마다 친구들을 몰고 다녔다. 경준을 은근히 피하던 선생님들도 서하만 보면 얼굴 가득 웃음꽃이 피었다.

그게 너무 부러웠다. 부럽다 못해 심술이 나서 일부러 서하의 예쁜 옷에 물감을 튀겼다.


“너 뭐 하는 거야!”

가만히 있다 물감 테러를 당한 서하가 빽 소리쳤다.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 바람에 경준도 놀라서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우리 엄마가 생일 선물로 사 주신 옷인데!”

서하가 저렇게 화를 내는 건 처음 봤다. 당황스럽고 무서운데, 이상하게도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미안해. 네가 거기 있는 줄 몰랐어. 그냥 붓을 씻으러 가려고 했는데…….”

“거짓말 마! 너 나랑 눈 마주쳤잖아! 물어내. 물어내란 말야!”

서하의 원피스는 척 보기에도 고급스럽고 비싼 티가 났다. 경준은 늘 그렇듯 엄마가 어딘가에서 얻어다 입힌 후줄근한 바지와 티셔츠 차림인 채 서하 앞에서 쩔쩔맸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서하야. 그러면 못 써. 경준이가 미안하다고 하잖니.”

항상 서하를 예뻐하던 담임 선생님이 경준을 편들어 준 것이다.


“맞아. 그러지 마. 경준이는 불쌍한 애란 말이야.”

“경준이한테 잘해 줘, 서하야.”

“네 옷은 또 사면 되잖아.”

여기저기서 친구들이 거들었다. 어리둥절해서 가만히 있던 경준을 향해 윤서하까지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안해, 경준아. 내가 잘못 봤나 봐. 물감은 지우면 되니까 신경 쓰지 마.”

“어, 어, 응…….”

예쁜 옷도 망치고 오히려 사과까지 받고 나니 마음이 너무너무 불편했다.

경준은 서하 주변을 며칠이나 맴돌았다. 서하는 항상 친구들을 몰고 다녔기 때문에 혼자 있는 타이밍을 잡기가 어려웠다.

그 시선을 눈치챘을까. 어느 날, 서하가 경준에게 다가왔다.


“너, 나한테 할 말 있지?”

아주 좋은 향기가 났다.


“어……. 어, 응.”

경준은 얼굴이 빨개져서 더듬더듬 대답했다. 조그만 가슴이 터질 듯 콩콩거리고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저, 저기……. 그때, 물감. 네 원피스……. 사실은 일부러 그랬어. 미안하다고, 얘기하고 싶어서.”

“괜찮아. 나도 알고 있었는걸. 그런데…….”

서하가 방긋 웃는 얼굴로 한 발짝 더 다가와 속삭였다.


“한 번만 더 그딴 짓 해 봐. 난 네 머리를 물감통에 담가 버릴 거야.”

“……?”

경준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 멍하니 서하를 쳐다보았다.


“방금 네가 말한 거야?”

“응. 잘 알아들었지?”

서하가 또 방긋 웃더니 몸을 돌려 뛰어가며 소리쳤다.


“잘 가, 경준아! 내일 보자!”

경준은 나비처럼 나풀나풀 뛰어가는 서하의 뒷모습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 진짜 재수 없는 애였네. 윤서하.”

다음 학기에 엄마는 학비를 내지 못했고, 경준은 다른 학교로 전학 가야 했다.

강렬했던 기억이 시간을 따라 무뎌졌다. 경준이 초등학교, 중학교를 지나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 엄마도 세상을 떠났다.

엄마가 평생 기다렸던 류 회장은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야 사람을 보내 경준을 데려왔다. 마치 엄마가 죽기를 기다린 사람 같았다.

경준은 류 회장에게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형들에게 한참 뒤처진 학업을 따라잡으려 코피를 쏟아가며 공부하고 회사의 말단 직원으로 들어가 실무를 배웠다.


“여기만 성공적으로 인수하면…….”

서류를 덮은 경준이 새삼스럽게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인수를 위해서라는 핑계로 무던히도 열심히 일한 회사였다.

경준은 씁쓸하게 일어나 사무실에서 나왔다. 늦은 시각이라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층마다 캄캄하게 불이 꺼져 있었다.

딱 한 층만 빼고.


“누가 불을 켜 놓고 간 거야? 회사 전기 아낄 줄 모르고.”

경준은 투덜투덜 아래층을 눌러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계단으로 올라가 보니 불이 켜진 건 복도뿐이 아니었다. 조금 안쪽에 있는 사무실도 대낮처럼 환하고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디자인실이었다.

경준의 발길이 무언가에 이끌리듯 저절로 움직여 디자인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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