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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업혀 (24/45)


#24. 업혀
2022.06.22.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안쪽의 창고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경준은 서류가방을 아무 데나 내려놓고 디자인실을 조용히 지나 창고로 다가갔다.


“아. 힘들어.”

문밖까지 원단이 롤째로 세워진 창고 안에서 무언가 털썩 내려놓는 소리와 함께 끙끙대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원래대로 돌아가기만 해. 원단 한 롤 다 써서 멍석말이를 해 버릴 테니까.”

어디서 많이 들은 목소리였다. 경준이 이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생각하며 슬쩍 문틈을 들여다보려는 찰나.


“꺄앗!”

안에 있던 사람이 문을 홱 열다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뭐, 뭐, 뭐야!”

하마터면 문에 머리를 박을 뻔한 경준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잠시 굳어 있던 그는 눈을 서너 번 깜빡거린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조서하 씨?”

“류 비서님이 왜 이 시간에 여기 있어요?”

조서하는 평소보다 더욱 처참한 몰골이었다.

머리는 제멋대로 둘둘 말아 올리고 다 떨어진 운동화는 어디 갖다 버렸는지 실밥 튀어나온 슬리퍼를 신었다. 손에 낀 목장갑과 꼬질꼬질하게 묻은 먼지가 오늘 패션의 완성이었다.


“그쪽야말로 왜 이 시간에 여기 이러고 있지?”

“일하는 거 안 보이세요?”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던 서하는 아릿한 통증에 으으,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아무리 재활을 열심히 했다 해도 보통 사람보다 훨씬 약한 몸이다. 방금 넘어지면서 허리를 조금 삐끗한 것 같았다. 아니면 마지막에 무거운 원단을 옮기다가 그랬거나.


‘무거운……. 원단?’

서하는 약삭빠른 생각을 하곤 끙끙거렸다.


“나 좀 잡아 줘요. 못 일어나겠어.”

“어휴.”

경준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춰 주었다. 서하는 그의 손을 잡고 어깨에 기대어 조심조심 일어나려는 액션을 취했다.


“아야야!”

“천천히 일어서. 나가서 구급차 불러 줄 테니까.”

“됐어요. 조금 쉬고 나머지 정리해야 해요.”

“정신 나갔어, 조서하 씨?”

경준은 기가 막혀서 물었다. 잘 일어나지도 못하는 주제에 다른 곳도 아니고 원단 창고를 정리하겠다고?


“저라고 하고 싶어서 하겠어요? 시키니까 하지.”

“이걸 어떻게 혼자 다 해?”

계획이 먹히는 모양이다. 서하는 눈썹만 까딱해 보이곤 경준에게 기대어 창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가셔도 돼요. 전 여기서 좀 쉬다가 창고 마무리할게요.”

다친 사람이 이렇게 말하면 보통 ‘아니다. 나 때문에 다쳤으니 내가 도와주겠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서하가 노린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그러나 경준은 역시 보통 나쁜 놈이 아니었다.


“그럼, 고생하세요. 파이팅.”

서하를 눈에 띄는 아무 의자에나 앉혀 주고는 서류 가방을 집어 드는 게 아닌가.


“잠깐만요. 류 비서님!”

급히 외치자 경준이 막 몇 걸음을 떼어놓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진짜 가요? 나 여기 이렇게 두고?”

“가도 된다면서.”

“입에 발린 말이잖아요. 한 번은 더 물어봐야지.”

“어쩌란 거야?”

경준이 짜증을 내도 서하는 굴하지 않았다.


“저 좀 도와주세요.”

“뭘?”

“여기 정리하는 거.”

“내가 왜?”

“류 비서님이 갑자기 들어오는 바람에 넘어져서 다쳤잖아요. 저 몇 달 전까지 병원에 있었던 거 몰라요?”

“…….”

사실 서하의 말에도 틀린 게 없었기에 경준은 인상을 구기면서도 서류 가방을 도로 던져놓고 재킷을 벗었다.


“뭐부터 하면 됩니까?”

“아야야.”

서하는 어기적어기적 의자 바퀴를 굴려 창고 앞까지 갔다.


“원단이 마구 섞여 있어서 구분하는 중이었어요. 데님은 이쪽, 안감은 저기, 여름 원단은 저기, 겨울 원단은 이쪽. 털 달린 종류는 전부 저기요.”

롤에 말린 원단은 굉장히 무겁다. 특히 데님이나 겨울 원단은 철근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걸 혼자 다 했다고?”

“비서님 오기 전까진요.”

경준이 바퀴의자에 어정쩡하게 기대앉은 서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조그만 몸으로 저 무거운 원단을 끌고 다니는 모습이 상상이 가질 않았다.


“힘이 좋네.”

그는 중얼거리곤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붙였다.


“이건 어디라고?”

“오른쪽 구석요. 두꺼운 원단이 얇은 원단 앞으로 와야 해요.”

두꺼비 얻은 콩쥐가 이런 심정이었을까. 서하는 자신이 끙끙대며 애쓸 때보다 세 배는 빠르게 정리되어 가는 창고를 보면서 매우 기뻐했다.


“젠장. 더럽게 힘드네.”

드디어 정리를 끝낸 두꺼비가 허리를 펴면서 투덜거렸다. 서하는 반듯한 이마에 맺힌 구슬땀과 한껏 더러워진 셔츠를 보고 살짝 미안하려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뭐가 미안해? 류경준은 스파이야. 회사만 되찾으면 당장 쫓아내고 말겠어.


“고맙습니다. 혼자서 밤샐 작정이었는데.”

그래도 표면적인 예의란 게 있으니 인사는 했다. 경준은 별 감흥 없는 얼굴로 고개만 끄덕이더니 셔츠에 범벅된 먼지를 탁탁 털고 서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

“잡으라고. 일어나서 가야 할 거 아냐.”

그는 서하가 혼자 걷지도 못할 만큼 아파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서하는 또 앓는 소리를 내가면서 경준의 팔을 잡고 일어났다.


“아야야야…….”

“조심하고.”

지하철이고 버스고 끊긴 지 오래다. 싫든 좋든 경준은 서하를 집에 데려다 줘야 하고, 서하는 그의 차를 얻어타야 했다.

늦은 시각, 도로에는 차가 거의 없었다. 서하는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필사적으로 밀어 올리면서 바깥을 바라보았다.


“졸립니까?”

경준이 그런 서하를 흘긋 보고 물었다.


“네.”

“참으세요. 나는 이사고, 조서하 씨는 인턴이니까.”

“…….”

인정머릴라곤 없는 스파이 같으니라고.

서하는 몸을 되찾기만 하면 경준을 쫓아내리라 다시금 다짐하면서 창문을 조금 내렸다.

그 순간.

-끼이이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몸이 강하게 앞으로 쏠렸다.

서하는 반사적으로 눈을 꼭 감았다. 붉은 벽돌을 들고 차 앞에 뛰어들었던 조서하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괜찮아요?”

“헉, 허억…….”

경준의 목소리에 서하는 눈을 떴다. 자신이 숨을 안 쉬고 있다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뭐였어요?”

경준이 서하를 잡고 있던 오른손을 제자리에 놓았다.


“무단횡단.”

헤드라이트 앞에서 검은 옷에 후드까지 뒤집어쓴 남자가 꾸벅 사과하고 지나갔다.


“여기 8차선인데? 중앙분리대도 있는데요?”

“못 뒈져서 한 맺혔나 보지. 내가 살면서 저런 새끼를 두 번이나 보네.”

“두 번이나 보셨어요?”

경준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액셀을 밟았다. 건너편 도로를 흘깃 쳐다보는 그의 시선이 이상하게 조금 쓸쓸하게 느껴졌다.


“다 왔어요. 저기 내리면 돼요.”

서하가 어색한 침묵을 깨뜨리고 가파른 골목을 가리켰다.


“저기 올라갑니까?”

“네.”

경준은 어릴 적 엄마와 둘이서 살았던 동네와 비슷한 그 골목 앞에 차를 세웠다.


“조심해서 가세요.”

“데려다 주셔서 감사……. 아야야야!”

내리려고 몸을 틀자마자 서하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이번엔 진짜 많이 아팠다. 너무, 너무, 너무 아팠다.


“아, 으윽…….”

“아파요?”

서하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급브레이크 밟을 때 뭐가 잘못됐나 보네. 병원으로 갑시다.”

“안 돼요.”

“왜?”

“병원비 없어요. 조서하 찢어지게 가난하거든요.”

경준은 자신의 가난을 생판 모르는 남 일처럼 말하는 조서하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일단 내 카드로 내고, 나중에 산재 처리하세요.”

내가 산재 쓴다고 하면 이지수가 퍽이나 기뻐 날뛰겠네.

서하는 그 장면을 눈앞에 그려보곤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비서님께 더 신세 질 수 없어요.”

“당장 집까지 걸어가지도 못할 것 같은데.”

“갈 수 있어요. 안녕히 가세요!”

어기적어기적 차에서 내린 서하가 골목길 난간을 붙잡았다. 꼴을 보니 출근 시간이 다 되어야 집에 도착할 것 같았다.

무슨 상관이야.

경준은 그 꼴을 외면하고 다시 차에 탔다. 조금 가면서 백미러를 보니 조서하는 아직도 두 걸음밖에 못 갔다.


“젠장. 불 켜진 건 왜 확인해서.”

결국, 경준은 십여 미터도 채 가지 못하고 후진해서 아까 그 자리에 내렸다. 서하가 이제 막 네 번째 걸음을 떼어 놓기 직전이었다.


“자.”

갑자기 척척 걸어온 경준이 앞에서 등을 보이고 앉자 서하는 얼굴을 찌푸렸다.


“뭐가 ‘자’예요?”

“업히라고. 그러고 어떻게 집까지 가게?”

“부담스러워요.”

“내 알 바 아닙니다. 빨리 업히기나 하세요.”

서하는 가파른 골목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확실히 저기를 올라가려면 막막하긴 했다.


“그럼. 실례 좀 할게요.”

경준의 목에 팔을 두르자 몸이 둥실 떠올랐다.


“꽉 잡아요.”

호리호리하게 말라 보이는 경준은 의외로 근육이 단단하게 잡혀 있었다. 넓은 어깨 덕에 업혀 있기도 좋았다. 아까 창고 정리하느라 땀을 많이 흘렸을 텐데도 상쾌한 냄새가 났다.

비 온 뒤 풀밭 냄새 같기도, 초겨울에 불쑥 찾아온 바다 냄새 같기도 했다.


“류 비서님.”

“예.”

전구가 낡아 깜박거리는 가로등 뒤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기다랗게 지나갔다.


“향수 뭐 써요?”

“비누 씁니다.”

경준이 단조롭게 대답했다. 서하는 언젠가 을왕리에 갔을 때, 똑같은 질문에 경준이 같은 답을 했던 것을 떠올리고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맞다. 비누 쓴댔지.”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던 경준의 발이 딱 멈췄다.


“뭐라고 했습니까?”

실수했다.

서하는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윤서하라는 걸 들켜선 안 된다. 어떤 관계가 있는 듯 보여도 안 된다. 회사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스파이가 인턴 하나 쫓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거였다.


“뭐라고 했냐고.”

“…… 비누 냄새 좋다고요.”

“아닌데.”

뭐라고 대답하지.

서하가 열심히 다른 말을 생각하고 있을 때, 구세주 같은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컁! 컁컁컁!”

“민지야?”

부르자마자 치와와가 야무지게 달려오더니 경준의 발을 앙 물었다.


“민지야, 안 돼!”

물론 튼튼한 가죽 구두를 뚫기에 치와와의 입은 너무 작고 연약했다.


“이거 뭡니까? 조서하 씨 강아지?”

경준이 얼굴을 찌푸리고 턱짓으로 ‘이것’을 가리켰다.


“제 강아지는 아니고요. 우리 집주인…….”

“김민지!”

말 끝나기도 전에 재욱이 달려 내려오더니 경준과 서하 앞에 멈춰 섰다.


“조서하? 너 어떻게 된 거야?”

서하는 여전히 경준의 등에 업힌 채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허리를 다쳐서요. 잘 못 걸어서 상사분이 업어 주셨어요.”

“상사? 강윤컴퍼니?”

안 그래도 좀 우락부락하게 생긴 재욱의 얼굴에 뚜렷한 불신과 경계가 떠올랐다.


“조서하 씨가 저 때문에 허리를 삐끗해서 업고 왔습니다. 인사드릴 상황은 아니니 올라가시죠. 아, 제 발에서 이것 좀 떼어 주시고.”

경준도 별로 예의 차리지 않고 발을 까딱거렸다. 민지가 아직도 경준의 구두를 개껌처럼 사납게 물어뜯고 있었다.


“김민지, 너 이리 와.”

성의 없이 민지를 부른 재욱이 등을 돌리고 섰다.


“업혀. 조서하.”

서하를 더욱 단단히 붙잡느라, 경준의 팔이 딱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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