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합리적 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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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합리적 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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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합리적 의심
2022.06.25.
“뭐 해? 업히라니까.”
재욱이 거친 말투로 재촉했다. 난감해진 서하는 얼마 남지 않은 집과 경준의 뒤통수를 번갈아 보다가 마음을 굳혔다.
“그냥 내려서 걸어갈게요. 천천히 걸으면 괜찮아요.”
“너무 천천히 걸으니까 내가 이러지.”
경준이 투덜거리곤 아까보다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재욱이고 경준이고 간에, 서하는 일단 떨어지지 않기 위해 경준의 목을 더 필사적으로 붙잡아야 했다.
“저기요. 개조심 적힌 대문.”
“개조심? 저것 말입니까?”
“저거 아니고, 김민지.”
재욱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대문을 밀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됩니다. 서하 안 떨어지게 조심하고.”
당연히 정면에 보이는 현관으로 들어가려던 경준은 멈칫하고 재욱이 가리키는 쪽을 보았다.
“저깁니까, 조서하 씨?”
“계단이 좁아요. 제가 알아서 갈게요.”
“꽉 잡기나 해요.”
어느새 경준의 목덜미에 구슬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성인 여성을 업고 오르막길을 십 분 이상 걸어 올라왔으니 당연했다.
서하는 옥탑방 앞까지 와서야 경준의 등에서 조심조심 내려왔다.
“으, 아야…….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리를 숙이지도 펴지도 못한 채 인사하고 보니 경준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옥탑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가세요?”
“여기 삽니까?”
“그런데요.”
“저기 밑에 계신 분은?”
여전히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계단 밑에 서 있는 재욱을 경준이 눈짓으로 가리켰다.
“임대인이세요. 여기 월세거든요.”
“진짜 찢어지게 가난하네.”
“그렇다고 했잖아요.”
경준이 이런 집에서 엄마와 둘이 살던 어린 시절은 끔찍했다.
누가 그랬지. 가난은 창피한 게 아니라 불편한 거라고.
그 말을 한 사람은 절대 가난해 본 적이 없었을 거라는 데 경준은 손목을 걸 수 있었다.
그렇게 가난해 본 경준이 장담하건대, 조서하는 가난한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 외모를 말하는 게 아니다. 몸가짐, 행동, 무엇보다 저 눈빛.
“내일은 웬만하면 쉬세요. 괜히 허리바사삭 만들지 말고.”
“네. 웬만하면 쉴게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대답하고 경준을 배웅했지만, 서하는 허리바사삭이든 무릎바사삭이든 쉴 생각이 없었다.
“좋아. 오히려 잘됐어.”
살짝 올라간 서하의 입가에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
“세상에. 이거 뭐야?”
“왜 그러세요?”
“이거 봐요. 진짜 정리 다 해 놨네.”
아침부터 디자인실이 웅성거렸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조금 늦게 출근한 지수는 자신이 왔는데도 돌아보지 않는 디자이너들을 발견하고 일부러 또각또각 발소리를 크게 냈다.
“무슨 일이에요?”
“팀장님, 나오셨어요!”
그제야 지수를 발견한 디자이너들이 똑같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응. 뭔데 이렇게 한데 모여 있지?”
“이것 보세요.”
한 명이 원단 창고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발 디딜 틈 없이 어질러져 있던 창고 안이 눈부시게 말끔했다. 원단이 소재별, 종류별로 정리된 건 물론, 이번 시즌에 사용할 원단은 또 따로 구분되어 한눈에 찾기 쉬웠다.
뭐야. 이거.
지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루 만에 여기를 다 정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게다가 육체노동이니 힘들어서라도 며칠 내내 디자인은 꿈도 못 꾼다. 그걸 계산하고 시킨 일이었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조서하는 없었다. 지수는 일부러 소리 높여 물었다.
“조서하 인턴은 어디 갔죠? 내가 칭찬이라도 해 줘야겠는데.”
“아침에 늦는다고 연락받았어요, 팀장님!”
한 명이 손을 들고 대답했다.
그 ‘늦는다’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조서하가 나타났다. 지수가 출근한 지 오 분도 안 된 시각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래도 늦은 건 늦은 거다. 일단 정해진 출근 시간보단 늦었으니까. 지수는 웃는 얼굴을 하고서 짐짓 부드럽게 물었다.
“조서하 인턴. 왜 이렇게 늦었어요?”
“죄송합니다. 걷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서하는 여전히 눈치 없고 해맑게 대답하면서 티셔츠를 살짝 올려 허리에 덕지덕지 바른 파스를 보여주었다.
“새벽까지 창고 정리하다가 허리를 다쳤어요. 원단이 생각보다 너무 많고 무겁더라고요.”
그 원단이 생각보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는 건 디자인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당황한 지수는 걱정하듯 얼굴을 찡그렸다.
“병원에 다녀오지 그랬어요?”
“병원비가 없어서요.”
“…….”
별안간 사무실이 절간처럼 고요해졌다. 이지수까지도.
“그리고, 죄송합니다. 어제 창고 정리하고 나면 동대문도 다녀오라고 하셨는데 못 갔어요.”
창고만 정리해도 며칠. 동대문에 다녀오려면 하루를 꼬박 잡아먹는다. 그걸 잘 아는 사람들의 시선이 무관심과 귀찮음에서 동정으로 바뀌었다.
“그, 그걸 왜 굳이 어제 다녀와요? 창고 정리도 그래. 천천히 하면 될 걸 왜 무식하게 새벽까지 하다가 다쳐서 업무에 지장을 줘요?”
“팀장님이 오늘 안에 끝내라고 하셔서요.”
오늘 안에 끝내라고 말한 적 없는 지수는 억울해서 팔짝 뛸 뻔했다.
“내가 언제 그걸 오늘 안에 다 하라고 했어요?”
“퇴근 전까지 주희 님 일 돕고, 끝나면 원단 창고 정리하고, 동대문 가서 부자재 사 오라고 하셨어요. 퇴근 전까지니까 하루 안에 끝내라는 뜻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면 죄송합니다.”
‘퇴근 전까지’는 서하가 은근슬쩍 끼워 넣은 말이었다. 하지만 서하의 태도가 너무 태연했으므로 지수조차 자신이 진짜 그 말을 한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동대문은 됐으니까 가서 앉아요. 다음부터 늦지 말고.”
“네, 팀장님! 죄송합니다!”
서하는 다시 한번 진심이라곤 전혀 없는 사과를 커다랗게 외치곤 자리로 갔다.
“아, 아야야…….”
끙끙거리면서 간신히 의자에 앉는 서하가 어지간히 안쓰러웠던지, 주희가 얼른 일어나 부축해주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파스 많이 붙였으니까 내일이면 나을 거예요.”
“어휴.”
주희는 고개를 저으면서 제 의자에 붙여 놓았던 허리 받침대를 서하의 의자에 달아 주었다.
“여기 기대면 좀 나을 거예요.”
주희의 호의는 시작이었다.
“인턴, 약은 있어요?”
누구는 조금 퉁명스럽게 물으면서 진통제를 놓고 가고.
“나 지금 동대문에 부자재 사러 갈 건데, 필요한 거 있으신 분 따로 목록 적어 주세요!”
누구는 서하 대신 동대문에 가 주고.
“배달이 두 개 왔네. 인턴이 하나 먹어요.”
또 누구는 갓 봉투에서 꺼낸 녹즙에 빨대까지 꽂아 건네고.
누군가에게 동정을 받기란 이렇게나 쉽다. 부엌 바닥에 무릎을 꿇고 빌던 이지수나, 아주 어릴 때 서하의 옷을 더럽혔던 아이처럼.
그리고 동정을 받는 사람 반대편에선 사회적 강자가 악인이 된다는 것도 서하는 알고 있었다.
“인턴 안됐더라.”
화장실은 ‘님’자 빼고 사적인 이야기가 오가기 딱 좋은 장소였다. 바꿔 말하면, 사적인 이야기를 훔쳐 듣기도 좋았다.
“그러게. 거기 혼자 다 정리하려면 진짜 힘들었을 텐데. 나 같으면 오늘 드러누워서 못 나왔어.”
“사실 팀장님이 너무 티 나게 인턴 싫어하는 건 있지.”
“구두 사건 때문에?”
“그 전부터. 고졸이라서 무시하는 것도 있고, 이름도 똑같잖아. 기분 나쁜 거지.”
“그러네.”
짤막한 대화지만 들을 건 다 들었다. 서하는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문을 조심조심 열었다.
“저……. 선배님들.”
막 나가려던 디자이너 정세희와 유서연이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안에 있었어요?”
“네. 들으려고 들은 건 아닌데…….”
서하는 우물쭈물 눈치를 살폈다.
“창고 정리는 저 괜찮았어요. 어차피 그런 거 아니면 도움도 못 되잖아요. 그런데, 저……. 팀장님이 저를 정말 미워하세요? 고졸이라서?”
세희와 서연이 서로 당황한 시선을 교환하곤 허둥지둥 대답했다.
“아니, 너무 신경 쓰진 마요. 서하 씨는 어차피 인턴이고 오래 볼 사람도 아니…….”
“서연 님.”
세희가 서연을 향해 눈썹을 살짝 찌푸려 보이곤 대신 말을 이었다.
“맞아요. 조서하 인턴, 팀장님한테 찍혔으니까 매사 행동 조심해요. 괜히 우리까지 피해 보게 하지 말고.”
정세희. 이지수에게 제법 신임받는 디자이너이자 아까 서하의 책상에 진통제를 내려놓고 간 사람이었다.
“네. 제가 열심히 해서 팀장님한테 미움 안 받게 할게요!”
“너무 열심히 하지도 말고요. 그래 봤자 좋아질 건 없어요.”
“네……. 네.”
이지수가 진심으로 존경을 받고 있을 거란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겨우 이 정도 균열로 신나게 물어뜯길 정도로 인망이 형편없다니.
강윤이 지금까지 안 망한 게 신기하네.
서하는 손을 씻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
“가져왔어요. 디자인 열 개.”
약속한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이었다. 서하는 경준의 책상에 스케치 열 장을 자신만만하게 올려놓았다.
“벌써?”
“네. 다친 허리 붙잡고 열심히 그렸거든요.”
허리 안 다쳤으면 잡일에 치여 디자인북도 못 펼칠 뻔했다. 결과적으론 경준이 본인도 모르는 사이 서하를 또 도와준 셈이었다.
경준은 서랍 깊은 곳에서 서하가 지난번 가져온 디자인 세 장을 꺼냈다. 그것을 새로 가져온 것 옆에 놓으니 한 사람이 작업한 티가 나게 비슷했다. 그러면서도 하나하나 디테일이 다르게 살아 있었다.
“어때요? 제가 이긴 것 같죠?”
서하가 조금은 성급하고 자랑스럽게 물었다. 경준은 잠시 더 스케치를 살피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네요. 잘 봤습니다.”
오늘 받은 디자인은 금고 속에 있는 것과 달랐다. 그러나 아이덴티티만은 여전히 살아 있어 당장 이 시리즈로 브랜드를 하나 만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디자인을 정식으로 배운 적도 없다던 조서하의 작품인데 말이다.
“조서하 씨.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했나?”
“네.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으시죠?”
부모님은 어릴 때 사고로 사망.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는 병원 생활을 반복하다 사 년 전 사망. 본인은 소규모 공장 경리로 일하다가 실직.
감정적으로 보면 불행한 인생이었다. 그러나 감정을 배제하고 자세히 보면 뭔가 굉장히 이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실업계 고등학교 회계과 출신에 미술, 디자인 관련 수상 경력도 없고 대외활동도 전무.”
“그것도 맞아요.”
서하가 순순히 수긍했다.
디자인 관련해서 접점이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억지로 탈탈 털고 끼워 맞춘다면 실직 전까지 일했던 공장이 강윤과도 거래한 적 있는 원단 공장이라는 것 정도?
하지만 조서하는 입사하자마자 누구나 인정할 만한 디자인을 뽑아냈다. 이지수마저 위기감을 느끼고 디자인북을 찢어낼 정도였다.
그래. 엄청난 재능을 갖고도 불행한 환경 때문에 빛을 발하지 못했던 옥석이라 치자. 그러면 나머지 이상한 점은 어떻게 설명이 되나.
“만약, 이라고 가정하면.”
경준은 맨 처음 서하가 가져온 스케치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둘이 친분이 있을 수 있는 거겠지.”
서하가 아까부터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으로 눈썹을 찡그리고 경준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마저 윤서하와 닮아 있었다.
“당신. 윤서하 친구 맞지?”
경준은 확신에 찬 말투로 물었다. 찡그린 표정 속에서 서하의 눈동자가 당황스럽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