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 Prince (27/45)


#27. Prince
2022.07.02.


밤새도록 한잠도 못 잤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지수는 아침이 되자마자 옥순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어머니, 혹시 오빠 거기 있어요?”

[넌 무슨 전화 예절이 그 모양이니? 아침에 전화하자마자 안녕히 주무셨어요, 할 생각은 없어? 이래서 없이 사는 애들은 안 돼!]

“죄, 죄송해요. 어제 오빠가 드라이브한다고 나갔는데 안 들어와서……. 거, 걱정이 돼가지고요.”

[승오 여기서 잤다.]

“그, 그럼 전화 좀 바꿔 주시면 아, 안 돼요? 어제 계속 전화했는데 아, 안 받아서.”

[애 바쁘게 준비하는데 무슨 전화니? 여기서 씻고 아침 먹고 바로 출근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끊는다!]

전화가 뚝 끊어졌다. 목소리는 못 들었어도 시댁에 있다면 안심이었다. 지수는 겨우 한시름 놓고 모처럼 아침밥 안 차리는 아침을 만끽했다.


“토스트나 먹을까.”

지수가 냉동실에서 식빵을 꺼내 토스트기에 넣고 버튼을 눌렀을 때였다. 거실 월패드에서 낭랑한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차량이 정문을 통과했습니다.]

“응?”

이승오는 지금 시댁에서 출근 준비 중이라고 했다. 순간이동이 아닌 이상, 지금 집에 오는 건 불가능했다.

오 분 후.

그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졌다.


“잘 잤어, 여보?”

현관문을 열고 나타난 이승오가 씩 웃으면서 양팔을 벌렸다. 지수는 망설이다가 그냥 그에게 가서 허리를 감싸고 쪽, 입을 맞췄다.


“어디 다, 다녀왔어요? 저, 전화도 안 받고. 나 걱정했어요.”

“근처 한 바퀴 돌고 본가 가서 잤어. 늦게 들어오면 괜히 여보 자다가 깰까봐.”

“…… 그럼 지금 시댁에서 오는 길이에요?”

“그렇다니까.”

이승오가 주변 냄새를 킁킁 맡곤 얼굴을 찌푸렸다.


“토스트야? 나 아침으로 빵 먹는 거 질색인 거 몰라?”

“오빠가 아, 안 오는 줄 알았어요. 빨리 밥 차려 줄게요!”

지수는 허둥지둥 앞치마를 두르고 냉장고에서 재료들을 꺼내 썰었다.

하지만 요리에 집중이 될 리 없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승오가 지금 시댁에서 오는 길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모를까.


“아얏!”

날카로운 칼날이 엄지손톱 부근을 베었다. 금세 새빨간 핏방울이 도마 위로 뚝뚝 떨어졌다.


“괜찮아?”

그 소리에 승오가 뛰어와 손가락을 살폈다.


“괘, 괜찮아요.”

“많이 베었는데. 나 그냥 회사 가서 아침 먹을 테니까, 오늘은 요리하지 마.”

이승오는 기껏 썰어 놓은 애호박이며 두부를 한꺼번에 싱크대에 쏟아 버리곤 반창고를 가져왔다.


“저어, 오빠.”

피 묻은 손가락을 깨끗하게 닦고 반창고를 붙이는 승오를 지수가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조심조심 입을 열었다.


“잠깐만. 다 됐다.”

승오가 베인 상처에 말끔하게 반창고를 붙이곤 고개를 들었다.


“왜 불렀어, 여보?”

“…….”

어젯밤, 조금 투정을 부렸을 뿐인데 차갑게 나가 버리던 승오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여기서 어제 시댁이 아니라 어디 있었냐고 따져 물으면 어떻게 될까.

지수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냥 고개만 저었다.


“고맙다고요. 그리고, 어젯밤엔 내가 미안했어요.”

“여보가 사과할 줄 알았어.”

이승오가 부드럽게 웃으며 지수를 품에 꼭 안고 토닥여 주었다.


“조서하가 학벌이나 경력이 모자라긴 해도 제법 센스가 있거든. 아마 다음 품평회 때 성적이 괜찮을거야. 그러면 여보한테도 좋고, 디자인실에도 좋고, 내 회사에도 좋고. 안 그래?”

‘품평회’란 매 시즌 신상품을 준비하기 전에 꼭 거쳐야 하는 단계였다.

디자이너들이 저마다 실물 샘플을 만들어 모델에게 입히면, 각 매장의 매니저들과 회사 임원들이 모여 그 중 실제 생산에 들어갈 디자인을 고르는 것이다.

그렇게 중요한 일이니만큼 막내 디자이너가 설 자리는 없었다.

그들은 보통 선배들이 디자인하고 샘플을 만드는 동안 오만 가지 잡다한 일을 하느라 자기 디자인은 들여다보지도 못했다.


“조, 조서하를 품평회에 내보내라고요?”

지수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묻자 이승오가 어깨를 으쓱였다.


“정식 디자이너잖아. 안 될 게 있나?”

“이제 마, 막 디자이너 명찰 달았어요. 막내 디자이너는 보통 품평회까지는 잘 안 나간단 말이에요.”

“내가 보고 싶어서 그래.”

사실 조서하를 품평회까지 내보내라고 한 사람은 경준이었다. 그걸 구구절절 설명할 수 없으니 이승오는 그냥 자신이 보고 싶은 거라고 대충 말했다.

그게 말이 지수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나, 나도 첫해 품평회는 못 나갔어요!”

“알았으니까 좀 빨리 나가자. 오늘은 류 비서 못 온다고 하니까 같이 출근해.”

사랑해, 하고 이승오가 지수의 이마에 살짝 키스했다.


 

***



“작업지시서 내일 아침까지 완성해 줘요!”

“나 오늘 패턴 받아야 하는데 패턴실 연락이 없네. 서하 님이 직접 가서 좀 받아와요.”

“택배 온 거 정리 안 해요? 박스 때문에 돌아다닐 수가 없어!”

“서하 님, 이리 와서 원단 좀 꺼내 봐요!”

막내 디자이너의 일은 인턴이 하는 일보다 훨씬 많았다. 서하는 여기저기서 불러대는 선배들 덕에 연필은 쥐어 보지도 못하고 시간을 흘려보냈다.

돌아가면 막내 디자이너들한테 진짜 잘해줄 거야. 이렇게 잡다한 건 못 시키게 할 거야. 꼭.

그 와중 새로운 디자인이 번뜩 떠올랐다. 서하는 몽당연필 한 자루를 주머니에 슬쩍 넣고 화장실에 가는 척 디자인실을 빠져나왔다.

마침 곧 점심시간이니, 식사를 거른다고 치면 적어도 삼십 분은 시간을 낼 수 있었다.

다른 사람 눈에 안 띄고 스케치할 곳이 필요한데. 빈 사무실이 있던가?

잠시 고민하던 서하는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층에 있는 경준의 사무실로 향했다. 아무도 안 드나들고 조용하고 책상 편하고. 숨어서 디자인하기엔 딱 맞는 장소였다.

-똑똑.

예의상 두어 번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자 이제 막 재킷을 걸치던 경준이 미간을 좁혔다.


“뭡니까?”

“사무실 좀 빌려주세요. 빈 노트 있으면 그것도 하나 주시고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끝내주는 디자인 뽑으라면서요.”

“디자인실은 폭탄이라도 떨어졌습니까?”

서하는 주머니에서 연필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일 폭탄이 떨어졌죠. 디자인실에 있으면 연필 잡을 시간도 없어요.”

“하아아아.”

경준은 뭐가 그렇게 불만스러운지, 한숨을 길게도 쉬었다. 그래도 책장에서 빈 노트를 하나 찾아 던져 주긴 했다.


“지우개 가루 흘리지 마. 나 정확히 사십 분 후에 올 거니까 도착할 때까지 마무리해.”

“접수.”

넥타이를 정리하면서 성큼성큼 걸어 나가려던 경준이 손잡이를 잡기 직전, 문득 서하를 돌아보았다.


“이제 점심시간인데. 밥 안 먹나?”

“올 때 지하철 샌드위치나 사다 주세요. 치킨 로티세리 반쪽짜리, 빵은 허니오트에 속 다 파내고 슈레드 치즈, 채소 다 넣고 올리브 많이, 드레싱은 올리브유랑 후추. 그리고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샷 하나만 넣고 시럽 없이요.”

“사다 준다곤 안 했는데.”

“그러시구나.”

서하는 경준을 쳐다보지도 않고 슥슥 연필만 놀리면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곧 경준이 뭐 저런 여자가 다 있어, 하고 투덜거리더니 방에서 나갔다.


“뭐 저런 스파이가 다 있어.”

서하도 중얼거리면서 계속해서 연필을 움직여 나갔다.

한참 집중하다 보니 허기가 조금씩 밀려왔다. 경준이 오겠다던 시간까지 앞으로 십 분. 서하는 막 그리기 시작한 두 번째 디자인을 내려놓고 손목을 주물렀다.


“물이라도 마셔야지.”

서하는 복도 끝에 붙은 자판기에서 대학 시절 엄청나게 마셔댔던 홍차 음료수 한 캔을 뽑아 가지고 돌아왔다.


“……?”

그런데 사무실에 이지수가 있었다. 서하가 방금까지 드로잉하던 노트를 손에 들고.


“조서하 씨.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지수가 손에 든 노트를 흔들었다. 서하는 거침없이 걸어가 그 손에서 노트를 홱 빼앗으려 했다.


“이리 주세요!”

“어머.”

재빨리 노트를 뒤로 감춘 지수가 킬킬거렸다.


“그냥 보자는 건데, 왜. 팀장이 팀원 디자인도 못 봐?”

서하는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도 문은 꼭꼭 잘 닫혀 있었다.

참 잘된 일이었다.


“야. 이지수.”

이지수의 눈이 커졌다.


“조서하 씨. 미쳤어요?”

“미친 건 너지. 어디서 남의 디자인을 그따위로 다뤄?”

“야!”

“본처 없는 사이에 첩년이 수석 디자이너, 디자인 팀장 명찰 달고 나니 눈에 뵈는 게 없나 본데.”

서하는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필터링 없이 말을 이었다.


“그거 네 실력 아니야. 유부남 애인 빽이지. 너도 그거 아니까 내 디자인 찢고 훔치고 발광한 거 아냐? 내 말 틀려?”

“미친x이 진짜!”

이지수의 손에서 노트가 힘차게 날아왔다. 서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틀어 피했다. 목표물을 놓친 노트는 그대로 날아가 열린 문 근처, 경준의 발밑에 툭 떨어졌다.


“…….”

경준이 몸을 숙여 노트를 주워들었다. 그의 손에는 샌드위치 봉투가 들려 있었다.


“내 사무실에서 뭐 하는 겁니까?”

뒤이어 문이 좀 더 열리더니 이승오가 머리를 내밀었다.


“여보. 당신이 왜 여기 있어?”

“오, 오빠!”

승오를 보자마자 백만대군 얻은 장군처럼 기세등등해진 지수가 쪼르르 달려갔다.


“들었어요? 내가 그랬잖아. 쟤 이상하다고!”

“들렸습니다.”

경준이 던진 샌드위치 봉투가 소파 한가운데에 정확히 안착했다.


“이지수 씨가 미친x이라고 소리 지르는 거.”

“아녜요. 그, 그건-!”

“죄송합니다!”

지수가 막 억울함을 호소하려는 순간, 서하의 두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정말 죄송해요, 팀장님. 그냥, 디자인이 갑자기 떠올라서……. 이것만 그리고 빨리 내려가서 일하려고 했어요. 정말이에요!”

 

 
내친김에 손을 모아 기도하듯 싹싹 비비자 이승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지수를 처음 만난 날, 서하가 보았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뭐라고 하는 거야, 조서하! 너 방금까지 나한테 막말하고 있었잖아!”

“조서하 씨가 뭐라고 했는데?”

이승오가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지수에게 물었다.


“어, 그게…….”

차마 말 못 하겠지. 본처 없는 사이 유부남 애인 빽으로 팀장 단 첩년이라고 어떻게 네 입으로 말해.


“대표님, 팀장님은 잘못 없으세요. 그냥 제가 마음대로 디자인실 나와 있어서 야단치신 것뿐이에요. 다 제 탓이니까, 팀장님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서하는 손을 바닥에 짚고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다. 한 번 숙일 때마다 남몰래 짓는 미소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


“하아아.”

깊이 한숨을 쉰 이승오가 지수를 툭 밀쳐내고 서하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요, 조서하 씨.”

이놈은 백마 탄 왕자 콤플렉스가 있는 게 분명하다. 서하는 촉촉하게 젖은 눈빛으로 승오를 올려다보면서 그의 손을 마주 잡고 비틀비틀 일어섰다.


“아야야…….”

“어디 아파요?”

“아, 아니요.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대표님.”

어깨를 잔뜩 움츠린 서하의 손을 이승오가 아무도 모르게 꼬옥 잡았다가 천천히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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