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강해선의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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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강해선의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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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강해선의 실종
2022.07.06.
강해선은 초점 없는 눈동자로 벽을 가만히 응시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새하얀 벽에 불과했지만, 강해선의 시점에선 그 벽에 영화관처럼 선명한 화면이 흘러가고 있었다.
부부는 고아원에서 만나 함께 동대문으로 갔다. 해선은 의류 공장에서, 태철은 도매 시장에서 하루에 열여섯 시간씩 일해 조그만 가게를 차렸다.
그 가게를 키우고 또 키워 이름을 붙였다. 강해선, 윤태철의 회사. 강윤 컴퍼니.
갓 태어나 퉁퉁 불고 새빨간 갓난아기가 앵앵 울어댔다. 태철이 아기와 아내를 붙잡고 더 크게 울다가 해선에게 등짝을 맞았다.
처음으로 젖을 물렸다. 아기는 울음을 뚝 그치고 열심히 젖을 빨았다. 해선은 이 아기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기에게 서하라는 이름을 붙이고 정원에 소나무를 심었다. 비바람에 휘어져도 좋으니 소나무처럼 튼튼하게 오래오래 자라라고.
강해선, 윤태철 부부는 더 열심히 일했다. 한 명씩 번갈아 서하를 업고 안아가며 일하고 쪽잠을 잤다.
몸이 부서질 것처럼 힘들 때도 서하가 한 번 꺄르르 웃어주면 가슴에 행복이 꽉꽉 차올랐다.
서하가 제 힘으로 일어섰다. 그 짧은 다리로 아장아장 세 걸음 걸어 해선에게 꼭 안겼다. 향긋하고 고소한 아기 냄새가 났다.
서하는 엄마보다 아빠를 먼저 말했다. 태철은 사람만 만나면 그것을 최소 다섯 번쯤 자랑했다.
어린이집에 다녀온 서하가 가방에서 뭔가 꺼내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동그라미에 붙은 성냥개비 같은 그림 밑에 ‘엄마 아바 사랑해요’라고 삐뚤빼뚤 적혀 있었다.
해선은 그 편지를 보물상자에 넣었다. 상자에는 서하의 배냇머리, 탯줄, 처음 깎은 손발톱, 서하가 주워서 해선에게 쥐여 준 낙엽 같은 것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보물상자는 태워졌다. 태철의 관과 함께.
남편의 발인을 마친 해선은 납골당에서 정장으로 갈아입고 구두를 신었다. 통곡하고 비탄에 빠지는 대신 회사로 달려가 임원진을 소집했다. 딸과 회사를 지키기 위해 더 강해져야 했다.
서하는 무럭무럭 자랐다. 대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번 과외비로 해선의 내복을 사 왔다. 해선은 그 내복을 새 보물상자에 넣었다.
서하가 결혼식을 올렸다.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딸을 앞에 두고, 해선은 남편이 죽었을 때도 흘리지 못한 눈물을 마음껏 흘렸다. 서하도 울었다. 울면서 웃었다.
전화가 왔다. 늘 그렇듯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다. 전화를 끊기 전, 서하는 해선에게 말했다.
“엄마, 사랑해.”
영화는 거기서 끝났다. 화면이 차차 검어지다가 어느덧 완전히 꺼지면 주변이 환해진다. 그제야 멍하니 텅 비었던 해선의 동공이 움직였다.
“서하야.”
해선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는 어딜까. 우리 딸은 어디 갔을까.
주황빛 노을이 창문을 넘어 새하얀 시트 위에 쭉 드러누웠다. 물방울 모양 가습기가 차가운 김을 폭폭 쏟아낸다. 서하는 없었다. 해선이 화들짝 자리를 떨치고 일어섰다.
“아가. 우리 아가 어디 갔지?”
밖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또 놀이터 갔나 보네. 저녁 먹여야 하는데.”
해선은 어린 서하를 찾아 타박타박 걸었다. 복도 끝에서 누군가 외쳤다.
“엄마!”
“서하야?”
서하가 아니었다. 해선은 낯선 여자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걸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엄마, 왜 혼자 나왔어? 간병인은? 경호인은?”
지수는 해선의 손을 꼭 잡고 병실로 돌아가려 했다.
“나 우리 딸 찾으러 가야 해요. 아가씨, 우리 아기 못 봤어요? 키는 요만하고요. 눈이 동그랗고, 머리에 노란 방울 달았어요.”
지난번에 갑자기 회사 얘기를 주절거렸다길래 와봤는데.
지수는 한숨을 푹 쉬곤 해선의 팔짱을 꼈다.
“나가고 싶어? 같이 산책가자, 엄마.”
해선이 아무 저항 없이 따라왔다. 그때까지는 그냥 산책하는 척 좀 더 엄마, 엄마 해볼 생각이었다.
“저쪽으로 한 바퀴 돌자, 엄마.”
해선은 그 궁전 같은 집의 주인이었다. 저 우아하고 세련된 사장님이 우리 엄마였으면 좋겠다고, 얼마나 많이 생각했는지 모른다. 윤서하가 아니라 내가 딸이어야 한다고.
“어머? 서하야!”
걷다가 세네 살 정도의 어린 여자애를 본 해선이 갑자기 팔을 놓고 후다닥 달려갔다. 놀란 아이 엄마가 얼른 딸을 안아올렸다.
“엄마!”
지수는 헐레벌떡 뛰어가서 해선을 잡았다.
“엄마, 갑자기 뛰어가면 어떡해.”
“…… 아가씬 누구세요?”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지수는 멀리 떨어진 벤치를 발견하고 해선을 끌고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이승오가 조서하를 일으켜 주었다. 몇 년 전, 그 궁전 같은 집 부엌에서 자신을 일으켜 주었을 때와 똑같은 눈빛으로.
조서하의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방금 인턴 딱지 뗀 신입의 디자인을 품평회에 꼭 내보내라고 지시했다.
모든 것이 너무나 불길했다. 생각하면 턱이 덜덜 떨릴 정도로.
“나 품평회 나가야 한단 말이야. 이번 신상 내 이름으로 도배해서, 그 거지새끼 잘라 달라고 해야 해. 그러니까 금고 비밀번호 좀 가르쳐 줘. 응? 그거 어차피 못 쓰는 거잖아…….”
아무리 웅얼거려도 해선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승오와 조서하를 향한 분노가 갑자기 폭죽처럼 팡 터졌다.
“좀 가르쳐 달라고! 그거 어차피 쓸 사람도 없잖아!”
푹 숙였던 고개를 들고 소리쳤지만,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엄……!”
놀라서 외치려던 지수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저만치 앞에 해선이 병원 뒷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비밀번호를 알아내는 건 글렀다.
그런데 저대로 나가서 차에 치이기라도 하면. 영영 실종되서 못 찾기라도 하면.
그러면, 윤서하만 남는 거잖아?
지수는 천천히 일어서면서 말했다.
“엄마, 나 화장실 다녀올게.”
***
점심시간 이후로 이지수가 안 보인 덕분에 오늘 일이 굉장히 수월했다. 퇴근도 좀 일찍 했다. 서하는 룰루랄라 주차장으로 내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조서하 씨. 여기.”
경준의 차가 미끄러지듯 다가와 서하 앞에 멈췄다.
“차 좋네요.”
조수석에 올라타며 칭찬 삼아 건넨 말에 경준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회장님이 돈은 잘 주셔서.”
“류 회장 말하는 거예요? 용돈도 주세요?”
“일단은 아들이니까.”
그러고 나서 경준은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 이야기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기에 서하도 더 말하지 않고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곧 엄마를 만난다. 마음껏 손을 잡고 이야기도 할 수 있다. 마음이 부풀고 부풀어 경준의 눈치 따윈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그때, 차 안에 전화벨이 울렸다.
[이사님, 강 대표님이 병원에서 사라지셨습니다!]
‘뭐라고?’
서하는 자신이 잘못 들었길 바랐다.
“그게 무슨 말이야? 강 대표님이 왜 없어져!”
[그게, 작은 사모님이 같이 산책 나가셨다가……. 잠깐 화장실 간 사이에 없어졌답니다.]
“뭐?”
미친x이, 하고 경준이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cctv 확인해 봤어? 병원 내에 없는 거 확실해?”
[뒷문으로 나가는 모습이 마지막 영상입니다. 약 세 시간 정도 됐습니다.]
“빌어먹을, 그걸 왜 지금 말해! 경찰에 신고는 했어?”
[대표님께서 신고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언론에 나가면 회사에 악영향이 있다고…….]
“하. x발.”
경준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저절로 기어나왔다.
“경호회사 연락해. 풀 수 있는 인원 다 풀어서 찾아. 내일까지 못 찾으면 경찰에 신고해.”
[예, 이사님!]
전화가 끊겼다. 경준은 액셀을 더 세게 밟으면서 서하에게 말했다.
“들었죠? 우리도 찾으러 가야 합니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방금까지 부풀었던 마음이 그대로 얼어붙어 몸 안에 가득 들어찬 것 같았다.
“조서하 씨, 정신 차려요!”
경준이 소리치는 바람에 서하는 조금 정신을 차렸다.
“찾아요. 찾으러 가야 해.”
“일단 병원 근처부터 뒤져 봅시다. 혹시 누가 보호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가게 하나하나 다 들어가서 수소문해요. 빌딩 계단, 공중화장실, 골목 주차장까지 다 뒤져야 해요. 찾으면 나한테 연락하고.”
경준이 한 손으로 명함을 집어 건넸다. 그것을 챙긴 서하는 병원까지 갈 새도 없이 근처에 내려 닥치는 대로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엄마, 꼭 있어야 해. 내가 왔으니까 금방 찾을 거야. 엄마, 엄마…….”
단 오 분도 쉬지 않고 뛰어다니기를 세 시간. 어느새 해가 어둑하게 떨어지고 바람이 싸늘해졌다. 길에 다니는 사람도 부쩍 적어졌다.
“조서하 씨!”
멀리서 경준이 서하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그 역시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넥타이가 다 풀어지고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류 비서님!”
숨이 턱까지 차서 아팠다. 서하는 가쁜 숨을 헉헉 몰아쉬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환자복 입고 걸어가는 걸 몇 명이 봤대요.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없어요. 어떡해요?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괜찮아요. 환자복에 병원명 있으니까.”
경준이 양손으로 서하의 어깨를 붙잡았다.
“무슨 일 생겼으면 진작 병원으로 연락 왔을 겁니다. 찾을 수 있어요.”
확신에 찬 말투 때문일까. 뜨거운 체온 덕분일까. 지칠 줄도 모르고 뛰던 심장이 조금씩 가라앉고 생각이 돌아왔다.
“…… 어쩌면.”
병원에서 처음 본 엄마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우리 애기 어디 있었어! 엄마가 얼마나 찾았는지 아니? 얼른 가자. 엄마랑 집에 가자, 서하야.’
해선은 서하를 찾고 있었다. 토끼풀을 엮어 팔찌를 만들면서.
머릿속에서 뿌연 수증기가 증발했다. 어릴 때 엄마와 손잡고 걸었던 골목길, 정원의 소나무와 연못, 엄마가 밀어 주던 그네 같은 것들이 선명한 화면으로 드러났다.
서하는 고개를 번쩍 들고 경준의 손을 맞잡았다.
“나, 강 대표님이 갈 만한 곳을 알아요!”
“그게 어딘데?”
“윤서하가 엄마랑 살았던 동네!”
“갑시다.”
경준이 서하의 손을 덥석 잡고 차를 향해 달렸다. 꽉 잡은 두 손 안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땀이 축축하게 섞였다.
“비켜요. 내가 지름길을 알아!”
서하는 운전석 문을 연 경준을 밀쳐내고 운전대를 잡았다. 곧 세단이 서킷 올라간 스포츠카처럼 마구 질주하기 시작했다.
“미쳤어! 강 대표님 찾기 전에 죽고 싶어?”
“꽉 잡기나 해.”
서하는 이를 악물고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태어나서 이렇게 빨리 운전해 본 적이 없었다.
삼십 분 거리를 가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10분. 서하는 소나무와 연못이 있는 자신의 집을 지나 근처 공원 앞에 차를 세웠다.
“여긴……?”
“저기. 토끼풀!”
집에 딸린 정원에는 토끼풀이 없었다. 그래서 엄마는 늘 이 공원에 서하를 데리고 나와 토끼풀로 팔찌며 반지며, 화관 같은 걸 엮어 주곤 했다.
서하는 순식간에 공원을 가로질러 가장 구석에 있는 화단 안으로 뛰어들었다.
“엄마! 엄마, 거기 있어? 엄마!”
가로등 불빛도 닿지 않아 어두컴컴한 화단 구석에서, 쪼그리고 앉아 있던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서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