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집에 가자,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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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집에 가자,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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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집에 가자, 엄마
2022.07.09.
“엄마.”
서하는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가누고 해선에게 다가갔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 엄마, 꼴이 이게 뭐야. 안 다쳤어? 배 안 고파?”
머리는 까치집에 새하얀 환자복은 흙투성이였다. 오다가 넘어졌는지, 무릎에 얼룩까지 묻어 있었다.
“서하야. 이것 봐라. 엄마가 서하 주려고 만들었어.”
해선이 양손에 시든 토끼풀 더미를 가득 들고 환히 웃었다.
아니다. 토끼풀 더미가 아니라 서하에게 줄 선물이었다. 온 공원의 토끼풀 꽃이란 꽃은 다 모아서 엮은 듯한 화관, 팔찌, 반지, 목걸이…….
서하는 풀 위에 주저앉았다. 턱도 없이 작은 화관을 쓰고 손목에 팔찌를 감았다. 다 시들어 흐물흐물해진 반지도 손가락에 끼웠다.
“너무 예쁘다. 꼭 공주님 같네, 엄마 아기.”
해선이 활짝 웃으면서 서하의 뺨을 어루만졌다. 왈칵 터진 눈물이 해선의 손바닥을 적시고 손목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보고 싶었어. 엄마. 진짜로.”
“아이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해선이 화들짝 주위를 둘러보았다. 해가 진 지 벌써 오래인데 이제야 주변이 어두운 걸 깨달은 듯했다.
“얼른 가자. 엄마가 맛있는 저녁 해줄게.”
서하는 해선의 손을 꼭 잡고 화단 밖으로 나왔다. 저만치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경준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뛰어왔다.
“강 대표님!”
가로등 불빛이 바로 앞까지 달려온 경준의 얼굴을 비췄다.
“괜찮으십니까?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는 진심으로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행여 무슨 일이 있었을까 걱정했던 흔적이 그대로 보였다.
왜일까. 어차피 스파이인 당신이 왜 이렇게 우리 엄마를 걱정하고, 회사와 내 디자인을 지켜 주는 걸까.
“그쪽은 처음 보네요. 누구지?”
“…… 류경준입니다, 대표님. 새로 비서실에 들어왔습니다.”
정작 엄마는 당신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데.
서하는 해선의 손을 더욱 꼬옥 잡았다. 그제야 경준의 시선이 서하를 아래위로 훑었다.
“그건 뭡니까?”
지금 모습이 아주 웃길 거라는 걸 서하도 안다. 더러워진 옷과 헝클어진 머리에 턱없이 작은 화관, 너덜너덜한 꽃 팔찌, 다 시들어 흐물거리는 꽃반지.
서하는 그 꼴을 하고 활짝 웃었다.
“서하 어머니가 만들어 주셨어요.”
경준이 의미 모를 눈빛으로 서하와 해선을 번갈아 보다가 서하의 머리에 손을 뻗었다. 원래 작은 화관은 유난히 커다란 그의 손에 올라가자 더욱 작아 보였다.
“이거, 매일 윤서하 줄 거라고 만드셨는데.”
“윤서하인 줄 아셨나 봐요. 같은 서하니까.”
“그런데 얼굴은 왜 그 모양이지?”
눈물범벅인 얼굴을 해선이 흙 묻은 손으로 만졌으니 당연히 엉망일 거다. 하지만 그런 건 전혀 상관없었다. 서하는 손등으로 대충 얼굴을 훔쳐냈다.
“괜찮아요. 강 대표님 찾았으니까 이제…….”
병원에 연락해요, 하고 말하려던 입이 갑자기 다물어졌다.
이승오, 이지수.
해선이 사라지면 모든 재산은 식물인간인 윤서하에게 상속되고, 자연히 이승오의 것이 된다.
집과 회사를 차지하려고 청부 살인까지 시도한 이승오가 그 재산을 노리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나?
경준이 핸드폰을 꺼냈다. 멍하니 있던 서하는 그가 통과 버튼을 누르기 직전, 소스라쳐선 덥석 핸드폰을 빼앗았다.
“안 돼요!”
“뭐 하는 겁니까?”
경준의 미간이 좁아졌다. 서하는 진짜 이 사람을 믿어도 되나, 잠깐 고민했다. 그리고 믿든 못 믿든 지금은 류경준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까 강 대표님 처음 없어졌을 때, 뭐라고 전화 왔어요? 어쩌다 사라지셨냐고요.”
“이지수가 모시고 산책갔다가.”
여기까지 말한 경준도 뭔가 이상한 걸 눈치챈 듯했다. 서하는 해선의 손을 고쳐 쥐고 열심히 말했다.
“대표님이 잘못되면 남은 재산과 지분은 전부 윤서하한테 가요. 그런데 윤서하는 지금 식물인간이고, 남편은 이승오예요. 이지수는 이승오의 애인이죠.”
“…….”
“오늘 일은 사고였다고 쳐요. 그런데 또 이런 사고가 없을 거란 보장이 있나요? 애초에 왜 대표님이 사라진 지 한참이나 지난 후에 이사님한테 연락했을까요? 화장실 간 사이에 사람이 없어졌으면, 길어 봐야 일이십 분 안에 알았을 텐데.”
서하는 핸드폰을 경준에게 돌려주었다. 잠시 꺼진 화면을 내려다보던 경준은 핸드폰을 도로 안주머니에 넣었다.
“병원에 경호 인력과 전담 간병인을 늘릴 수 있습니다.”
“이승오가 퇴원시켜서 집에 모셔갈 수도 있어요. 그러면 완전히 사각지대에 놓이는 거죠.”
평생 가족의 시중을 들어 준 옥순조차 이승오와 똑같은 인간이었다. 옥순이 차지해 버린 그 집은 이제 서하와 엄마의 궁전이 아니었다.
“당신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경준이 재킷을 벗어 해선의 어깨 위에 걸쳐 주었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 안전한 곳이 없어. 내가 모셔가고 싶지만, 그럴 상황이 안 돼.”
그 답은 이미 서하가 알고 있었다.
“내가 모셔갈게요. 작지만 방이 하나 있어요. 설마 아무 관계도 없는 우리 집에 대표님이 계실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요?”
“내가 당신 뭘 믿고 대표님을 맡기지?”
경준의 시선에 경계의 빛이 잔뜩 어렸다.
“지금까지 같이 뛰어다녀 놓고 무슨 소리예요? 그리고, 내가 대표님 어떻게 해서 무슨 이득이 있어요?”
“환경 말이야. 대표님 식사도 제대로 챙겨야 하고, 전문 케어도 필요해. 그런데 당신은 찢어지게 가난하잖아.”
“난 또 뭐라고.”
서하는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카드. 용돈 많이 받으시잖아요.”
***
“꺙! 앙앙앙!”
개조심 대문에 접근하기도 전에 민지 짖는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서하는 해선의 손을 경준에게 넘겨 주고 대문을 열었다.
“꺙!”
“김민지, 이리 와.”
“꺙.”
치와와가 짤막한 꼬리를 흔들면서 서하에게 안겼다. 뒤이어 재욱이 머리를 긁으면서 나타났다.
“시간이 몇 신데 이제 들어와? 아주 겁을 상실……!”
“또 뵙습니다.”
해선과 함께 들어온 경준이 고개를 약간 숙이자 재욱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구겨졌다.
“조서하, 이 사람은 뭔데 자꾸 데려와? 옆에 아줌마는 뭐고?”
“아줌마?”
서하와 경준이 동시에 재욱을 노려보았다. 영문 모르는 재욱은 움찔해서 급히 말을 바꿨다.
“아니, 아주머니……. 사모님은 처음 뵙는데. 그리고 아파 보이기도 하고…….”
“오늘부터 옥탑방에서 저랑 같이 지낼 분이세요. 임대인께선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계약서 조항 중에 동거인 금지는 없죠?”
“없긴 한데.”
“그럼 됐어요. 저랑 절친한 분인데 사정이 있어서 잠깐 모시는 거니까, 임대인님도 오며 가며 신경 좀 써주세요. 감사합니다!”
서하는 얼른 해선의 손을 끌고 계단으로 올라갔다. 그 뒤를 경준이 따르면서 재욱에게 툭 던지듯 말했다.
“그럼 실례.”
“당신은 왜 올라가?”
경준은 그 물음을 무시했다.
옥탑방은 아침에 허둥지둥 나오느라 조금 어질러져 있었다. 솔직히 표현하자면, 개판이었다.
윤서하 같았으면 보자마자 뒷걸음질로 나왔겠지만, 조서하는 불편과 지저분함에 충분한 면역이 있었다.
“들어오세요. 발 조심하시고요. 류 비서님은 왜 따라 들어오세요?”
서하가 바닥에 널린 옷을 발로 쓱쓱 밀어 놓으면서 물었다. 경준의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대표님 지낼 곳 체크하려고.”
“여기서 지내실 거예요.”
조서하의 외할머니가 사용했다던 방이었다. 침대도 없이 빨간 반닫이 위에 자주색 꽃무늬 극세사 이불이 차곡차곡 개켜져 있고, 작은 개다리소반과 반짇고리엔 먼지가 소복했다.
“이건 누구 방이지?”
“돌아가신 할머니 방이요. 청소 좀 할 테니까, 대표님 모시고 내 방에 들어가 있어요.”
경준은 떠밀리다시피 서하의 방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어디서 주워 온 것 같은 협탁과 곰인형이 그려진 캐릭터 서랍장이 시선을 빼앗았다. 화장대도 없이 접이식 밥상에 샘플 몇 개와 거울이 올라가 있었다.
“…… 더럽게 가난하네.”
그는 해선을 삐걱대는 침대에 앉도록 하고 자신은 책상 의자에 걸터앉았다.
꼭 이런 방에 엄마와 둘이 살았다. 더럽게 가난하고, 모든 게 끔찍하고, 엄마는 경준을 때렸다.
그래서 여자가 싫었다. 나이가 많든 적든, 얼굴이 예쁘든 못생겼든 그냥 싫었다. 류 회장은 경준의 그런 점을 높이 샀다. 고평가했다는 게 아니라, ‘쓸모’를 보았다는 거다.
괜하 여자 같은 거 안 달고 다니는 게 좋지. 나중에 비즈니스 결혼할 때 거슬리거든.
하고, 류 회장은 말했다.
“우리 서하, 어디 갔지?”
문득 두리번거리던 해선의 시선이 경준과 마주쳤다. 만약 이 사람의 아들이었다면 옥탑방에서 월세를 살아도 행복했을 것 같았다.
“잘 생긴 청년이네. 혹시 우리 서하 못 봤어요?”
“…….”
구질구질한 옥탑방에, 꽃물 든 환자복을 입고 앉아서도 해선은 고왔다. 늘 딸을 찾아 헤매는 해선 덕분에 경준은 그 시절, 서하가 입었던 옷을 모조리 떠올릴 수 있었다.
“얘가 어디 갔지? 찾으면 나한테 얘기 좀 해 줘요. 키는 요만하고, 눈은 동그랗고 아주 예쁘게 생겼어요. 갈색 체크무늬 원피스 입었고요.”
“예뻤겠네요.”
어릴 때도 생긴 건 예뻤다. 성격이 후져서 그렇지.
“그러엄. 내 보물이니까요. 가만 보자, 지금 시간이 몇 시지? 우리 애 밥 줘야 하는데.”
맞다. 저녁밥.
본인은 제치고서라도, 서하와 해선이 저녁을 안 먹은 채였다. 경준은 서하에게 뭘 배달시킬지 물어보기 위해 방문을 열었다가 멈칫했다.
“조서하 씨?”
손에 걸레를 든 서하가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소리도 없이 눈물만 주룩주룩 흘리면서 보랏빛이 된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었다.
그러곤 뭐라고 중얼거린다. 엄마, 엄마.
“서하야!”
뒤늦게 해선이 나오더니 손으로 서하의 얼굴을 문질렀다.
“왜 울어? 우리 애기, 누가 울렸어? 엄마가 때찌해 줘?”
“…… 엄마.”
들고 있던 걸레가 툭, 떨어졌다. 서하는 그대로 팔을 벌려 해선을 꽉 끌어안았다.
“엄마. 내가 잘못했어. 나 때문이야. 엄마, 나, 나야, 나. 엄마 딸, 서하…….”
엄마 냄새가 물씬 났다. 정원 딸린 이층집이 아니라 이런 옥탑방이라도 엄마가 있으니 궁전 같았다.
내가 이승오랑 결혼만 안 했어도.
엄마는 서하가 선택한 남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승오를 유학까지 보내 주고 사위로 삼았다. 늘 그런 사람이었다. 서하가 무엇을 선택하든 엄마는 지지하고 격려했다.
그런데 결과가 이렇게 됐다. 살지도 죽지도 못하고 반 시체가 되어 숨만 겨우 쉬는 윤서하와, 과거에 갇혀 버린 엄마.
서하는 해선의 어깨에 파묻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경준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눈썹을 찌푸렸다.
“누가 보면 친딸인 줄 알겠네.”
친딸 맞거든, 하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다가 꿀꺽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