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옥탑방의 류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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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옥탑방의 류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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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옥탑방의 류경준
2022.07.13.
“어, 어떡해요, 오빠. 나 때문에…….”
지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해선이 사라진 지 벌써 열두 시간. 찾았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겨, 경찰에는 아직 연락 안 해요?”
“아직은. 며칠 뒤에 실종신고 하자.”
이승오는 고개를 젓곤 소파에 걸터앉았다. 한 시간마다 받는 보고에는 아직 못 찾았다는 소식뿐이었다.
“미안해요. 진짜로, 너무 급해서 화장실 뛰어갔다가 금방 왔는데 없어졌어요.”
웅얼거리는 지수의 머리를 승오가 강아지 다루듯 쓰다듬었다.
“괜찮아, 여보. 차라리 잘됐어.”
“네……?”
승오는 해선의 실종 소식을 듣고도 병원에 가보지도 않았다. 그냥 집에 앉아서 형식적으로 지시하고 보고를 듣는 게 끝이었다. 심지어 기분도 꽤 좋았다.
“이대로 안 돌아와도 좋고. 돌아오면 병원 관리 소홀로 트집 잡고 퇴원시키면 돼. 그다음엔…….”
이승오의 눈동자가 음험하게 빛났다.
“뭐, 그냥 그렇다고. 이제 그만 잘까?”
이승오가 허리를 굽히더니 소파에 앉아 있던 지수를 번쩍 들어 올렸다.
“꺄아앗!”
“우리 여보. 왜 이렇게 가벼워?”
“치이. 내려줘요.”
“침대에 가야 내려주지.”
지수는 까르르 웃으며 이승오의 품에 안긴 채 침실까지 갔다. 몸이 구름 같은 침대 위에 폭 감싸지고, 남편은 다정했다.
아까는 잘못 봤을 거야. 오빠는 그냥 조서하가 너무 거지 같으니까 불쌍해서 일으켜 준 거야. 오빠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나 사랑해요?”
“당연하지. 여보는 내 공주님이잖아.”
지수는 승오의 목에 양팔을 감았다.
“그럼, 조서하 내보내 주세요.”
“회사 일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 여보?”
여전히 부드러운 말투로 이승오가 물었다. 한 번만 더 말하면 또 나가 버릴지 모른다. 지수는 재빨리 다음 말을 덧붙였다.
“아, 아니. 내 말은, 이번 품평회에 내보내라고 해, 했잖아요.”
“그런데?”
“조, 조서하 디자인이 진짜 좋은 거면 품평회에서 성적이 좋을 거예요. 아니면 채택 안 돼서 그냥 묻힐 거고. 안 그래요?”
이승오가 고민하는 듯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지금 다른 디, 디자이너들이 불만이 많아요. 경력도 없는 고졸 인턴을 신입 디자이너로 뽑았다고요. 팀 분위기 생각해서라도, 품평회에서 선택 못 받으면 그냥 자르는 거로 해요. 네?”
항상 실력 운운하면서 조서하를 감쌌으니 실력으로 어필하자는 계산이었다. 과연, 승오는 한참 생각하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품평회에서 단 하나도 채택이 안 되면 내보낼게. 됐지?”
“좋아요!”
품평회에는 각 매장의 매니저, 판매 사원, 회사 임원, MD 등이 참가한다. 샘플을 보고 다음 시즌에 정식으로 출시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여기서 많은 디자인이 채택될수록 디자이너의 위상은 올라가고 적게 채택될수록 쭈그러든다.
분수도 모르고. 이 약아 빠진, 건방진 년.
지수는 모욕적인 말을 잘도 퍼붓던 조서하를 생각하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
“자, 모두 주목!”
한 명도 빠짐없이 출근한 것을 확인한 이지수가 손뼉을 짝짝 쳤다. 디자이너들은 저마다 작업에 집중하다 말고 한꺼번에 고개를 들었다.
“조금 있으면 품평회 시즌이죠? 다들 분발해서 준비하고, 이번에는-.”
지수의 시선이 정확히 서하에게 향했다.
“우리 막내 디자이너도 작품 내보내기로 했어요. 모두 박수!”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고 분위기만 어색해졌다.
이 업계에 들어온 지 일 년이 안 된 막내 디자이너는 보통 품평회에 나가지 않는다.
아직 시장 보는 눈을 키울 때기도 하고, 워낙 준비할 게 많아 선배들의 잔심부름만 다녀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공도, 경력도 없이 인턴으로 겨우 입사했던 조서하를 품평회까지 내보낸다니.
“질문 있습니다.”
정세희가 손을 들었다.
“황주희, 정소연 디자이너도 같이 입사했어요. 그러면 신입이 셋인데 전부 품평회에 나가요?”
“정소연 씨는 신입이어도 경력이 있으니까 나갈 수 있죠. 황주희 씨는 이번에는 배우고, 다음 시즌 디자인 준비할게요. 윗분들 지시라 나도 어쩔 수가 없네요.”
사실 조서하를 내보낼 거면 황주희도 내보낼 수 있다. 법으로 정해진 것도 아니고, 그냥 이 디자인실의 관례일 뿐인데 팀장이 못 내보낼 게 뭐람.
하지만 지수는 그러지 않았다. 그냥 주희를 향해 미안하다는 표정만 지어 보였다. 이 사무실 생활이 조금이라도 더 엿 같으라고.
얄팍하네, 얄팍해.
서하는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그 얄팍한 속셈에 고개를 저었다.
“휴, 잘 됐다.”
그런데 옆에서 조그맣게 안도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살짝 빼서 보니 황주희가 혼자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서하와 눈이 마주치곤 속닥거렸다.
“디자인실에 인원이 많이 없잖아요. 그래서 나도 품평회 나가야 할까 봐 쫄았거든요. 아무것도 모르고 디자인 내보내서 죄다 떨어지면 그게 무슨 망신이에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주희가 몸을 떨었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서하님은 재능이 있으니까 잘할 거예요. 시간 나는 대로 도와줄게요.”
과연 잘할까.
서하는 처음 품평회에 나갔을 때 디자인 여섯 개가 채택되며 슈퍼 루키로 인정받았다. 다음 시즌은 여덟 개, 또 다음 시즌엔 열두 개. 절대 한 시즌에 열 개 이하를 내놓은 적이 없었다.
그 덕분에 사무실의 누구보다 바빴고, 누구보다 많은 인센티브를 받았으며 누구보다 빠르게 진급했다.
그걸 모른다 쳐도 지금 이지수의 표정은 너무 지나치게 자신만만했다. 마치 서하의 디자인이 절대 채택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뭐 믿는 구석 있네.
서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
“그래서. 그렇게 느꼈다고?”
“그렇게 느낀 게 아니라, 그래요. 거기 단무지 좀 주세요.”
짜장면을 돌돌 말아 입에 넣으려던 경준이 경멸의 눈빛으로 서하를 쳐다보았다.
“양심 없나? 이건 내 단무집니다. 조서하 씨는 거기 있는 거 다 먹었잖아.”
“쪼잔하게.”
서하는 투덜거리면서 남은 단무지 두 개 중 하나를 반으로 아삭 쪼개 먹었다.
“엄마 거 먹어, 서하야.”
해선이 제 앞접시에 덜어져 있던 단무지를 모조리 집어 서하의 그릇에 쏙 넣었다.
“역시 엄마가 최고야.”
“대표님이 왜 조서하 씨 엄마예요?”
“저보고 딸이라고 부르니까, 나도 엄마라고 불러야죠. 누가 알아요? 이러다가 기억이 확 돌아올지. 그것보다…….”
서하는 경준을 위아래로 훑었다.
“대체 왜 매일 우리 집에 와서 밥을 먹는 거예요? 벌써 삼 일째에요.”
늘 그렇듯 새하얀 와이셔츠에 수트 차림인 그는 안 어울리게도 평상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짜장면을 먹는 중이었다.
“대표님이 걱정되니까.”
“내가 어련히 알아서 잘 모실까 봐.”
“말했잖아. 난 당신 못 믿어. 윤서하 디자인 훔치려던 사람을 어떻게 믿어?”
“회사 스파이는 뭐 다른가?”
서하는 투덜거리면서 소스가 부어지지 않은 탕수육을 찾아 먹었다.
저 인간은 어찌나 성격이 파탄 났는지, 오늘 탕수육이 오자마자 소스를 위에 부어 버리는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다.
“본론이나 들어갑시다. 이지수가 품평회에 무슨 짓을 할 것 같다고?”
“네. 지난번에 나랑 싸웠잖아요.”
경준은 그날 일을 떠올리고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도대체 이지수한테 뭐라고 한 겁니까?”
“별말 안 했어요. 실력도 없는 첩년이 유부남 애인 빽으로 팀장 달았다던가, 뭐 그런 말밖에.”
“하하하하!”
난데없이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졌다. 서하는 배까지 잡고 웃는 경준을 미친놈 보듯 쳐다봤다.
“뭐가 그렇게 웃겨요?”
“아니. 속이 시원해서.”
경준은 여전히 큭큭거리면서 탕수육을 집어 먹었다.
“그만하면 조서하 씨 자르고 싶어서 안달 날 만하네. 이 회사에서 아무도 그런 식으로 이지수한테 얘기한 사람이 없었거든.”
“그런데 다 알잖아요. 사무실에서 윤서하 얘기 하니까 분위기가 싸해지던데.”
“윤서하 얘기도 했어?”
“신발 바닥 보니까 윤서하라고 쓰여 있길래 누구냐고 물어봤죠.”
“그랬더니?”
“모른대. 신발 사러 간 사람 이름일 거래. 웃기지 않아요? 그 구두, 한정판이라서 딱 본인이 가야 살 수 있는 거였거든. 장인이 직접 사이즈 재서 만들고 밑창에 이름 박아 주는 건데 꾸역꾸역 자기거래.”
“그때부터 찍혔네.”
“메이비.”
인정하긴 싫지만, 서하는 경준과 함께 있는 시간이 편했다.
서하가 아는 중국 음식이란 미슐랭 쉐프가 예약제로 운영하는 중식당에서 한 점 한 점 음미하는 음식이었다. 탄수화물 덩어리인 짜장면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 집 맛있네. 지난번에 먹은 집보다 맛있는 것 같아요.”
그런 서하에게 경준이 시켜 준 음식이 바로 짜장면이었다.
“그런데 탕수육은 저번 그 집이 낫지 않나?”
“모르겠네요. 류 비서님이 소스를 부어 버려서.”
투닥투닥 입씨름하면서도 쉬지 않고 잘 먹는 두 사람을 해선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미소지었다.
“둘이 사이가 참 좋네. 결혼한 지 얼마나 됐어요?”
서하와 경준은 동시에 먹던 걸 멈추고 경멸 가득한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엄마, 나 결혼 안 해. 이 사람이랑은 더욱더, 절대 안 해.”
“누가 할 소릴.”
“네, 다음 트로이 목마.”
“오케이. 다음 디자인 루팡.”
너무 유치해서 누가 들을까 무서운 말싸움도 경준과 함께 있으면 가능했다.
“잘 먹었다.”
경준이 다 먹은 짜장면 그릇을 내려놓곤 입가를 닦았다.
“이제 얘기해 봅시다. 이지수가 품평회에 손을 쓸 것 같다고?”
“그런 애들 수법 내가 잘 알지. 초대장 나가는 매니저, 사원, 엠디 싹 연락 돌려서 로비할 생각일걸요. 사실 로비가 아니라 협박이겠지. 내 거 찍으면 본사에서 불이익 준다고.”
서하는 해선의 빈 그릇을 받아 경준이 놔둔 그릇 위에 포개고 남은 음식물을 한데 모았다. ‘내가 밥 살 테니까 조서하 씨가 치워’라고 한 경준의 말을 착실히 따르는 중이었다.
“조서하 씨가 이승오 구워삶으면 되겠네. 지난번에 보니까 꼬시는 스킬이 보통 아니던데.”
경준이 비아냥거렸다. 서하가 뭔가 맞받아치려는 순간, 해선이 입을 열었다.
“안 돼, 서하야. 승오랑 결혼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