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뛰는 지수 위에 나는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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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뛰는 지수 위에 나는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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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뛰는 지수 위에 나는 서하
2022.07.16.
“……?”
서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해선을 바라보았다. 해선의 눈동자는 여전히 맑고, 조금은 멍하고, 서하를 흔들림 없이 비추고 있었다.
“엄마. 뭐라고 했어?”
“이승오랑 결혼하지 마라.”
해선이 되풀이했다.
“자격지심이 그 애를 좀먹을 거야. 서하야, 엄마가 승오를 아들처럼 키웠지만 진짜 아들은 아니란다. 내 자식은 너 하나뿐이야. 엄마는 너만 행복하면 돼.”
엄마는 항상 서하의 선택을 지지하고 응원했다. 그게 완전히 틀린 선택이라 하더라도. 그 때문에 서하는 오히려 ‘선택’에 있어 더욱 신중한 어른으로 자라났다.
이번에도 알고 있었구나. 그래서 더 많이 지원하고 더 많이 지지해줬구나.
다 먹은 짜장면이 탁 얹혔다.
“조서하 씨.”
갑자기 경준이 부르는 바람에 서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네?”
“윤서하가 깨어나길 바랍니까?”
“…… 왜 그런 걸 물어요?”
“내가 조서하 씨면, 그냥 대표님한테 엄마 엄마 하면서 평생 살고 싶을 것 같거든.”
경준은 다 먹은 그릇을 비닐봉지에 대충 밀어 넣곤 평상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냥 그렇다고. 나는 저렇게 사랑받아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무슨 느낌인지 궁금하긴 해.”
서하는 경준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태양그룹 회장의 숨겨진 아들, 딱 그거 하나뿐.
곱게 자란 것 같진 않았다. 회사에선 늘 딱딱하고 엘리트한 태도를 유지하지만 옥탑방 평상에 앉아 있을 때면 그냥 동네 백수처럼 껄렁하기까지 했다.
지금 손에 냄비를 들고 올라오는 재욱처럼.
“그쪽은 왜 만날 여기 있어요? 집에 안 가요?”
재욱이 험상궂게 말하는 소리 사이로 민지가 꺙꺙 짖어댔다.
“그쪽이야말로 임차인과 임대인 사이의 선을 지켜야겠는데. 계약기간 동안 여기는 임차인이 사용하는 공간이고, 임대인이 허락 없이 들어오면 불법입니다.”
“나는 조서하 할머니 살아계실 때부터 여기까지 올라와서 업고 왔다 갔다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강윤이 와서 법을 따지나?”
재욱이 툴툴거리면서 평상에 냄비를 내려놨다.
“조서하, 내일은 이거 먹어. 어제도 배달, 오늘도 배달. 내가 밥 안 주면 평생 배달만 먹고 살 거야? 너 죽으면 밀린 월세는 누가 줘?”
“월세가 밀렸습니까?”
경준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그는 벌떡 일어나 앉더니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얼맙니까? 이 자리에서 지불하겠습니다.”
재욱은 항상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오늘만큼 얼굴을 구기는 건 처음이었다.
“당신이 뭔데 조서하 월세를 내요?”
“사내 복지. 일정 금액 월세 지원해주거든요.”
물론 그런 복지는 없었다. 있다 해도 고위급 임원이나 메인 디자이너에게 오피스텔을 제공해 주는 정도지, 말단 디자이너 월세까진 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재욱은 당황한 눈치가 역력했다.
“뭐 그런, 아니. 됐습니다. 어차피 받을 생각도 없, 는게 아니라. 젠장!”
혼자 머리를 헝클어뜨린 재욱이 괜히 씩씩댔다.
“됐고, 내일은 밥 먹어. 당신은 짜장면 다 먹었으면 빨리 꺼지, 내려가시고!”
빨리 꺼지라고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서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냄비 뚜껑을 열어 보았다. 방금 끓인 듯 뜨끈한 된장찌개에서 구수한 냄새가 났다.
“맛있겠다.”
“조서하 씨, 저 임차인이랑 결혼할 거예요?”
너무 뜬금없는 말에 서하는 하마터면 뚜껑을 떨어뜨릴 뻔했다.
“무슨 말 하시는 거예요?”
어이없는 와중 자신이 더 어이없다는 듯한 경준의 표정에 더욱더 어이가 없었다.
“둘이 사귀는 사이 아니었어?”
“왜 마음대로 넘겨짚어요?”
“임대인 짝사랑이었네. 사람 좋아 보이는데, 잘 해봐.”
생각도 안 해 봤다. ‘조서하’와 김재욱의 관계.
이상하긴 했다. 왜 사람도 없는 옥탑방을 삼 년이나 비워 놓으면서 조서하를 기다렸으며, 밀린 월세는 왜 독촉 안 하고, 왜 바쁜 와중에 매일 밥을 차려 주나.
다만 말투가 너무 거칠어 그게 조서하를 향한 사랑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것뿐이었다.
원래 늘 저런 말투라고 치면.
서하는 된장찌개 냄비를 내려다보았다. 그냥 고맙게 얻어먹었던 밥들이 갑자기 부담스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조서하.
그 밤, 당신은 왜 나를 향해 빨간 벽돌을 들어 올렸을까. 왜 하필 우리의 몸이 바뀌었을까.
당신은……. 지금 윤서하의 몸에 갇혀 있을까.
“다 드셨으면 가세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안 그래도 가려고 했거든.”
서하가 쫓아내려고 시도하자 경준은 투덜거리면서 해선과 눈높이를 맞췄다.
“대표님. 그만 퇴근해 보겠습니다.”
기억 속에 갇힌 해선에게 매일같이 자신을 소개하고 돌아갈 때면 퇴근하겠다고 보고한다.
이제 해선이 고개를 갸웃하며 ‘누구지? 우리 신입인가?’라고 물어볼 차례였는데.
“고생했어요, 류 비서. 내일 봐요.”
경준의 눈이 커졌다. 저렇게 놀랄 수도 있는 사람인 줄 서하는 처음 알았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대표님, 저 누구라고…….”
얼마나 놀랐는지, 경준은 답잖게 말도 잘 못 했다.
“왜 그래요, 류 비서?”
해선이 정확하게 경준을 보면서 물었다. 경준의 표정이 놀라움에서 얼떨떨함으로, 또 기쁨으로 점점 바뀌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대표님, 내일 뵙겠습니다.”
경준이 깍듯한 자세로 해선에게 인사했다.
참 웃긴 상황이었다. 정작 사위는 어떻게든 회사를 먹어서 팔려고 기회를 노리는데, 스파이로 들어온 사람이 저렇게 진심으로 해선을 모시고 있다니.
서하는 내려가는 계단 입구까지 경준을 배웅했다. 언젠가 윤서하로 돌아가게 되면, 고맙다고 꼭 얘기하고 싶었다.
***
디자인실은 늘 바쁘지만, 품평회를 준비할 때는 특히나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디자이너들은 이미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온 상태로 또 야근에 야근을 반복했다.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재봉틀 돌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고 식사는 늘 김밥, 샌드위치, 도시락이었다.
품평회 준비만 해도 바쁜데 막내다. 남들보다 두 배가 아니라 세 배, 네 배로 바쁜 서하는 방금 패턴실에서 받아온 박스를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패턴 왔어요!”
디자이너가 작업지시서를 보내면 패턴실에서 그에 맞게 패턴을 만들어 온다. 그게 있어야만 스케치가 실제 샘플로 탄생하는 것이다.
그렇게 중요한 패턴을 각자 주인이 달려와 찾아갔다. 서하는 다 가져가고 남아 있을 자신의 패턴을 찾기 위해 박스를 들여다보았다.
“어……?”
없었다. 오늘까지는 와야 스케줄이 맞는데.
당황한 서하는 방금 패턴을 가지고 간 디자이너들의 자리를 돌면서 하나하나 확인했다.
“서연 님, 패턴 잠시만 보여주세요! 서연 님, 혹시 패턴…….”
그렇게 한 바퀴 돌고 나서, 마지막이 이지수였다.
“팀장님. 방금 패턴 가져가신 거, 잠시만 봐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왜, 뭐 잘못됐어요?”
이지수가 방글방글 웃으면서 책상에 펼쳐 놓은 패턴을 두드려 보였다. 뭔가 여유 넘치고 승리감을 만끽하는 듯한 그 웃음을 보고 서하는 조용히 생각했다.
또 지랄이네.
“패턴실에서 제 것만 안 와서……. 혹시 섞여서 나갔나 하고요.”
“저런. 나머지는 다 왔고? 패턴실에서 뭔가 착오가 있었나 봐요. 얼른 연락해 봐요.”
짐짓 걱정하는 연기가 팀원들에게도 다 보인다는 건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런 식으로 마음에 안 드는 디자이너들을 하나하나 내보냈구나. 그래서 겨우 삼 년 만에 나와 함께 강윤을 키워낸 디자이너들이 죄다 사라졌구나.
“네……. 알겠습니다.”
서하가 풀죽은 목소리로 인사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이지수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지금 패턴실에 연락해 봤자다. 조서하 이름으로 넘어오는 작업지시서는 받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으니까.
그렇다고 안 그래도 모자란 시간에 수십 벌이나 되는 패턴을 직접 만들었다간 퀄리티는커녕, 품평회까지 완성조차 못 할 게 뻔했다.
내가 실력도 없이 유부남 애인 빽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해? 아니야. 너처럼 말하는 애들 다 쳐내고 자르고 밟아서, 내 힘으로 팀장까지 온 거야.
지수가 지켜보는 동안 서하는 자리로 돌아가 패턴실에 전화를 걸었다. 결과는 예상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똑같이 보냈는데 제 것만 빠졌다니까요. 그런데 안 된다는 게 말이 돼요?”
[안 되는 게 아니라, 일주일 넘게 걸린다고요.]
“그 말이 그 말이잖아요. 지금 바쁜 거 몰라서 그래요?”
[이쪽도 바빠서 그래요. 들어가세요!]
전화가 냉정하게 끊겼다. 한동안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던 서하는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대문 다녀오겠습니다.”
회사보다 더 들락거려야 하는 곳이 동대문이기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서하는 곧 동대문으로 가는 차에 올라탔다. 버스나 지하철은 아니고, 택시는 더더욱 아닌 차에.
“갑자기 뭡니까? 내가 조서하 씨 비서인 줄 알아요?”
경준이 온갖 짜증을 내면서도 방향지시등을 켜고 솜씨 좋게 빈 차선으로 파고들었다.
“회사를 위한 일인데 좀 도와주세요. 제가 대표님 잘 돌봐드리고 있잖아요.”
“…….”
이승오는 아직도 실종 신고를 내지 않았다. 굳이 해선을 찾으려는 마음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그때 서하가 해선을 찾아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서하가 아무 말도 못 하는 경준을 끌고 간 곳은 동대문이었다. 각종 공장이며 디자인실이 발에 채도록 널린 이곳에는 당연히 솜씨 좋은 패턴실도 넘쳤다.
“저기다.”
거미줄처럼 꼬불꼬불 이어진 뒷골목을 돌고 돌아 목적지를 찾아낸 서하가 눈을 빛냈다.
강윤은 동대문에서 처음 시작했다. 회사가 성장해서 사옥을 갖고 전문 패턴사들을 고용하기 전까지, 강윤이 내놓는 모든 제품의 패턴이 바로 이 오래된 패턴실에서 나왔다.
“여긴 뭡니까?”
“이지수 장난질 때문에 회사 패턴실을 못 쓰게 됐거든요. 외주비, 넉넉하게 있죠?”
서하는 경준을 끌고 똑똑, 문을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답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누구슈?”
열린 문틈으로 신경질적으로 마른 인상의 할아버지가 고개를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패턴 좀 부탁드리려고요.”
“우린 바빠서 안 돼. 딴 데 가 보쇼.”
“잠깐만요, 선생님!”
불친절하게 닫히려는 문틈으로 서하가 얼른 발을 집어넣었다.
“아, 바빠서 안 된다니까?”
“내일까지 맞춰주시면, 단가 두 배로 쳐드릴게요.”
“딴 데-.”
“세 배.”
“들어오슈. 커피 한 잔 타드릴까?”
“저야 감사하죠.”
얼른 따라 들어가려는 서하의 어깨를 경준이 턱 잡고 속닥거렸다.
“뭔데 단가를 세 배나 쳐요?”
“모르는 소리 마요. 당일 작업은 원래 더 줘야 하는 거 맞고, 특히 여기 박 명장 할아버지는 철저한 자본주의란 말이에요.”
“명장?”
안에서 박 명장이 빨리 들어오라고 소리쳤다. 서하는 얼른 경준을 끌고 쏙 들어가 문을 닫았다.
이지수는 서하가 패턴을 만들기 위해 울면서 밤을 새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서하는 이 바닥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팀장까지 날아오른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