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한 대 때리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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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한 대 때리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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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한 대 때리고 싶어서
2022.07.20.
“강윤에서 왔다고? 그기는 패턴실이 따로 있는데. 물론 처음 회사 만들 때는 내가 했지만.”
박 명장이 안경 너머로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 왔다.
“네. 꼭 부탁드리고 싶어서 따로 왔어요.”
“입에 발린 말은. 작지나 줘.”
서하는 가져온 작업지시서와 원단 스와치를 박 명장에게 넘겼다. 그것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박 명장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좋구만. 강윤 같은 디자인이야.”
“감사합니다.”
고개를 든 박 명장이 뒷목을 꾹꾹 주물렀다.
“거기 강 대표는 잘 있어? 잘 나가더니 통 연락이 없단 말야. 몇 년 전만 해도 명절마다 선물도 오고 전화도 오고 했는데, 한 삼사 년 해서 뚝 끊겼어. 에잉, 괘씸하기는.”
박 명장은 소식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말을 할까, 말까.
머뭇거리는 서하 대신 경준이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강 대표님께서 삼사 년 전부터 건강이 안 좋으십니다. 곧 나아지실 테지만, 그때까지 어르신 명절은 제가 챙기겠습니다.”
“강 대표가 아파? 어디가?”
박 명장이 안경을 휙 벗으면서 소리 높여 물었다. 괴팍해 보이는 이마에 주름이 선명했다.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좀 있으셨습니다. 조금씩 나아지고 계시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회사는? 그 집 딸내미는 아직 깜냥이 안 될 텐데?”
“따님도, 아프셔서. 지금은 사위가 맡아 보고 있습니다.”
“하이고, 그게 무슨 일인가. 난 그것도 모르고.”
주책이지, 늙으면 죽어야지. 하고, 박 명장이 중얼중얼 자책을 늘어놨다.
서하는 낡고 발 디딜 틈 없는 패턴실을 둘러보았다.
회사가 자리를 잡은 게 벌써 십수 년도 더 전인데, 예전에 함께 일하던 패턴실을 매년 직접 챙겨왔다던 엄마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아까 단가 따따블 얘기는 됐어. 강 대표가 아프다는데 내가 거기서 돈을 더 받으면 쓰나? 내일 이 시간쯤에 와서 찾아가.”
“정말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금세 얼굴이 밝아진 서하가 꾸벅꾸벅 인사했다. 경준도 얼떨결에 옆에서 살짝 허리를 숙였다.
“그럼 가볼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박 명장이 대답도 없이 손을 휘휘 저었다. 서하는 그래도 공손하게 뒷걸음질까지 쳐서 문을 닫곤 룰루랄라 계단을 내려왔다.
“박 명장이라고 했나?”
다시 복잡한 골목을 빙글빙글 돌아 나가는 길에 경준이 불쑥 물었다.
“네. 아마 동대문에서 제일 오래 하셨을걸요. 유명 브랜드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엄청나게 들어왔는데 다 거절하셨어요.”
“잘 아네.”
서하는 살짝 웃어 보이곤 경준의 차 조수석에 올라탔다. 차 안에서는 여전히 비누 냄새가 나고, 스피커에서는 오후 2시에 하는 개그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있잖아요, 류 비서님.”
“예.”
“강 대표님이 돌아오시고 윤서하도 일어나게 되면……. 그땐 어떻게 하실 거예요?”
해선을 그토록 정성껏 돌봐 주고, 윤서하의 디자인은 절대 건드려선 안 된다며 서랍에 넣고 잠가 버리는 사람. 디자이너를 위해 점심을 먹다 말고 뛰어나와 동대문까지 동행해 주는 사람.
중심부가 무너지고 도둑만 남은 강윤을 어떻게든 지키고 운영해 나가는, 태양그룹의 스파이.
경준은 잠시 묵묵히 차를 몰았다. 사거리에 걸린 신호등이 노란불에서 빨간불로, 다시 초록불로 바뀌었다.
“박 명장이라는 사람. 처음 듣습니다.”
이윽고 경준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회사가 선물을 보낸 것도 아니고, 비서도 모른다면 강 대표님이 직접 매년 선물을 챙겨 보낸 거겠지.”
“회사 창립에 도움 주신 분들을 직접 다 챙기셨겠죠.”
“…… 그런 회사지. 강윤은.”
정작 서하의 물음에 대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서하 님, 패턴 받았어요?”
마네킹을 잡고 드레이핑에 여념이 없던 서하에게 세희가 물었다.
“아뇨. 그냥……. 안 그래도 입체 패턴이 많아서 괜찮아요. 제가 하는 게 마음 편해요.”
“잠깐만요. 나 서하 님 디자인이랑 비슷한 패턴 있으니까 꺼내 줄게요. 수정해서 쓰는 게 아무래도 처음부터 만드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이지수 눈치 보느라 얘기 안 해서 그렇지. 사실 디자인실 사람들은 서하를 조금씩 동정했다. 그래서 당연히 넘기곤 했던 잡무도 알아서 나눠 준 덕에 서하는 오히려 일이 훨씬 편해졌다.
“정말요?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오늘 밤새우려고 했는데.”
사실 패턴은 회사 패턴실에서 나온 것보다 훨씬 훌륭하게 완성되어 있었다. 서하는 정말 드레이핑이 필요해서 하고 있던 거고.
하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 서하는 정말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인사하면서 세희에게 패턴을 받았다. 동정에서 비롯된 호의라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였다.
그 호의가 가득 담긴 패턴은 이튿날, 서하가 출근했을 때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 갔지?”
어디 잘못 놔둔 것도 아니다. 누군가 착오로 가져갔나, 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멀리서 이지수가 서하를 힐끔 보았다. 입꼬리에 재밌어 죽겠다는 양 웃음을 걸고서.
사실 그 패턴은 있든 말든 전혀 상관없다. 하지만 정세희가 서하를 위해 일부러 찾아 준 물건이었다. 쓸모를 떠나서 그 호의를 이지수가 고작 개인적 원한으로 없애 버렸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이지수가 매우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 든 파우치로 미루어 화장실에 가는 것 같았다. 서하는 잠시 틈을 두고 자연스럽게 화장실로 따라갔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화장실 여섯 칸 중 다섯 칸이 비어 있다. 서하는 조용히 출입문을 잠그고 수도꼭지 두 개를 전부 열었다. 쏴아아, 물 쏟아지는 소리에 바깥의 소음이 가려졌다.
-달칵.
문을 열고 나온 이지수가 세면대에 기대어 선 서하를 보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조서하 씨?”
“너지?”
서하는 팔짱을 풀고 이지수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뭐 말이야?”
“책상에 있던 패턴. 네가 훔쳤잖아.”
“왜? 어디 있는지 알고 싶어서? 그러게 간수 좀 잘하지 그랬어.”
“이런 식으로 방해해서 내가 품평회까지 샘플 완성 못 하게 하려는 거지?”
“당연한 걸 뭘 물어? 배운 것도 없는 거지새끼가 디자인실 물 흐리는 걸 내가 보고만 있으라고?”
지수가 킬킬거렸다. 좋다고 웃는 꼴을 보니 한 대 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래서 쳤다.
있는 힘껏,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퍽, 하고.
“……?”
내가 맞은 건가, 하고 뒤통수를 문지른 이지수의 눈이 순간 뒤집혔다.
“야, 조서하!”
마주 힘껏 휘두르려는 이지수의 손을 서하가 공중에서 턱 낚아챘다.
“이거 놔! 안 놔! 야!”
“우리 지수. 진짜 금족같은 새끼네.”
“너,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어? 당장 경찰에 신고할 거야. 너 이제 끝이야!”
“해 봐, 어디. 신입 디자이너가 화장실에서 팀장 대가리 후려쳤다고 하면 잘도 믿겠다. 그치?”
서하는 뺨을 향해 날아오는 이지수의 다른 쪽 손목도 턱 잡고 낮게 경고했다.
“난 절대 안 참아. 이지수, 네가 계속 지랄하면 나도 더 지랄할 수밖에 없어. 내가 어디까지 지랄할 수 있는지 궁금하면 더 해 봐. 실력도 없는 주제에 어디서 금족같은 짓만 배워서는. 확 그냥 우체국 1호 상자에 담아서 은영 선생님한테 퀵으로 쏴버릴까보다.”
거침없이 내뱉은 서하가 잡았던 손목을 팩 던지곤 화장실 문을 열었다. 쫓아가 머리채라도 잡고 싶지만 이미 활짝 열린 문밖 복도에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저, 미친, 썅…….”
태어나서 본 미친년 중에 최고였다. 가슴 아래가 부글부글 끓어 화병이 날 것 같았다.
더 억울한 건 저 어마어마한 미친년이 정상적인 척, 불쌍한 척하면서 여기저기 동정이란 동정은 다 받고 다닌다는 거였다.
***
“수고하셨습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홉 시가 넘어가자 디자이너들이 하나둘 퇴근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모두 나가고 서하와 지수만이 남은 사무실. 지수는 작업하던 샘플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네 가면을 벗겨 줄 거야. 네가 얼마나 독하고 나쁜 년인지, 오빠한테 다 보여 줄 거야.
녹음 기능이 잘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서하 씨. 안 피곤해?”
조서하가 마네킹에 시침핀을 찌르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요.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팀장님.”
먼저 건드리기 전에는 얌전한 척한다 이거지.
“고맙긴. 나 때문에 고생하는데.”
지수는 소리 없이 눈으로만 웃으며 서하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곤 손을 번쩍 쳐들어 서하의 얼굴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짜악!
“어……?”
지수는 얼얼한 한쪽 손을 그대로 든 채 눈을 껌벅였다.
맞으라고 때린 건 아니었다. 당연히 손목을 턱 잡고, 첩년이니 뭐니 지랄을 떨어 달라고 휘두른 손이었는데.
한쪽 뺨에 벌건 손자국을 단 조서하가 이지수를 향해 씨익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때 이지수는 생각했다.
미친년이, 또.
“저한테……. 대체 왜 그러시는 거예요, 팀장님?”
가냘프게 떨리는 조서하의 목소리 위로 저벅, 발소리가 깔렸다.
“뭐 하는 겁니까, 이지수 씨?”
하필이면 류경준 목소리다. 아니, 류경준이어서 나을 수도 있다. 만약 오빠라면 또 이 상황을 내가 뒤집어써야 하잖아.
지수는 될 대로 되라는 생각으로 뒤를 팩 돌아보았다가 움찔 굳었다.
경준의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늘 차갑고, 늘 이지수를 무시하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서늘한 눈은 아니었는데.
“내, 내가 때리려고 한 게 아니고요.”
당당하려 하는데 자꾸만 목이 움츠러들었다. 고양이 앞에 선 쥐, 혹은 상어 앞에 헤엄치는 가다랑어. 지수는 맞은 뺨을 감싼 채 고개만 숙이고 있는 조서하를 다급하게 재촉했다.
“조서하 씨, 말해. 내가 때리려고 한 거 아니라고!”
“방금 이지수 씨가 조서하 씨 때리는 거, 내가 봤는데.”
‘조서하 씨 때리는 거’라고 말하는 순간, 경준의 눈에 섬뜩한 게 일렁였다.
“여기서 시인하든가. 아니면 경찰 부르든가.”
“겨, 경찰요? 왜요?”
“폭행이니까. 회사 내에서 일어난 폭행이라고 그냥 덮고 지나가고, 나는 그런 거 안 합니다.”
너무 억울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도 맞았는데. 내가 먼저 맞았는데. 화장실에서, 저 미친년이 문까지 잠가놓고 내 뒤통수 갈겼는데!
“조서하가 먼저 때렸어요. 오늘 낮에, 화장실에서!”
“조서하 씨. 이지수 씨 폭행했습니까?”
조서하가 힘껏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서워서 대답도 못 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이건 뭐. 중딩 일진도 아니고.”
경준이 아주 작게 하, 헛웃음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