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 그 밤, 조서하는 왜 (33/45)


#33. 그 밤, 조서하는 왜
2022.07.23.


경준은 집에 가고 싶은 티를 팍팍 내는 이승오를 붙잡고 밤늦도록 회의를 이어갔다. 광고 모델도 교체해야 하고, 신상품 출시에 맞춰 홍보 방향도 정해야 했다.

그라고 해서 퇴근하기 싫었을까. 이승오 따위 알아서 가라고 하고, 조서하의 구질구질한 옥탑방에 가서 해선이 잘 있는지 보고, 내친김에 맥주나 한 캔 쭉 들이켜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 회의가 다 끝나고 모두 진이 빠져 있을 즈음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디자인실에 이승오 좀 보내주세요. 이지수 야근 중이니까 데려가자고 하면 될 거예요.]

별거 아닌 부탁이었다. 어차피 일어날 거고, 내려가는 길에 디자인실에 들러 보라고 하면 될 거고.


“이지수 씨, 야근 중일 겁니다. 늦은 김에 데려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승오에게 제의도 했었다. 잠깐 손목시계를 본 이승오가 귀찮은 표정으로 손을 내저어서 그렇지.

그래서 그냥 갈까 했다. 피곤하기도 하고, 이승오도 안 간다고 하고. 뭔가 뒤통수를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면 그냥 그대로 주차장까지 내려갔을 것이다.

괜히 갔지.

경준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을 가로질렀다. 뒤에서 조서하가 종종걸음으로 쫓아와 옷깃을 붙잡았다.


“천천히 좀 가요.”

“타요.”

경준이 차갑게 조수석을 열어 주곤 자신은 운전석에 올라탔다. 서하는 어리둥절해져서 경준의 표정을 살폈다.

분명 평소와 다른 태도였다. 서하를 바로 쳐다보지 않고, 미간에는 보일 듯 말 듯한 주름이 두어 개 잡혀 있다. 다소 거칠게 밟는 액셀 때문에 차가 코너를 돌 때마다 끼익 끽 소리가 났다.


“저기요. 류 비서님.”

불러도 대답이 없다. 서하는 아직 얼얼한 뺨을 문지르다가 차가 잠시 멈췄을 때 다시 말을 걸었다.


“왜 그래요? 화났어요?”

경준이 신호가 바뀌고도 출발하지 않는 앞차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클랙슨을 울렸다.

젠장, 하고. 경준은 하필이면 왼쪽을 맞아 빨갛게 부은 서하의 뺨을 보지 않으려 시선을 꾹 붙잡았다.

당연히 화 안 났다. 조서하가 이지수한테 뺨을 맞든 머리채를 잡히든 전혀 알 바 아니지. 그냥 짜증이 난 거다.


“그러려고 이승오 불렀습니까? 당신 뺨 맞는 거 구경하라고?”

“네. 나 뺨 맞는 거 구경하라고. 지금 좋다고 끼고 사는 그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라고 불렀어요.”

“다른 방법도 충분히 있었잖아.”

“사람은 가장 자극적인 장면에 가장 크게 반응하니까.”

또 윤서하 같았다. 어울리지도 않게 길바닥에서 겨울비를 맞으면서 울먹거리던 윤서하. 다른 여자와 키스하는 남편을 멍한 눈으로 응시하던 윤서하.

시들어 빠진 꽃잎 같은 얼굴에 산소호흡기를 덮고서 죽지 못해 목숨만 이어가는 윤서하. 윤서하. 윤서하.


“고작 그딴 이유 때문에 얼굴을 맞아? 이지수 같은 인간한테?”

“왜 못 맞아? 이승오만 없으면 이지수는 아무것도 아냐. 실력도 없이 빽으로 먹은 팀장 자리 뺏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얄밉기도 하지.

뺨 맞은 것도, 불쌍한 척도 다 연기라는 거 안다. 그래도 뺨 맞은 게 꼴 보기 싫고 눈물 글썽거리는 게 불쌍, 하. 그래. 불쌍했다.

함정을 파둔 조서하의 계획이 성공적이라는 건 알겠다. 당장 자신부터 이지수가 서하의 뺨을 때리는 걸 본 순간, 지금까지보다 더욱 혐오스러워졌으니까.


“…… 그래도 이건 아니지.”

고급 세단과는 어울리지 않는 골목에서 바퀴가 멈췄다. 경준은 차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가려다가 허름한 슈퍼마켓을 발견하고 들어갔다.

언제 들여놨는지도 모를 캔맥주 몇 개와 얼음, 감자칩 두 봉지를 계산대에 올려놓고 카드를 내밀자 주인 할머니가 현금은 없냐고 물었다.


“자.”

경준이 불쑥 내민 비닐봉지를 서하가 얼결에 받곤 물었다.


“이게 다 뭐예요?”

“얼음으로 얼굴 식히고. 속 터지면 맥주 먹고. 감자칩은 안주.”

너무 낡아 종종 깜박거리는 가로등 불빛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서하는 묵직한 비닐봉지를 손에 들고, 경준은 한 손을 주머니에 꽂고 서로를 관찰하듯 물끄러미 응시했다.


 


“…… 이거 알아요?”

몇 초간의 침묵을 서하의 목소리가 깨뜨렸다.


“류 비서님, 진짜 신기한 사람이에요.”

무례한가, 싶은데 아슬아슬하게 선은 안 넘고. 도둑인가, 했더니 회사를 지켜주고. 화는 내는데 얼음은 사주고. 캔맥주까지 넣어 놓고.


“내가 아무리 신기해도 조서하 씨만큼 할까.”

경준은 웃지도 않고 툭 내뱉더니 몸을 돌렸다.


“참, 강 대표님한테 오늘 못 가서 죄송하다고 전해 드려요. 내일 꼭 찾아뵙는다고.”

“오늘은 왜 못 가요?”

“시간이 늦어서.”

경준의 차가 어두운 골목을 천천히 빠져나갔다. 서하는 가만히 서 있다가 비닐봉지를 또 열어 보곤 입맛을 다셨다.


“맛은 있겠네.”

안 그래도 맥주 한 캔이 살짝 생각났는데. 그건 또 어떻게 귀신같이 알고.

서하는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타박타박 계단을 올라갔다.


“꺙! 꺙!”

“조용히 해, 김민지.”

열심히 짖는 민지에게 말을 걸면서 대문을 열자 재욱이 슬리퍼를 끌면서 나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 아주머님 간병인도…….”

말을 잇다 말고, 재욱이 깜짝 놀랄 만큼 큰 소리를 냈다.


“조서하, 너 얼굴 꼴이 이게 뭐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이게 어쩌다 그런 거야? 시X, 민지가 봐도 처맞고 온 건데! 내가 너 빌어먹을 강윤 들어간다고 할 때 알아봤다. 그 회사는 왜 너를 못 죽여서 안달이야?”

재욱이 버럭버럭 성을 내면서 내뱉은 말 중 마지막 부분이 서하의 귀에 딱 꽂혔다.


“강윤이……. 나를 죽여요?”

아차 싶었는지, 재욱이 급히 말을 돌렸다.


“내 말은, 왜 애를 때리냐는 거야! 어느 새끼야? 맨날 오던 그 새끼 아냐?”

“아닌 거 알면서 말 돌리지 마시고요. 방금 무슨 뜻으로 말씀하신 거예요?”

김재욱은 조서하를 오랫동안 가까이서 지켜봐 왔다. 재욱이 아는 조서하의 과거가 진짜 강윤, 그리고 윤서하와 연관이 있다면 몸이 바뀐 이유까지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그냥 해본 말이야. 회사 간다고 나간 애가 처맞고 들어오니까 기가 막혀서!”

“그러면, 이렇게 해요.”

서하는 차분하게 협상을 시도했다.


“나는 얼굴 왜 이렇게 됐는지 설명할게요. 임대인님은 왜 강윤이 나를 못 죽여서 안달인지 말해 주세요. 잊어버렸다고 해도 내 기억이고, 내가 들으면 안 될 이유는 없다고 봐요.”

재욱의 표정이 차게 굳었다. 당황한 듯 흔들리는 시선이 빨갛게 부은 서하의 뺨에 가 닿았다가 사선으로 하릴없이 떨어졌다.


“잃어버려도 네 기억이긴 하지.”

중얼거린 재욱이 시X, 하고 또 제 뒤통수를 긁적였다.


“너, 전에 다니던 공장. 강윤 때문에 짤린 거야.”

서하는 재욱을 향해 눈을 깜박였다. 찬찬히 생각하니 기억났다. 공장에서 경리로 일하다가 해고당했다던가.


“강윤 때문에? 왜요?”

“자세히는 나도 몰라. 강윤 측에서 너를 콕 집어 말하면서 거래를 끊었고, 그것 때문에 공장이 휘청거렸대. 그래서 짤렸는데 재취업이 안 돼서……. 아니, 이제 모른다고!”

재욱이 자기 혼자 말하다가 자기 혼자 버럭 화내더니 거칠게 대문을 걸어 잠갔다.


“빨리 올라가기나 해. 간병인 아줌마 삼십 분 전에 퇴근해서 아주머니 혼자 있으니까!”

“아, 네.”

엄마가 혼자 있다는데 더 캐물을 시간이 없었다. 서하는 서둘러 옥탑방 계단을 올라가면서 방금 재욱에게 들은 이야기를 생각했다.

강윤이 조서하를 콕 집어 얘기하면서 일방적으로 거래를 끊었다고? 그런 일이 가능한가? 잠깐만. 그때 거래가 끊긴 공장이라면…….

대수롭지 않았던 일이었다. 차에 굴러다니던 핑크색 마카롱 반 개에 정신이 팔려서 다른 건 신경도 안 쓰이던 날.


-‘원단 공장 바뀐 거 알지? 샘플 보냈다니까 출근해서 확인해 줘.’


-‘응. 그런데 왜 바꿨어? 전에 거래하던 공장도 나쁘지 않았는데.’

스테디 상품의 원단을 제법 오랫동안 공급한 공장이었다. 당연히 강윤과의 거래에 의존도가 높았고, 앞으로 넘기기 위해 미리 생산한 물량도 있었겠지.

매입처 관리는 이승오의 일이다. 어련히 잘했으리라 생각했다.


-‘공장 규모도 더 크고, 여러모로 마음에 들어서.’

새로운 공장이 마음에 들었다면. 전에 거래하던 공장에선 뭐가 마음에 안 들었단 걸까?

제품 자체는 새로운 공장이 낫긴 했다. 미세하게 좋긴 하지만 굳이 번거롭게 바꿔야 하나, 싶을 정도.

어쨌든 아주아주 조금 더 괜찮은 건 사실이고 기존 공장은 규모가 작아 불편한 부분도 있었기에 그냥 컨펌했었다.

서하는 옥탑방 문 앞에 섰다. 벽에 기대어 세워져 있던, 어느 학교 동문회라고 적힌 낡고 커다란 거울에 이젠 익숙해진 조서하의 얼굴이 비쳤다.


“당신이었구나. 그 공장 경리.”

서하의 손가락이 거울을 짚었다. 차고 딱딱한 감촉 너머에서 조서하가 옅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간 옥탑방에서는 해선이 벌써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낡은 여닫이장과 반짇고리, 액자 여러 개에 둘러싸여서.

모두 조서하의 외할머니가 사용하던 물건이었다.

잠든 엄마의 숨소리를 확인한 서하는 조용히 일어서다 말고 벽에 걸린 액자를 쳐다보았다. 아직 어린 조서하와 이미 늙어 버린 할머니가 서로를 의지하고 서서 이쪽을 향해 환히 웃고 있었다.


“단둘이 살면서……. 할머니 병원비로 돈을 다 썼어. 해고당했고…….”

-‘내가 뒤늦게 알고 병원에 모셔갔지. 그런데 합병증이 너무 심해서 손을 쓰기엔 늦었어.’

아.

기억났다.

바람에 나부끼던 머리카락. 빛이 꺼진 눈동자. 마른 손에 꽉 쥐고 있던 벽돌.


“내가 아니야.”

선팅이 짙어 안이 잘 보이지 않는 그 차는 바로 그날 아침까지 이승오가 타고 다녔다. 이승오는 그 작은 공장과 거래를 끊을 권한이 있었고, 그걸 실행했다.


“이승오를 죽이려고 했구나.”

뭔가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일렁거렸다.

이승오 때문에 공장은 거래처를 잃었고, 막대한 손해를 본 후 조서하를 해고했다.

조서하는 할머니의 병원비를 대기 힘들어졌고, 결국 유일한 가족이던 할머니를 잃은 후 벽돌을 들고 이승오를 찾아왔다가 트럭에 치였다.

여기서 가정은 벽을 만났다. 이승오가 정말 조서하를 해고당하게 했다면, 왜 다시 만났을 때 전혀 못 알아본 거지?

서하는 밖으로 나와 평상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경준이 준 비닐봉지에서 캔맥주를 하나 꺼내 따서는 한 모금 마시고 부은 뺨에 갖다 댔다. 시원한 습기가 화끈거리는 뺨을 가라앉혀 주었다.


“어쩌면, 조서하.”

꿀꺽, 꿀꺽.

목젖이 아리도록 차가운 캔맥주가 식도를 타고 쭈욱 내려갔다.


“네 원한이 나를 너로 만든 걸지도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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