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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삼자대면 (34/45)


#34. 삼자대면
2022.07.27.



“류 비서한테 얘기 들었어.”

거울 앞에 선 이승오가 건조하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는 태도였다.


“오, 오빠. 류 비서가 오해한 거예요.”

“오해라기엔 너무 정확하게 봤다는데. 조서하 때리는 거.”

지수는 멈칫했다가 다시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이승오가 입은 새하얀 셔츠 깃에 넥타이 매듭이 완벽하게 채워졌다.


“커프스.”

당연하게 내민 이승오의 손목에는 미리 골라 둔 커프스가 채워졌다.


“조서하가 머, 먼저 때렸다고요. 오빠, 내, 내 말 안 믿어요?”

“내가 믿고 말고 문제가 아니야. 여보 말대로 조서하가 화장실에서 여보를 때렸다 치자. 본 사람 있어? CCTV 있어? 하다못해 그렇게 말해서 사람들이 믿을 가능성이라도 있어?”

“…….”

“형식상이라도 삼자대면 해야 해. 나 먼저 출근할 테니까, 나중에 회사 오자마자 대표실로 올라와.”

이승오는 지수가 걸쳐 준 재킷을 입고 먼저 현관문을 나가 버렸다.


“…… 미친년.”

허공에 대고 욕을 중얼거린 지수는 조금 틈을 두고 나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출근하자마자 사무실도 들르기 싫어 그대로 대표실로 올라갔다.

책상에 놓인 사진 두 장이 지수를 맞았다. 사진 속 조서하의 얼굴에는 빨갛게 찍힌 손자국이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사진까지 있으니까 진짜 어쩔 수 없어.”

이승오가 피곤한 듯 눈가를 문지르곤 바깥을 향해 목소리를 약간 높였다.


“류 비서, 데려와요.”

문이 소리 없이 열리더니 류경준이 들어섰다. 씹어 죽여도 시원찮은 조서하를 데리고서.


“안녕……. 하세요, 대표님.”

한 손으로 뺨을 가린 채 소심하게 인사한 조서하가 지수를 보더니 화들짝 고개를 수그렸다. 그 연기가 어찌나 자연스럽고 가증스러운지, 지수는 입술까지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이리 와 봐요.”

이승오의 손짓에 조서하가 주춤주춤 책상으로 다가갔다.


“손 떼 봐요.”

조서하는 이승오를 보았다가, 지수를 힐끔 곁눈질했다가, 마지막으로 허락을 구하듯 류경준을 쳐다보고선 조심스럽게 손을 치웠다. 조금 부은 뺨과 옅은 손톱자국이 드러났다.


“쯧.”

못마땅하게 혀를 찬 이승오가 지수에게 이것 보라는 듯 눈짓했다.


“이지수 팀장. 할 말 있어요?”

할 말이라면 충분히 했다. 지수는 말을 해도 안 통하는데 말해보라는 이승오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삼자대면 끝난 거로 하고. 인사과에서 결정할 테니 다들 나가 보세요. 참, 조서하 씨는 좀 남고.”

경준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가 금방 본래의 무표정을 되찾았다.

서하는 고개를 수그린 채 서서 바닥 타일 무늬를 세었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그녀를 노려보는 이지수의 시선이 따끔따끔 등을 찔렀다.

탁.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이승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참, 세게도 때렸네.”

“이제 괜찮아요.”

둘만 있는 이 공간이 소름 끼치게 싫었다. 평생 휴식이고 설렘이었던 사람이 이렇게까지 끔찍해질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이렇게 끔찍한 인간을 휴식이고 설렘으로 여길 수 있었을까.


“왜 때렸대요? 이유는? 그냥 다짜고짜 와서 때리진 않았을 거 아냐.”

“잘 모르겠어요. 그냥, 그 일……. 때문인가, 싶고.”

“그 일?”

일, 일이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이승오는 조서하의 원한이고, 윤서하의 원한이었다. 서하는 최대한 불쌍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준비된 시나리오를 조그맣게 읊었다.


“품평회 준비하면서, 패턴실에서 제 것만 누락됐더라고요. 연락해도 스케줄이 다 찼다고 안 된다고 해서, 동대문 가서 개인적으로 패턴 만들어 왔어요. 어제 제가 그 패턴으로 샘플 제작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와서 때리셨으니까……. 개인적으로 패턴 만들어 온 게, 마음에 안 드셨나 봐요.”

“너무 어이없는 이유긴 한데. 그럴 수도 있겠다 싶네.”

아마 이승오는 알았을 거다. 왜 서하의 패턴만 오지 않았는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이승오가 서하의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진심으로 놀란 서하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치다가 소파 팔걸이에 다리를 부딪혔다.


“어……!”

몸이 뒤로 휘청 넘어가려는 순간, 이승오의 팔이 허리를 강하게 감쌌다. 덕분에 넘어지진 않았다. 그냥 넘어지는 게 나을 것 같긴 하지만.


“가, 감사합니다.”

서하는 어색하게 인사하며 이승오를 밀어내려 몸을 틀었다. 하지만 이 미친놈은 손을 풀지 않았다.


“아직도 좀 부었네.”

이승오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아주 오래전, 소나무 아래에서 첫 키스를 했던 그 밤처럼.

하지만 느낌은 그때와 너무 달랐다.

쓰레기 같은 새끼야. 이거 성추행이야. 사내 성추행이라고, 개새x야!

서하의 손이 본능적으로 옆을 더듬었다. 차가운 테이블 위에서 무언가 길쭉한 게 만져졌다. 꽃병이었다.

이제 한 뼘 거리까지 다가온 이승오의 얼굴 위에 류경준이 겹쳐졌다. 눈썹을 약간 찌푸리고, 건방진 표정으로 서하를 바라보는 류경준.

제발. 밖에 있어 줘.

서하는 있는 힘껏 손을 휘둘러 꽃병을 쓰러뜨렸다.

-쨍그랑!

꽃병이 바닥에 던져져 산산조각 났다. 거의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쾅 열렸다.


“무슨 일……!”

적막이 흘렀다. 차가운 눈동자가 서하의 얼굴, 허리를 감은 이승오의 손,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꽃병을 차례차례 훑었다.

서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힘껏 이승오를 밀쳐냈다.


“실례했습니다. 잡아주셔서 감사해요, 대표님.”

위기를 넘긴 서하가 얼른 꾸벅 인사하고 다다다다 뛰어 경준을 지나쳐 나갔다. 잠시 가만히 서 있던 그는 조서하가 사라진 복도 쪽을 흘깃 보곤 손만 뻗어 탁, 문을 닫았다.


“타이밍이 안 좋았군요. 아니, 좋았던 건가?”

전혀 크지 않은 목소리에 나직한 어조. 그런데도 경준이 입을 열자 묘한 압박감이 이승오를 내리눌렀다.


“무슨 오해를 하는진 알겠는데, 별거 아닙니다. 조서하 씨가 넘어질 뻔한 걸 잡아준 것뿐이에요.”

“넘어질 뻔한 걸, 잡아 줬다.”

경준이 낮게 반복했다. 태연한 척 어깨를 으쓱해 보인 이승오는 흩어진 꽃병 조각을 대충 발로 쓱쓱 문질러 모았다.

콰득.

멀리 튕겨 나가 있던 꽃병 조각이 경준의 구둣발 아래에서 과자처럼 으스러졌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믿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대표님의 여자 관계가 그렇게 좋은 평판을 받고 있지는 않다는 걸 상기시켜드려야겠군요.”

“그러니까, 저는-.”

“장모님인 강 대표님이 실종됐고, 아내인 윤서하 씨는 산소호흡기 달고 있다는 것도 기억하셔야 할 겁니다. 평판이라는 게 그렇게 단편적 문제가 아니거든요.”

경준이 고개를 아주 무성의하게 까딱해 보이곤 몸을 돌렸다. 혼자 남은 이승오는 흩어진 꽃잎과 꽃병 조각을 바라보다가 씨x, 하고 발뒤꿈치로 꽃잎을 짓밟았다.


“건방진 새끼. 지가 뭔데 남의 연애 사업까지 참견이야? 이때까진 별로 신경도 안 썼…….”

잠깐만.

이승오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까지 류경준은 정말 승오의 연애에 신경을 안 썼다. 룸살롱 가서 여자 끼고 밤새 술을 마시든, 비서실 말단 직원을 건드리든.

무심하게 넘겼던 점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하필이면 조서하에게 자신의 사무실을 쓰라고 내준 일.

이지수라면 경멸하던 경준이 갑자기 어제 디자인실에 내려가서 데려가라고 한 일. 방금 그를 바라보던 차가운 눈빛까지.


“재밌네.”

이승오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비틀렸다.


“윤서하에, 조서하까지.”

경준의 핸드폰은 아직도 서류 봉투에 담긴 채 서랍 깊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쯤 되면 서하 컬렉션이라도 만드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서하 컬렉션이라.”

문득 떠오른 기억에 이승오는 피식 웃었다가 또 씨x, 하고 담배를 물었다.


 

***



“처분 결정 났습니다. 내일 공지 올라가니까 그냥 알아 둬요.”

해선을 보러 온 경준이 딱딱하게 말했다.

꽃병이 깨진 날부터 벌써 일주일째. 그는 옥탑방에서 저녁을 먹거나 평상에 퍼질러 앉아 노닥거리는 일을 완전히 그만두었다. 서하는 그게 괜히 신경 쓰였다.


“어떻게 났어요?”

“감봉 6개월에 정직 2개월.”

누구는 과하다 하겠고, 누구는 모자란다고 하겠다. 그 와중 2개월 정직이라는 부분이 서하의 마음에 쏙 들었다.


“딱 좋네. 고마워요, 류 비서님.”

밝게 웃는 서하를 경준이 잠깐 쳐다보곤 해선에게 허리를 숙였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대표님.”

“그래요. 수고했어요.”

무표정하던 경준의 입매가 살짝 휘어졌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고개를 들고 옥탑방에서 나왔다. 먼지 하나 없이 말끔한 구두가 마당의 평상을 지나 회색 시멘트 계단으로 한 칸 내려섰을 때였다.


“류 비서님.”

어느새 따라 나온 서하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맥주 한 잔 먹고 가요.”

경준은 찌푸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입니까? 조서하 씨랑 시시덕거리면서 맥주나 마시게.”

“나도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녜요. 그래도 류 비서님이랑 시시덕거리면서 맥주 한잔할 시간은 있고요.”

“그 시간에 혼자 시시덕거리면서 맥주 마시면 되겠네.”

“청승맞잖아.”

청승맞든 구질구질하든, 당연히 그냥 놔두고 갈 생각이었다. 당연히.

…… 그런데 왜 내가 또 여기 앉아 있는 거지.

경준은 일단 손에 쥐어진 캔맥주를 땄다.

-치익.

거품이 넘쳐 손 위로 흘러내렸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려 거품을 입술 안으로 삼키곤 캔맥주를 한 모금 꿀꺽 마셨다. 굵은 탄산이 식도를 긁으면서 내려가는 느낌이 썩 나쁘지 않았다.

휙, 바람이 불었다. 넓게 펼쳐 놓은 감자칩 봉지가 바람을 타고 굴렀다. 당연하게 그것을 잡으려고 뻗은 경준의 손에 감자칩 봉지와 함께 조금 차갑고 보드라운, 조서하의 손가락이 잡혔다.


“앗!”

조서하가 불에 덴 듯 화들짝 손을 떼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더럽긴 하지만.

그리고 경준은 기분 더러운 걸 참는 성격이 아니었다.


“벌레라도 만진 표정이네.”

툭 내뱉은 말에 조서하가 이마를 찡그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냥 놀란 거예요. 벌레였으면 패대기쳤겠지.”

“그렇게 잘 놀랄 거였으면 이승오부터 패대기를 쳤어야지?”

이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경준이 한 템포 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조서하는 이미 아까보다 더 구겨진 얼굴로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설마 그것 때문이에요? 일주일 내내 사람을 소 닭 보듯 했던 게?”

“무슨 말인지.”

“그 날 말이에요. 그 날!”

그 날, 그 장면이 또 기억났다. 뻔뻔하게도 조서하의 허리를 휘감은 이승오와 너무 가까이 있던 두 사람의 얼굴, 깨진 꽃병.


“무슨 헛소리를 합니까? 조서하 씨랑 이승오랑 키스를 하든 쌈바를 추든,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이 말은 정말, 누가 칼 들고 협박하더라도 하면 안 됐다.


“…… 난 이승오 얘기 안 했는데.”

조서하가 피식 코웃음을 쳤다. 경준은 확 달아오른 얼굴을 맥주 탓이라고 하기 위해 손에 든 캔맥주를 벌컥벌컥 반쯤 한 번에 비워 버렸다.


“조서하 씨. 착각이 심한 것 같은데.”

“누가 무슨 착각을 했다고 그래요?”

“…….”

말문이 턱 막혔다. 그답지 않게.

또 바람이 불었다. 휙, 하고.

바람은 차갑고, 얼굴은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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