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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이승오의 거래 제안 (35/45)


#35. 이승오의 거래 제안
2022.07.30.



“화내시는 건 이해해요, 류 비서님.”

조서하가 찬찬히 말을 꺼냈다. 그 말투와 관찰하는 듯한 시선이 묘하게 어울려 시선을 잡아끌었다.


“누가 무슨 화를 냈다고.”

자신 없이 말하는 경준을 서하가 느긋하게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얼마빵?”

“…….”

어디서 짝귀 귀신이라도 붙여 왔나.


“화난 게 아니라 짜증 난 겁니다. 내가 분명히 머저리 꼬실 생각하지 말고 디자인이나 열심히 하라고 했을 텐데.”

“내가 꼬신 거 아녜요. 머저리가 꼬신 거지.”

조서하가 맥주를 두어 모금 꼴깍꼴깍 마시더니 캬, 하고 입가를 훔쳤다.


“뭐, 누가 봐도 오해할 만했어요. 게다가 어쨌든 류 비서님은 강 대표님을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있고, 머저리는 강 대표님의 사위니까. 당연히 화가 나겠죠. 그래도 나한테 화낼 일은 아니다 이거예요.”

그래서 화가 난 건가? 경준은 잠시 서하의 말을 곱씹었다. 분명히 맞는 말인데, 저런 관계 때문에 화가 난 건 아닌 듯했다.

하지만 그냥 그런 거로 치자. 대충, 조서하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뭐.


“꽃병은 일부러 깼어요.”

조서하가 조용히 말했다.


“류 비서님이 밖에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걸 깨면 달려올 거라고 믿었어요. 실제로 와 줬고.”

정말 이상하지. 그 말을 듣자 얼었던 마음이 눈 녹듯 스르르 풀렸다. 애초에 마음이 얼었다는 것도 웃기긴 한데, 어쨌든 그랬다.


“너무 소리가 커서 그냥 열어 본 겁니다.”

“알아요. 그러라고 힘껏 깨뜨렸는걸.”

서하가 다리를 모아 안고는 무릎에 턱을 얹었다.


“앞으로 류 비서님 눈에 거슬릴 일 많을 거예요. 도움받을 일도 많을 거고요. 류 비서님 말곤 나 도와줄 사람 없기도 하고.”

“또 얼마나 거슬리려고 밑밥부터 깔지?”

“참아 주세요. 윤서하를 위해서.”

서하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손을 펴서 내려다보았다.

윤서하의 손은 연필을 너무 많이 쓴 탓에 오른손 중지에 굳은살이 박이고 심지어 옆으로 휘어져 있었다. 가위에 베이고 바늘에 찔리느라 여기저기 흉터도 많았다.

하지만 이 손보다는 생기가 있었다. 별 상처도, 굳은살도 없건만 조서하의 손은 뭔가 푸석하고 수분이 부족했다.


“난 윤서하가 돌아올 거라고 믿어요.”

서하의 중얼거림은 경준에게 하는 말이자,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나는 윤서하의 회사를 지킬 거예요. 수단과 방법 같은 건 안 가려. 뻔뻔하게 붙어먹던 벌레 두 마리가 서로 물고 뜯는 꼴을 봐야겠어.”

 

 

***



“들었어? 디자인실 팀장 징계 먹은 거?”

“징계? 왜?”

“이번에 들어온 막내 디자이너 뺨 때렸다가 걸려서 사내 폭행으로 정직당했대.”

“품평회가 코앞인데……. 그것보다 그 사람, 이승오 대표랑 그렇고 그런 사이잖아? 그런데 징계를 먹어?”

이지수가 팀장이 되면서 기존의 디자이너들이 죄다 못 버티고 퇴사했다는 사실은 다른 부서에서도 유명했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굴어도 징계는커녕 시말서, 반성문 한 장 쓴 적 없는 이지수가 정직까지 당한 일은 자연스럽게 사내 이슈로 떠올랐다.

소문은 구르고 굴렀다. 당사자가 없으니 퍼 나르는 사람들도 거리낌이 없었다.

문제는, 그렇게 구른 소문이 서하까지 엮어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저 사람이지?”

서하는 오늘도 종일 속닥거리는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 망할 몸은 허약해 빠진 주제에 왜 귀만 이렇게 싱싱한지 모를 일이었다.


“어제 회계부 조 대리가 둘이 점심 먹는 거 봤다는데.”

“커피도 마셨다던데?”

“세상에. 이 팀장 없는 사이에 둘이 대놓고 연애하는 거야?”

“사실 이 팀장 눈치 볼 것도 아니지. 대표님 처음부터 유부남이었는데.”

그건 맞지. 이혼 서류 접수하기 전에 사고 났으니까.

이 모든 쑥덕거림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건 쉬웠다. 쑥덕거리는 소문 중에 제대로 된 건 하나도 없긴 하지만 별로 신경 쓸 일도 아니다.

평생 소문에 시달리면서 산 서하에게 저 정도는 뭣도 아니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닌데. 진짜 아닌데.

얘는 왜 이래.

서하는 대표실 의자에 나른하게 앉은 이승오를 바라보면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했다.


“대단한 사람이었네. 조서하 씨.”

딸깍.

딸깍.

이승오가 손에 든 볼펜을 규칙적으로 딸깍거렸다.


“무슨……. 말씀이세요?”

“몰라서 묻는 거야? 아는데 모르는 척하는 거야?”

서하는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저 머저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진짜 모르는 표정이네.”

모르니까. 이 새끼야.

이승오가 천천히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또 허튼짓하러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하는 경계를 세우고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겁먹지 마요. 그러니까 무슨 길고양이 같네.”

차라리 고양이였으면 좋겠다. 확 깨물고 도망가면 이 새끼 패혈증으로 죽지 않을까? 아, 아직 죽으면 안 되지. 내 몸 찾을 때까진 버텨줘야지.

서하는 감정과 이성 사이에서 혼자 싸움하면서 처연하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오늘 부르신 이유를 모르겠어요. 제가 작업이 밀려서, 빨리 말씀해주시면…….”

“한창 바쁜 거 알지. 그럼 용건만 말할까요?”

기껏 물러선 만큼 다가온 이승오가 한 손으로 서하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나, 조서하 씨한테 흥미가 생겼어.”

안다.


“그런데 나 말고도 조서하 씨한테 흥미 가진 사람이 있더라고.”

……그건 모른다.

서하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이승오가 피식 웃었다.


“진짜 몰랐어요? 류 비서 말야.”

뭔가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서하는 이걸 바로잡아야 할지, 바로잡는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지 몰라 그냥 눈만 깜박였다. 뭘 모르겠을 땐 입 다물고 있는 게 최선이니까.


“내가 그래도 류 비서를 오랫동안 봤거든. 그 새……. 아니, 그 인간은 누구한테 그렇게까지 관심 갖는 사람이 아냐. 특히 여자라면 치를 떨어. 지나가던 여자가 연락처만 물어봐도 인상을 팍 쓰는 게, 어디서 여자랑 원수 졌나 싶다니까?”

그래도 몇 년 봤다고 류경준의 인성을 아주 잘 파악한 모양이었다. 서하는 맞다고 고개를 끄덕일 뻔하다가 그렇군요, 하고 말았다.


“그런데 조서하 씨한테는 달라.”

이승오가 음험하게 입꼬리를 휘었다.


“그냥 다른 정도가 아냐. 사랑은 아니겠지, 그래. 하지만 류 비서 기준에 그 정도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서하는 하필이면 포커페이스를 잃고 얼굴을 반쯤 썩은 호박처럼 일그러뜨릴 뻔했다. 그만큼 이승오도 징그러웠지만 이승오가 지금 하는 말은 더 징그러웠다.

사랑? 그 류경준이? 싸가지 없기로는 월드 싸가지 어워드 트로피 감이고, 무례하기로 따지면 도람푸도 울고 갈 류경준이?


“뭔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요.”

“오해인지 아닌지는 모르겠고. 나랑 거래 하나 해요, 조서하 씨.”

이승오는 생각만 해도 재밌다는 듯 키들키들 웃었다.


“거래……요?”

“류 비서랑 연애 좀 해 줘요.”

이번에는 진짜 위험했다. 비명까지 지를 뻔했다. 내가 누구랑 뭘 한다고? 한다 쳐도 네가 왜 그딴 걸 해라마라야?


“엄청나게 당황스러운 표정이네. 당연히 그렇겠지. 조서하 씨는, 나랑 연애하고 싶을 테니까.”

서하는 한 손으로 입을 턱 막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진짜 비명이 터질 것 같았다. 아니면 쌍욕이 터지거나.


“저, 대표님. 대체…….”

제정신이야?

뒷말은 간신히 삼켰다. 이승오가 제정신이 아닌 건 안다. 이혼당해서 개털 되게 생겼다고 아내를 트럭으로 밀어 버린 놈이 제정신이면 그게 더 이상하지.


“그래서 거래라는 거예요. 진짜 연애하라는 게 아니라.”

서하의 표정을 보곤 이승오가 또 웃었다.


“사실 내가 류 비서랑 좀 협상할 게 있거든. 그런데 류 비서가 좀 더 카드가 많다 보니 내가 좀 불리한 참이야. 그러니까 조서하 씨가 접근해서 협상을 좀 유리한 쪽으로 끌어줬으면 좋겠는데.”

‘협상’이라는 건 안 봐도 태양그룹과 강윤의 인수합병일 거다. 그런데 접근해서, 뭘 어떻게 하라고?


“저한테 뭘 기대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전 그냥 디자이너일 뿐이에요. 대표님이랑 거래하고, 류 비서님한테 접근하고, 그런 건 생각도…….”

“내가 이래서 조서하 씨를 좋아해. 자기 주제를 알잖아. 고분고분하고.”

이승오의 주특기가 입으로 똥 싸기라는 걸 왜 평생 몰랐을까. 돌아가신 아빠가 꿈에 나타나 휴지라도 던져 줬으면 좋았을 텐데.


“걱정 마요. 뭘 해야 할지는 내가 다 지시해 줄 테니까. 그리고 거래라고 하면, 조서하 씨도 얻는 게 있어야겠지?”

이젠 입으로 무슨 똥을 쌀지 기대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별모양 똥일까, 하트모양 똥일까.


“전 얻고 싶은 게, 아무것도…….”

“이지수 팀장이 나한테 부탁했거든. 조서하 씨 디자인이 품평회에서 하나도 채택 안 되면 해고해 달라고.”

그럴 줄 알았다. 이 씹다 버린 미더덕 같은 x.


“해, 해고요? 저를 왜요?”

서하는 눈을 울멍울멍 뜨고 이승오를 쳐다보았다.


“나야 모르지. 중요한 건, 이 팀장이 그런 식으로 지목해서 육 개월 이상 버틴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거예요.”

한 식구로 울고 웃으면서 수없이 많은 밤을 함께 지새운 디자이너들이 그런 식으로 쫓겨났다는 생각을 하자 저절로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렇군요.”

“하지만 괜찮아요. 조서하 씨는 내가 지켜줄 수 있으니까.”

사내 괴롭힘, 부당해고 안 하겠단 소리를 저렇게 번드르르 하는 것도 재주였다.


“그게 거래 내용인가요? 저는 류 비서님한테 접근하고, 대표님은 저 해고 안 당하게 해주는 거?”

“그게 끝일 리가 있어요? 내가 조서하 씨한테 흥미 있다고 말한 건 귓등으로 들었나?”

정확했다.


“전 아직, 대표님 뜻을 모르겠어요.”

“그렇게 어리버리한 것도 내 스타일이네.”

이승오가 다시 한번 서하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정수리 끝부터 어깨 아래까지, 천천히.


“류 비서한테 접근해요. 그 대가로, 내가 조서하 씨랑 진짜 연애 해 줄게.”

서하는 또 입을 틀어막았다. 안 그랬다간 이번엔 진짜 쌍욕이 폭포처럼 콸콸 흘러내릴 것 같았다.

그래. 이승오를 꼬셔내서 이지수에게 빅엿을 날릴 생각이긴 했다. 두 사람 사이를 차근차근 파고들어 바닥부터 물어뜯어서 결국엔 와르르 무너뜨릴 거라고.

그동안 윤서하의 몸과 엄마의 정신을 되찾아서 모든 걸 제자리로 돌려놓겠다고.


“대, 대표님은 이지수 팀장님이랑…….”

“뭐 어때요. 결혼한 것도 아닌데.”

이승오가 별것 아니라는 듯 피식 웃었다. 자신이 이미 윤서하와 혼인 상태라는 사실은 전혀, 머리핀에서 떨어진 반짝이 가루 한 톨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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