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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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고백
2022.08.03.
“잘 생각해 봐요. 서하 씨한테 나쁜 조건 절대 아니니까.”
이승오의 뱀 같은 눈초리가 서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싸구려 샴푸 덕에 푸석한 머리카락, 윤기가 없는 피부, 낡은 옷과 옷보다 더 낡은 신발. 그러니까, 가난의 흔적 말이다.
“난 조서하 씨가 평생 걸려도 못 올라갈 곳까지 단숨에 올려줄 수 있는 사람이에요. 일만 잘되면 나는 원하는 걸 얻고, 조서하 씨는 이지수 팀장처럼 신데렐라가 되는 거죠.”
신데렐라는 내가 아니라 너였잖아.
십 년 넘게 남자 신데렐라로 살다가 그 대단한 사랑에 눈깔이 멀고 자격지심에 대가리가 돌아서, 끝내 유리구두로 공주님을 후려치고 궁전에서 끌어내 버렸잖아.
하지만 괜찮아. 이게 네가 스스로 파는 무덤이라면, 함께 삽질을 안 해 줄 이유가 없지.
“그러면…….”
서하가 이윽고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대표님께서, 제 왕자님이 되어 주시는 건가요?”
이승오는 그 호칭이 굉장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입가에 씨익 웃음이 번지고 눈빛에는 근거 모를 자신감이 들어찼다.
“당연하지. 잘 부탁해, 서하 공주님.”
저 단어를 다시 들을 줄이야. 내장에 두드러기가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아녜요, 대표님. 저는 그런 거 필요 없다고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서하는 단호한 태도로 고개를 들어 이승오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무슨 말이지? 내 제안을 거절하겠다, 이거예요?”
“대표님은 저를 입사시켜 주셨고, 인턴에서 디자이너로 만들어 주셨어요. 그러니까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저는 대표님을 도와드릴게요. 하지만 대가로 받는 연애는 필요 없어요.”
이승오에겐 왕자님 콤플렉스가 있다. 동시에 쉽게 손에 쥐어진 여자에겐 쉽게 흥미를 잃기도 한다. 서하는 이 두 가지를 절대 잊지 않았다.
“대가가 필요 없다고?”
“그런 연애는 바라지 않거든요. 다른 건 지시하신 대로 할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한 걸음 물러난 서하는 허리를 깊이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렇게 알고 이만 내려가 보겠습니다. 앞으로 매일 두 번씩 보고 올릴게요.”
이승오는 서하가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얼떨떨하게 지켜보았다. 어이없는 와중, 눈빛에는 아까보다 한층 더 깊은 흥미가 깃들어 있었다.
***
서하는 점심으로 다 식은 김밥을 간신히 주워 먹어 가며 막바지 작업에 매달렸다.
다른 디자이너들처럼 회사에 밤새도록 남아 작업할 수 없으니,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빨리 끝내고 집에서 가능한 작업은 죄다 싸 들고 가야만 한다.
종일 간병인이며 도우미와 함께 있는 엄마를 생각하면 숨 쉬고 눈 깜박이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하지만 그 속도 모르는 시계는 빠르게도 움직여 벌써 일곱 시. 한 시간 후면 간병인 아주머니마저 퇴근이다. 오늘 이걸 끝내지 못하면 날짜에 못 맞출 텐데.
서하는 핸드폰을 들고 살그머니 비상 계단으로 향했다. 신호음이 서너 번 가자마자 건조한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또 늦습니까?]
“죄송하게도요.”
[회사 일이니 죄송할 건 없고. 오늘 일찍 퇴근해서 초저녁부터 와 있으니까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서로 재수가 있네 없네, 오늘따라 싸가지가 대단하네 해 가며 티격태격해도 결국 믿을 건 류경준뿐이었다. 적어도 해선의 일에 있어서, 경준의 입장도 그럴 거였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마음 놓고 작업을 마친 서하는 밤 아홉 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향했다. 종일 서 있느라 퉁퉁 부은 다리를 질질 끌면서 골목길을 올라가는 내내 이승오가 했던 말들이 머리를 맴돌았다.
이걸 어떻게 얘기한다.
저쪽이 알아서 무덤을 파준다니 협조하기로 하긴 했는데, 협상 조건인 경준이 문제였다.
사실 그대로 말하면 경멸 가득한 눈초리로 쳐다보면서 ‘그런 개 같은 짓거리에 나 끌어들이지 마시죠’라고 하겠지.
그렇다고 다짜고짜 ‘우리 연애 좀 해요’ 하면 더 경멸스럽게 쳐다보면서 ‘제정신으로 하는 소립니까?’ 할 거고.
“이 방법밖에 없나……?”
서하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방법을 꼭 써야겠냐고 자신에게 열 번쯤 물었다. 이거 말곤 없다는 걸 알면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슬프게도, 지푸라기 같은 건 없지만.
“꺙! 꺙꺙꺙!”
문을 열자마자 민지가 하찮게 짖으면서 뛰어나왔다. 재욱은 평소보다 더 불만이 많은 표정이었다.
“이제 와? 그 망할 놈의 회사는 왜 사람을 맨날 한밤중까지 굴려먹어?”
“바쁜 시즌이거든요. 류 비서님 와 계시다던데.”
재욱이 대답도 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옥탑방을 까딱 턱짓해 보였다.
“저녁은?”
“대강 먹었어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하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곤 재욱을 지나쳐 계단으로 올라갔다.
불빛이 현관의 반투명한 유리를 넘어 평상을 비췄다. 바람이 제법 쌀쌀하고, 평상 위엔 경준이 한쪽 무릎을 세운 채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민지 짖는 소리와 올라오는 발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반응이 없었다.
“류 비서님.”
서하가 옆에 앉아 조그만 소리로 불렀다. 경준은 그제야 눈을 반쯤 뜨고 시선만 돌려 서하를 보았다.
“깜박 잠들었네.”
조금 잠긴 목소리였다. 평소보다 살짝 갈라지고 낮아진.
“잘 거면 안에 있지 그랬어요.”
“대표님이 일찍 주무셔서 바람이나 좀 쐬고 있으려고 했습니다.”
하암, 경준이 하품을 하면서 몸을 일으키려는가 싶더니 그냥 팔베개만 하고 자세를 고쳐 누웠다.
“생각보다 일찍 퇴근했네요. 열두 시는 넘어서 올 줄 알았는데.”
“내가 열두 시까지 일했으면 좋겠어요?”
“그건 아니고. 열두 시 넘도록 여기 있어야겠네, 생각했지.”
서하는 뭐라고 대답할까, 하다가 그냥 경준 옆에 벌렁 드러누웠다. 서울의 밤하늘은 어둡고도 너무 밝아 별이 없다. 인공위성 몇 개가 자신도 별인 척 인위적으로 반짝일 따름이었다.
“류 비서님 덕분에 마음 놓고 일했어요. 고마워요.”
“나는 그냥 내 대표님 모신 거고. 조서하 씨는 그냥 조서하 일 한 거고. 누구 덕분도 아니고 고마울 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고맙다고 하면 그냥 네, 하면 안 돼요?”
“지는.”
“…….”
“오늘 대표실 다녀왔죠?”
경준이 화제를 돌렸다. 그는 분명 고맙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보단 이렇게 실용적인 대화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네.”
“무슨 얘기 했습니까?”
“이지수랑 약속했대요. 품평회에서 내 작품이 하나도 채택 안 되면 해고하기로.”
“그건 별로 놀랍지 않은데. 이승오가 굳이 그 말을 조서하 씨한테 한 이유는?”
“이지수가 손을 못 쓰게 해 준다고 했어요. 품평회에서 내 작품이 채택되겠죠. 하나라도.”
“이승오가 직접 그렇게 말했다고? 왜?”
“나한테 관심이 있대요.”
갑자기 옆얼굴이 따가워졌다. 서하는 무심결에 고개를 돌려 경준을 보았다가 최선을 다해 구겨진 그의 표정에 흠칫했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뭘 말이에요?”
“관심 있다는 이승오랑. 어떻게 뭐 하기로 했냐고.”
사실대로 말하면 얻는 게 없다. 경준은 서하가 왜 이승오를 유혹해서 무너뜨려야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아무것도요. 대표님은 이지수 팀장과 애인 사이 아니냐고 하니까 그냥 그렇다고만 했어요. 더는 얘기한 거 없고.”
경준이 들릴락 말락 작은 소리로 그 새끼, 하고 중얼거렸다.
등이 차가워서 시원하다. 곁눈질로 경준을 보니 그는 못마땅하게 찌푸린 눈으로 인공위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하는 그 말도 안 되는 방법을 쓰려면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류 비서님.”
“예.”
“류 비서님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그때까지 가만히 누워만 있던 경준이 고개를 홱 돌렸다.
너무 가까이 누웠나. 미쳤냐는 표정이 너무 잘 보였다.
“왜 쓸데없이 사생활을 캡니까?”
“그냥, 궁금해서요. 애인 없는 건 알고.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없나 해서.”
“있습니다.”
경준은 단호하게 대답하곤 잠시 후 덧붙였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절대 조서하 씨는 아닙니다. 절대. 하늘이 여덟 조각 나서 누가 하나 빼 먹어도.”
“아쉽게 됐네요. 나는 류 비서님 좋아하는데.”
경준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까보다 더 진지하게 미쳤냐는 표정이었다.
“이거 뭡니까? 벌칙? 아니면 고백해서 혼내주기, 뭐 그런 거?”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서하도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냥 류 비서님 좋다고요. 좋아한다고요. 내 마음만 얘기했을 뿐이에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려니 심장에 털이 돋고 얼굴까지 빨개졌다. 어둠이 이 표정까지 가려 주길 바랄 뿐이었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서하를 바라보는 경준과,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응시하는 서하 사이에 일순 찬바람이 불었다. 기분 탓일까. 경준의 얼굴도 조금 붉어진 것처럼 보였다.
“…… 후우.”
이윽고 경준이 양손으로 얼굴을 덮어 아래위로 문질렀다.
“방금 그 말은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들은 거로 해 줘요. 기껏 용기 내서 말한 건데 못 들은 거로 해 버리면 내가 슬프잖아.”
“나 조서하 씨 말고, 좋아하는 사람 있다니까.”
경준이 ‘조서하 씨 말고’에 유난히 힘을 주어 말했다. 별로 타격도 없는 말인데 묘하게 가슴 한쪽이 따끔거렸다.
“그게 누군데요?”
“알 거 없습니다.”
경준이 딱 잘라 말하곤 일어서서 재킷을 탁탁 털어 정리했다.
“어디 가요?”
“집에. 내일 봅시다.”
누군 고백하고 싶어서 한 줄 아나.
서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승오와의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 것뿐인데, 거짓말을 해서 그런지 심장이 콩콩 뛰고 자꾸 얼굴에 열이 올랐다.
“어후, 더워.”
서하는 마구 손부채질을 하면서 현관으로 들어섰다. 보일러를 얼마나 올려놨는지, 후끈한 온기가 몸을 감싸는 바람에 얼굴이 더 빨개졌다.
두런두런 이어지는 대화를 재욱이 계단 밑에서 듣고 있었다는 사실은, 서하도 경준도 전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