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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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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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괜찮아
2022.08.10.
“괜찮아요?”
“안 괜찮아.”
열 내리라고 닦아주는 것 같은데, 오히려 조서하의 손이 스치는 부분이 더 뜨거워졌다. 경준은 물수건을 빼앗으며 흐릿한 눈을 들어 조서하를 올려다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네킹처럼 아름답던 윤서하와 전혀 다르게 특별히 예쁜 데라곤 하나도 없는 여자였다. 그리고 지금 윤서하처럼 조금 귀찮은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보지 마.”
열에 들뜬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좀 피곤할 뿐이야. 난 뭐 좀 했다고 몸살 나고 앓아눕는 그런 쓰레기가 아니라고. 아주 건강하고 쓸모 있는 사람이야, 나는.”
“알았으니까 수건이나 이리 줘요.”
조서하가 경준의 손에서 수건을 홱 빼앗았다. 몸을 닦는 수건은 시원하고, 맨살에 스치는 손가락은 뜨거웠다.
온몸이 타는 것 같다. 피부에 닿는 공기의 움직임조차 아리다. 조금만 움직여도 근육을 구성하는 섬유 다발이 뚝뚝 끊어지듯 고통스러웠다.
“아프지 않다니까.”
“알았다고요.”
“아픈 놈은 벌레나 마찬가지야. 그걸 티 내는 놈은 당장 갖다 버려도 될 식충이 새끼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쓰레기.”
헛소리처럼 흘러나오는 경준의 말에 서하가 닦던 손을 멈칫했다.
그가 중얼거리는 말들은 서하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른 누군가에게 하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경준의 모든 말은 자기 자신에게 향하고 있었다.
“건강 관리도 능력이야. 능력 없는 놈은 죽는 게 나아. 쓸데없이 산소 낭비하지 말고, 그런 새끼는, 하루라도 빨리 죽어야…….”
살벌한 중얼거림이 막히지도 않고 웅얼웅얼 이어졌다.
그런데 뭔가 어색했다. 제 3자가 경준의 입을 빌려서 말하는 느낌…….
“……아니구나.”
이건 누군가에게 들은 말이다.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을 무의식중에 줄줄 외고 있는 거다.
회사에서 그는 늘 차갑고 반듯했다. 경준이 풀어진 모습을 보이는 건 서하와 단둘이 있는 시간뿐이었다.
넥타이를 풀고 소매를 걷어붙인 채 짜장면을 먹거나 평상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캔맥주를 마시는 류경준을 다른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게 진짜 모습일까. 만약 옥탑방에서 흐트러진 당신이 진짜라면 회사에서 보이는 모습은 어쩌다 그렇게 만들어졌을까.
겉보기에 완벽했던 윤서하처럼, 당신도 어릴 때부터 완벽한 류경준으로 살아왔을까.
“류 비서님. 경준 씨.”
서하는 물에 젖어 차가워진 손으로 경준의 이마를 만졌다. 아까 닦아낸 식은땀이 또 이마 가장자리에 송골송골 맺혀 있다가 눈물처럼 또르르 흘렀다.
“잠깐만 기다려요. 약 가지고 올게요.”
서하는 주방으로 나가 아스피린과 미지근한 물을 갖고 왔다. 오 분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에 경준은 또 멀쩡하게 일어나 서하가 놔둔 티셔츠까지 입고선 앉아 있었다.
“먹고 좀 더 자요. 보일러 더 올려놓을게요.”
대꾸도 없었다. 약을 입에 털어 넣은 경준은 물 한 컵을 꿀꺽꿀꺽 다 비우더니 후, 하고 마른 숨을 내쉬었다.
“피곤한 것뿐이야.”
“아니. 당신 지금 아파.”
단호하게 정정하자 경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니라니까.”
“열이 높아. 머리도 멍하고 근육통도 있는 것 같고. 잠도 제대로 못 자는 사람이 매일 하늘 본답시고 차가운 데 누워 있었으니까 몸살이 날 만도 하지.”
서하는 빈 컵을 받아 옆에 놓곤 경준의 어깨를 밀었다. 힘을 준 것도 아닌데 경준이 밀려 도로 침대 위에 누웠다.
“그런데 쓸모없는 거 아냐. 사람은 누구나 아파. 그래서 병원이 있고 의사가 있고, 심지어 의사도 아파. 아파도 괜찮아.”
사실 아프다. 눈 뜨고 있을 힘도 모자랐다. 천천히 속눈썹을 내리감는 경준의 귀에 조서하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맴돌았다.
“세상에 쓸모없는 건 없어. 강아지똥도 씨앗을 만나면 민들레를 피워. 그리고 좀 쓸모없으면 어때? 사람이 물건이야? 못 쓰면 버리게?”
경준은 쓸모에 의해 태어나고 키워졌다. 어머니에겐 한몫 잡을 노후 대책이었고, 아버지에겐 어느 재벌가나 유명인사의 딸과 결혼시켜 이익을 챙길 장사 밑천이었다.
그런 주제에 아파도 된다는 말을 듣고 싶었나.
아니면 쓸모없지 않다는 말을 듣고 싶었나.
그것도 아니면 쓸모없어도 된다는 말을 듣고 싶었나.
셋 다였던 것 같다.
감긴 눈이 떠지지 않았다. 이마를 조심스럽게 만져 보곤 머리카락을 넘겨 주는 손길이 선명했다.
아파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자,
아픈 것도 제법 괜찮은 일처럼 느껴졌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몽롱함이 경준을 잠의 늪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핸드폰이 언제 울릴까 긴장하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깊이 잠들었다.
눈을 떴을 땐 새벽이었다. 짙은 파랑에 가까운 남색 어둠이 조그만 방을 어슴푸레하게 메우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더라.
싸구려 플라스틱 서랍장. 경준이 눕기엔 너무 작은 침대. 그리고 인형을 베고 바닥에 모로 누운 조서하.
“…… 결국 여기서 잤네.”
모처럼 걱정 없이 깊이 잔 덕인지, 조서하의 간호 덕인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열은 내렸다.
경준은 자신이 베고 있던 베개를 조서하의 머리에 받쳐 주곤 이불도 덮어주었다. 이제 침대는 좁은 데다 이불까지 없어졌다.
그래도 뭔가 편했다. 경준은 묘한 만족감을 느끼며 다시 자리에 누워 곧 깊이 잠들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으응…….”
서하는 창으로 비쳐든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잠깐만. 햇살?
등골이 오싹해진 서하가 후다닥 일어났다. 기가 막히게도 환자인 경준은 이불도 없이 침대에 있고, 자신은 경준이 덮고 있던 이불을 야무지게 덮고 바닥에 누워 자던 참이었다.
“늦었다!”
누구보다 빨리 가서 품평회를 챙겨야 하는 막내 디자이너가 늦잠이라니. 있을 수도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될 일에 혼비백산한 서하는 화장실로 뛰쳐들어가 미친 듯한 스피드로 양치와 세수를 하고 나왔다.
그 소란에 곤히 잠들어 있던 경준도 눈을 뜨고 잠시 멍하게 있다가 튕기듯 벌떡 일어섰다.
“젠장, 오늘 품평회!”
“류 비서님은 쉬어도 되잖아요!”
서하가 되는 대로 스킨을 마구 두드려 바르며 외쳤다.
“쉬어도 되긴 뭐가 돼! 내 옷 어디 갔어!”
갈아입지도 못한 옷이지만 괜찮다. 경준은 박스티를 한 번에 벗어 버리고 자신의 셔츠를 집어 급히 단추를 채웠다.
“몸은 괜찮아요?”
“안 괜찮으면 어쩔 건데.”
“안 괜찮아도 빨리 나가요. 나 옷 입게.”
“맞다. 옷.”
경준이 바닥에 굴러다니던 쇼핑백을 집어 서하에게 휙 던졌다.
“이거 입고 나와요.”
“뭐예요, 이게?”
“사내 복지.”
“법인 카드로 산 거예요?”
“그럴 리가.”
“개인 카드로 산 거면 사내 복지가 아니라 선물이지. 어쨌든 잘 입을게요. 고마워요!”
서하는 쇼핑백을 흔들면서 경준을 등 떠밀어 내보냈다.
안에 든 건 시크한 정장 세트와 그에 맞춘 구두였다. 예전의 윤서하였다면 찰떡같이 소화했을 옷이 조서하의 몸에 걸쳐지자 엄마 옷 훔쳐 입은 중학생처럼 영 어정쩡했다.
하지만 스타일을 만지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서하는 대책 안 서는 곱슬머리를 하나로 바짝 당겨 묶고 촌스러울 만큼 새빨간 립스틱을 주머니에 넣었다.
“조서하 씨, 간병인 아주머니 오셨어!”
“지금 나가요!”
다행히 시간 맞춰 간병인이 도착했다. 서하는 해선의 얼굴도 못 보고 간병인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총알처럼 뛰쳐나왔다. 뒤에서 따라오는 경준의 손에서 재킷과 넥타이가 펄럭거렸다.
“멀쩡해졌으면 나 좀 데려다줘요, 류 비서님!”
“그럴 생각이었긴 한데, 그렇게 말하니까 데려다주기 싫네.”
“성격 진짜 이상해!”
티격태격하면서 구르듯 계단을 내려온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자리에 딱 멈췄다. 새벽 장사를 나갔어야 할 재욱이 오늘따라 마당 한가운데에서 덤벨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류 비서님이 왜 이 시간에 옥상에서 내려오지?”
재욱의 얼굴에 항상 서려 있던 불쾌감이 없었다. 그 무표정이 더 어색했다.
“죄송하지만, 임대인님. 지금 길게 말할 시간이 없어서요. 출근해 볼게요!”
서하는 급히 경준의 팔을 잡고 대문 밖으로 끌어당겼다. 조서하를 짝사랑한다는 재욱에겐 안된 오해긴 하지만 지금은 지각하지 않는 게 더 중요했다.
***
“오빠, 나 숍에 갔다가 행사장 가야 하는데. 데려다줄 거죠?”
지수는 세상모르고 자는 이승오를 흔들어 깨웠다. 몇 번을 더 그렇게 깨우고서야 겨우 눈을 뜬 이승오가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은 힘들어. 그냥 운전해서 다녀와.”
“나 우, 운전 잘 못 하는데. 아니면 운전할 사람 불러줘요.”
“어제 미리 얘기했어야지. 당장 오늘 어떻게 스케줄 빼라고 해?”
크게 한숨을 쉰 이승오가 침대 안에서 손짓했다. 지수는 그가 부르는 대로 다가가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우리 공주님, 그동안 고생한 거 알아. 회사도 못 나가고 개인 작업실에서 준비했잖아.”
“맞아요. 나, 나 너무 힘들었어.”
지수는 넓은 품에 이마를 비비면서 어리광을 부렸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다정해서 마음이 놓였다. 이승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았다면, 절대 그러지 못했을 테지만.
“나도, 회사도 사정이라는 게 있어. 이해하지? 여보는 윤서하처럼 속 좁고 자기 일만 중요한 여자 아니잖아. 그래서 내가 여보 사랑하는 거잖아.”
그 속삭임은 지수의 내면 깊은 곳에 감춰진 윤서하에 대한 열등감과 어쩌면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동시에 건드렸다. 가만히 있던 지수는 곧 침대에서 빠져 나와 이승오에게 짙은 키스를 남겼다.
“불안해서 어리광 부, 부린 거예요. 나 숍에 가야 해서 먼저 나갈 테니까 행사장에서 봐요.”
어차피 임원진들이 모두 나오는 중요한 행사다. 지수는 늘 그래왔듯 자신이 이 행사의 주인공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번에 내놓은 디자인들이 거의 다 채택되고 나면 조서하가 해고되고 정직이 풀린다. 그래야만 채택된 디자인들을 작업해서 일정에 맞게 출시할 테니까.
지수는 들뜬 마음으로 옷을 갈아입은 후 숍에서 메이크업을 마치고 행사장까지 갔다. 지하 주차장에 좋은 자리가 남아 있는 것까지 완벽했다.
이 완벽한 날, 맞은편 빈자리에 고급 세단 한 대가 섰다.
지수가 시동을 끄고 화장을 고치는 동안 운전석에서 남자가 내렸다. 백미러 너머로 그 남자를 알아본 지수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뭐야. 류경준이 왜 벌써 여기 있어?”
경준이 조수석 쪽으로 가서 창문을 똑똑 두드리더니 안에 탄 사람과 몇 마디를 나누고 차 문을 열었다. 거기서 내리는 여자는 본 순간, 지수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 자유분방하게 일그러졌다.
“저 미친X이 왜 저기서 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