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블라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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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블라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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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블라인드
2022.08.17.
경준은 이승오와 나란히 앉아 불이 꺼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화려한 런웨이 뒤에서 무슨 대화가 오가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디자인이란 모든 과정을 거쳐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조명 아래 드러나는 순간 의미를 갖는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조서하는 한 달 넘게 매일같이 야근했다. 아홉 시, 열 시 정도는 일찍 퇴근하는 편이고 열두 시를 훌쩍 넘기는 날도 있었다. 그러고도 집에서 또 남은 일을 했다고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곤 했다.
그러곤 웃었다.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온 주제에 뭐가 그렇게 좋다고. 언젠가 밤바다를 보면서 눈을 반짝이던 윤서하와 똑같이 웃었다.
텅 비었던 주변 자리가 하나둘 채워지기 시작했다. 깊이 쿵쿵대는 하우스 재즈 선율 속에서 사람들이 서로의 귀에 대고 뭔가 속닥거린다.
객석의 조명이 점점 줄어들다가 마침내 팟 꺼졌다.
잠시 음악이 멈춘 사이 사회자가 등장해서 쇼의 시작을 알렸다. 여기까지는 예년 행사와 같았다.
“시작하기 전에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마이크로 증폭된 목소리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다.
“이번 품평회는 블라인드 평가로 이루어집니다. 지금 출품된 신상들에 대해선 어떠한 정보도 주어지지 않으며, 회의 시간도 없습니다. 참가자분들은 오직 눈으로만 제품을 확인하고 채택하셔야 합니다. 지금부터 나누어 드리는 태블릿을 활용하여 체크리스트를 입력하고 채택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용하던 장내가 일순 술렁거렸다.
지금까지 품평회는 팸플릿으로 제작된 상품 설명서를 배부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거기에는 디자이너의 이름을 비롯해 제품에 관한 정보가 간략하게 적혀 있어서, 엠디들은 쇼가 끝나고 나서 그 팸플릿을 뒤적여 가며 회의를 거쳐 최종 채택 목록을 내놓곤 했다.
그랬던 것이 아무 사전 정보도 없이 블라인드 평가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진동으로 해둔 이승오의 폰이 울렸다. 이승오는 화면에 뜬 이름을 흘끔 보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거절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몇 번 가지도 않았는데 전화가 끊어졌다. 이지수는 핸드폰을 보다가 별안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게 뭐야!”
갑작스러운 채택 방식 변경에 당황해하던 디자이너들이 한꺼번에 이지수를 쳐다보았다.
그 중 서하의 눈이 이지수와 딱 마주쳤다.
“……너지?”
사납게 노려보는 이지수를 앞에 두고 서하는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무슨 말씀이세요?”
“너, 너잖아. 심사 방식, 너, 네가 시켰지!”
“제가요?”
서하는 진심으로 말이 되는 소린지 의심하면서 집게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켜 보였다.
“그래! 네, 네가 뒤에서 조종한 거 맞지! 그,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리 없어. 나는 아, 아무것도 못 들었단 말야!”
첫 번째 모델이 런웨이로 걸어 나갔다. 이지수와 시답잖은 언쟁할 시간 따위는 없다. 서하는 커튼 사이로 살짝 드러난 런웨이를 보곤 이지수를 향해 또각또각 다가가 섰다.
“그게 듣고 못 듣고가 무슨 상관이에요, 팀장님?”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표정까지 지으며 묻자 이지수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뭐?”
“어차피 팀장님은 여기서 제일 실력이 좋으시잖아요. 제일 많은 제품이 채택될 건데 왜 화를 내시는지 모르겠어요. 오히려 블라인드면 객관적으로 팀장님 디자인을 인정받는 거니까 더 좋은 거 아닌가……요?”
서하는 일부러 말끝을 끌면서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굉장히 해맑아 보이는 이 말에는 많은 함정이 숨어 있었다.
가장 많은 디자인이 채택되지 않으면 그동안의 성적이 거품이었다는 걸 증명하게 되고, 그렇다고 여기서 반박했다간 자기 실력에 자신 없는 디자이너가 되어 버리고.
“그리고, 팀장님 작품은 다들 알아볼 거예요. 마지막에 제일 눈에 띄게 나오시잖아요? 그럼 전 이만 실례할게요. 이제 다음이 제 순서라서요!”
조서하가 옷이 가득 걸린 행거 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이지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아직 준비 중인 자신의 모델들을 보았다.
그래. 어차피 마지막 순서야. 제대로 된 메이크업도 없이 나가는 애들에 비하면 내가 독점할 확률이 훨씬 높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나아졌다.
사람들은 자리마다 놓인 태블릿을 손에 들고서 런웨이를 주시했다.
첫 번째 모델이 경쾌한 워킹으로 나타났다. 창백한 피부와 붉은 립스틱, 하나로 질끈 올려 묶은 후 잔머리 하나 없이 정리한 포니테일을 보고 경준은 미간을 조금 좁혔다.
“조서하?”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서하의 작품인 것만은 확실했다.
다음에도, 또 그다음에도. 모델들은 수수하기 짝이 없는 헤어와 메이크업으로 연이어 등장하며 사람들의 흥미를 잡아끌었다.
“이번 시즌 스타일링을 저걸로 나갈 건가 봐요?”
“괜찮긴 하네. 오히려 시크해 보여.”
“미니멀하고.”
태블릿 화면 위로 손가락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사실 스타일링이 좀 달라졌다뿐이지, 전체적으로 보면 특별할 것 없는 신상들이었다.
그 와중 한 모델이 등장했다. 심플한 점프 슈트에 루즈핏 재킷, 갈색 포니테일. 경준은 한눈에 그 디자인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보았다.
“오.”
어디선가 숨기지 못한 감탄사가 짧게 터졌다.
윤서하가 메인 디자이너일 때, 강윤은 심플한 기본형에 독특한 포인트가 입혀진 스타일로 사랑받았다.
윤서하의 사고 이후 디자이너들이 하나씩 교체되면서 원형을 잃고 그저 무난한, 혹은 과하게 독특한 스타일이 되어 버렸지만.
그 아이덴티티가 다시 런웨이에 살아났다. 드레시하게 연출한 팬츠, 중성적이면서 라인이 살아 있는 슈트, 소재가 독특한 원피스.
똑같이 하나로 묶은 헤어스타일이 오히려 그 디자인들을 더 돋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조서하네.”
런웨이를 바라보던 이승오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왠지 불쾌해진 경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깐만. 왜 불쾌하지?
자신처럼, 이승오도 조서하의 디자인을 알아보았을 뿐이다. 불쾌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예민해졌나.
경준은 밀려든 혼란을 예민이라는 단어로 일축해 버리곤 다시 런웨이에 시선을 고정했다.
한 회사의 신상이란 누가 디자인하든 메인 디자이너를 따라가기 마련이다. 조서하를 제외하면 작년과 그렇게 다를 것도 없었다.
그런 디자인이 백여 벌이나 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다. 어느덧 마지막 순서. 블라인드라 해도 피날레는 어련히 메인 디자이너의 차지였다.
파리의 패션쇼장을 방불케 하는 메이크업에 화려한 액세서리를 단 모델이 아찔한 킬힐을 신고 나타났다.
옷자락에 달린 비즈가 스포트라이트보다 눈부시게 빛나는 드레스였다. 그 화려함에 압도된 사람들은 태블릿을 든 채 입을 벌리고 런웨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런웨이 끝에서 휘 돌아 나갈 때는 감탄사를 내뱉는 사람도 있었다.
아주 기를 썼네.
경준은 냉랭한 시선으로 쇼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시선을 뗄 수 없는 저 극도의 화려함이 오히려 이지수의 조급함을 보여주는 것 같아 우스웠다.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조서하가 이지수를 저토록 조급하게 만들 정도로 실력이 있다는 게 되었다.
“참 대단하지 않아요?”
이승오가 경준 쪽으로 몸을 약간 기울이며 속삭였다.
“뭘 말씀하시죠?”
“조서하 디자이너죠. 이제 갓 들어온 신입이 지수를 저렇게까지 몰아붙였으니 말입니다. 류 비서님 보시기엔 어때요?”
“모르겠습니다. 처음부터 이 팀장이 그렇게 뛰어난 디자이너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서.”
이 회사에서 이렇게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경준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다. 한 명 더 있었다. 경준의 귀에 대고서 ‘이지수가 메인 디자이너로 있는 한, 강윤은 망해’라고 당당하게 속삭였던 사람.
“……뭐, 그래도. 대단한 건 대단한 거고.”
혼잣말처럼 흘린 경준의 말에 이승오가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갑자기 블라인드제를 도입한 건 조서하 씨 때문입니까?”
“그렇게 하는 편이 회사에 좀 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죠.”
“아아. 역시.”
도입하려면 진작 도입했을 거다. 그럴 만큼 기대되는 디자이너가 없어서 그냥 하던 대로 해 왔던 거지. 거꾸로 말하면, 조서하에겐 기대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는 이 대표님도, 이렇게 갑작스러운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가 따로 있지 않습니까?”
경준이 무미건조하게 물었다. 떠보는 게 아니라 확신이었다.
“저도 류 비서님과 같죠. 회사가 발전하길 바라는 마음.”
잘도 그러시겠다.
경준은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이승오가 아낀 건 조서하의 디자인이 아니었을 거다. 그냥 조서하를 회사에서 내보내고 싶지 않았을 뿐이겠지. 디자인 따위 곁다리고.
속이 확 뒤틀렸다. 조서하가 어떤 여자인지,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얼마나 열정적인지 알지도 못하는 새끼가 호시탐탐 혀를 날름거리니 안 그럴 수가 없었다.
“곧 결과 나오겠네요.”
이승오가 오랫동안 앉아 있느라 뻐근해진 허리를 쭉 폈다.
조서하와 이지수 중 누가 더 회사에 쓸모 있는지 밝혀질 시간이었다.
***
“오빠.”
이지수가 흙빛이 된 입술을 꽉 깨물고 이승오를 불렀다.
“이, 이건 잘못됐어요.”
스물네 개와 세 개.
갓 입사한 디자이너와 메인 디자이너 사이의 격차.
그냥 본다면 특별할 거 없는 수치다. 스물네 개라는 기록을 세운 쪽이 메인 디자이너가 아니라 신입 디자이너라는 사실만 빼면 말이다.
지수는 원망 가득한 눈으로 이승오를 노려보았다.
“어,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나한테 하, 한마디 말도 없었잖아요! 난 아무것도 모르고-!”
“뭐라도 알았으면. 어쩌려고 했습니까?”
뒤에서 지켜보던 경준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원망스러운 시선이 이승오를 떠나 경준에게 꽂혔다.
“무슨 뜨, 뜻이죠?”
“미리 알았으면 뭐, 어쩌려고? 뒤에서 손이라도 써 보려고 했습니까?”
“이봐요. 다, 당신은 비서 주제에-!”
“그만 해요, 이 팀장.”
분노에 차서 선을 넘으려는 지수를 이승오가 저지하고 나섰다.
“류 비서님은 비서실장이에요. 사내 이사기도 하고. 이 팀장이 그렇게 함부로 대하는 건 하극상입니다.”
“오빠!”
“이 대표님이라고 불러요.”
이승오는 조금 귀찮은 투로 지수를 타일렀다. 그게 더 억울해진 이지수의 눈에 또 물기가 그렁그렁 고였다.
“투표가 조, 조작된 게 분명해요. 사람들은 내 디자인에 더 바, 박수를 많이 쳤단 말예요!”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니까. 그런데, 이지수 팀장.”
경준이 비웃듯 물었다.
“스스로 말해 봐요. 본인이 이번에 내놓은 디자인, 당당하게 입고 다닐 수 있는지.”
이지수의 디자인은 이번 쇼에서 단연 눈에 띄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선을 끌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본인이 강윤에서 디자인한 게 몇 년인데 어떻게 그런 디자인을 고객들한테 내놓으라고 가져왔지? 그러고도 투표가 잘못됐단 말이 나옵니까?”
날 선 비난에 이지수는 머리가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차 한 대에서 함께 내리던 조서하와 류경준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추측은 의심을 낳았다.
“류, 류 비서님이 그랬죠? 조서하 때문에 투표를 조작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