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내 몸에서 깨어나지 마
(41/45)
41. 내 몸에서 깨어나지 마
(41/45)
#41. 내 몸에서 깨어나지 마
2022.08.20.
“내가?”
경준이 매우 어이없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물론 실제로도 대단히 어이가 없었다.
“맞잖아요. 류, 류 비서님, 조서하랑 그렇고 그런 사이잖아! 오, 오늘도 차에서 내리는 거, 둘이 다정하게 있는 거……!”
이지수가 움찔하며 말끝을 흐렸다. 지금까지는 평소처럼 별 감정 없고 심드렁해 보이던 경준의 눈빛이 별안간 싸늘해진 까닭이었다. 이유 모를 압박감에 지수는 홱 고개를 돌려 이승오를 보았다.
“오빠…….”
이승오는 옅게 한숨을 쉬며 성의 없게 지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쨌든, 이렇게 됐으니 이 팀장이 잘 좀 이끌어 줘요. 옆에서 좀 도와주고, 모르는 거 있으면 가르쳐도 주고. 그래야 팀장이지.”
“싫어요!”
듣기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지수는 거의 비명을 질렀다.
“오, 오빠는 알잖아요. 조서하가 나 얼마나 괴롭혔어요? 나 같이 일 못 해. 계속 추, 출근시킬 거면 그냥 내가 안 나올래요. 흑…….”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다. 경준은 당장 사직서 한 부 뽑아다가 이지수의 엄지손가락을 대고 눌러 버리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렇게 해서 이지수가 정말 순순히 회사에서 나간다는 보장만 있으면 당장 실행에 옮겼을 것이다.
저러고 돌아가서 또 조서하를 얼마나 괴롭혀 대려고.
괴롭힌다고 괴롭혀지는 조서하가 아니긴 했다. 성질머리 하나만 보면 윤서하도 찜쪄먹을 여자 아닌가.
아는데도 짜증이 났다. 혼자 텅 빈 디자인실에서 끙끙대며 일하거나 뺨을 맞고 퉁퉁 부은 모습 따위는 꼴도 보기 싫었다.
“…… 그러면, 이렇게 하죠.”
경준이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사적인 감정은 아니다. 이게 더 효율적인 업무 처리일 뿐이다.
“이지수 팀장은 조서하 씨를 팀원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고, 아마 조서하 씨도 비슷할 겁니다. 내 뺨 때린 인간 밑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이지수가 이승오 뒤에 숨어 사납게 경준을 노려보았다. 경준은 당연히 무시했지만.
“어떻습니까, 대표님? 이참에 디자인실을 하나 더 만드는 게.”
“디자인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승오는 흥미롭다는 투로 되묻고, 이지수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저는 조서하 디자이너가 강윤의 가능성이라고 봅니다.”
***
무대는 텅 비어 있었다. 객석에 앉아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나갔고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스태프들도 정리를 끝내고 사라졌다. 조명 아래에서 화려한 워킹을 뽐내던 모델들도 없었다.
“…… 왜 이렇게 허전하지.”
서하는 런웨이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또각, 또각, 또각, 또각.
그 끝에 다다라서야 이 허전함의 이유를 알았다.
아무도 축하하지 않았다.
결과가 발표되자 가장 먼저 이지수가 서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이제 막 복귀한 팀장이 그렇게까지 대놓고 노려보는데 잘했다, 고생했다고 말할 사람은 없었다.
아니, 아니지. 비단 그 이유 하나뿐일까.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어두운 법이다.
이 화려한 패션업계에서 디자이너들은 갈려 나간다는 표현이 딱 좋을 만큼 일했다. 시장 조사, 콘셉트 선정, 원단과 부자재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디자이너의 손이 닿지 않는 부분은 없었다.
그래도 모든 게 즐거웠다. 혼자였다면 그렇게 즐겁지 않았을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을 함께 하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서로 웃고, 조금 뒤처진 사람은 격려하고 앞서가는 사람에게는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던 팀원들 덕분이었다.
서하는 무대 끝에 걸터앉아 장난치듯 다리를 흔들었다.
그래도 조금 정을 붙였다고 생각했는데. 팀원들이 은근히 도와줄 때는 예전의 동료애를 느낄 뻔했는데.
“잘했어. 너 실력 안 죽었어. 이제 시작이야.”
서하의 목소리가 벽에 부딪혀 메아리로 돌아왔다. 꼭 누군가 격려해 주는 것 같아 마음이 좀 나아졌다.
저벅.
별안간 뒤에서 들려온 발소리가 상념을 끊었다. 흠칫해서 돌아본 서하는 발소리의 주인을 알아보곤 가슴을 쓸어내렸다.
“깜짝 놀랐잖아요.”
“왜 여기 이러고 있습니까? 전화도 안 받고.”
“전화요?”
주머니를 뒤적여 보니 핸드폰이 없다. 백스테이지에 던져 놓은 가방에 들어 있겠지.
“가방에 넣어 놨어요. 나 여기 있는 거 알고 온 거예요?”
“혹시나, 하긴 했는데.”
서하가 조금 전에 했던 것처럼, 경준이 런웨이를 따라 저벅저벅 걸어왔다. 슈트를 딱 맞게 입은 길고 곧은 다리와 흰 피부, 날카로운 눈빛이 웬만한 모델은 손쉽게 압도할 만큼 인상적이었다.
그대로 걸어온 경준이 서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런웨이 끝에서 흔들리는 다리는 두 쌍이 되었다.
“오늘 디자인 좋던걸.”
“앞으로도 좋을 거예요.”
경준의 입꼬리에 피식 웃음이 걸렸다가 지워졌다.
“이지수는 난리가 났어. 내가 조서하 씨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서 투표를 조작한 거 아니냐고 하더라.”
“뭐부터 반박해야 할까요? 우리가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니라는 거? 아니면, 설마 그렇다고 해도 류 비서님이 투표를 조작해 주진 않을 거라는 거?”
“나를 그렇게 냉혈한으로 보고 있었다고?”
“공과 사를 잘 구분하는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고 해 두는 건요?”
정말, 한 마디도 안 진다.
경준은 또 피식 웃곤 어둑한 객석을 응시했다.
사실 축하한다는 말을 하려고 서하를 찾았다. 잘했다고. 그동안 노력한 보람이 있다고. 신입 디자이너가 스물네 개나 되는 기록을 세운 건 처음 있는 일이라고 말해 주려고 했다.
그 말이 왜 이렇게 쑥스러운지 모르겠다. 안 해 본 말이라서 그런가.
“흠, 흠.”
경준이 쑥스러움을 없애기 위해 헛기침을 두어 번 했을 때, 서하가 갑자기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서하, 꿈을 꾸는 서하…….”
놀란 시선이 서하의 옆얼굴에 가 닿았다. 조서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시선도 느끼지 못하고 계속해서 흥얼거렸다.
“꿈속에서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어. 나는 서하, 잠을 안 자는 서하…….”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아닐 리도 없다.
아무리 똑같아도 조서하가 윤서하일 순 없다. 하지만 윤서하가 아니라면 말도 안 된다. 이렇게 똑같은데. 모든 게 닮았는데.
입안에 맴돌던 축하의 말 대신, 경준은 갑자기 서하의 손을 잡아채고 벌떡 일어섰다.
“꺄앗!”
서하가 놀란 소리를 내면서 얼떨결에 경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넘어질 뻔했잖아요! 갑자기 왜 이래요!”
“어디 좀 갑시다. 지금 당장.”
“가긴 어딜 가요? 나 회사 가서 정리해야 해요!”
“그건 내일 하고.”
경준은 조서하의 손을 꽉 쥐고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리고 조수석 문을 열고 서하를 밀어넣을 때까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안전벨트 매요.”
“어디 가는데요? 납치?”
“병원.”
“병원은 왜요?”
“당신 친구 만나러.”
윤서하가 병원에 그대로 누워 있는지 보고 싶었다. 물론 전화 한 통이면 어떤 자세로 누워 있는지까지 알게 되겠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 윤서하 말하는 거예요?”
경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탓인지, 그렇게 묻는 서하의 목소리도 좀 어색하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그때부터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병원까지 갔다. 카드를 찍고 엘리베이터에 타서도 그랬다. 경준은 이렇게 이상하게 행동하는 자신마저 혼란스러웠고, 서하는…….
“꼭, 봐야 해요? 왜?”
두려웠다.
서하의 기억 속에서 윤서하는 항상 행복했다. 어디서든 가장 빛나고 누구보다 사랑받았다. 그런 윤서하가 몇 년간 이어진 코마 상태에서 과연 예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까? 절대 아닐 거다.
“제일 친한 친구라며. 병원에도 오기로 했잖아.”
그게 오늘은 아니야. 오늘은 내가 너무 초라했잖아. 아무도 없이 혼자서 품평회의 성공을 축하하고 있었잖아.
“그냥,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요.”
“갑시다. 당신이 윤서하의 자리를 훌륭하게 이어가고 있다는 걸 말해줘야지.”
뒷걸음질 치려는 서하의 손을 경준이 꽉 잡았다. 서하는 미처 빼내지 못한 손끝을 경준에게 붙잡힌 채 복도를 걸어 병실 앞에 섰다.
저벅.
또각.
커다란 병실에 두 사람의 발소리가 울렸다.
서하는 자신도 모르게 경준의 손을 마주 꽉 쥐었다. 흰 커튼으로 가려진 침대가 가까워질수록 긴장감이 더해졌다. 어느새 손바닥 안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삐, 삐, 삐, 삐…….
윤서하의 생명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려 주는 기계음이 점점 크게 들려왔다.
“윤서하 씨.”
경준이 입을 열었다. 서하는 반사적으로 그를 돌아봤다가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닌 걸 깨닫고 재빨리 커튼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 왔어. 당신 친구도 왔어.”
뭐야. 너 또 왜 반말해?
이 상황에도 서하는 그의 말투를 지적하고 싶어졌다.
경준의 손이 하얀 커튼 끝에 닿았다. 천천히 걷히는 커튼 뒤에서 반듯하게 누운 사람의 형태가 천천히 드러났다. 발, 무릎, 허리, 가슴, 얼굴.
“흡……!”
서하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코마 상태에서 숨만 쉬고 있는 자신의 육체를 타인의 시선으로 본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일까?
“인사 안 합니까?”
경준이 건조하게 물었다. 그 와중 윤서하의 머리카락과 자세를 살피고 생명유지장치가 잘 붙어 있는지 확인하는 게 한두 번 와 본 솜씨가 아니었다.
“인사. 해야죠, 인사.”
서하는 입에서 손을 떼어내고 심호흡을 했다. 독한 소독약 냄새가 기다렸다는 듯 한꺼번에 코로 파고들었다.
“유, 윤서하.”
자신의 이름을 육성으로 내뱉고 나자 실체 짙은 두려움이 왈칵 몰려왔다. 앞에 놓인 ‘윤서하’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 앉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영영 몸을 되찾을 수 없을 거라는 이상한 예감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저기, 나, 나는…….”
“왜 그렇게 떨지?”
경준의 손이 서하의 양어깨를 잡았다. 서하는 그제야 자신이 떨고 있다는 걸 알았다. 먹은 것도 없이 속이 메슥거렸다.
“잠깐만요. 화장실…….”
“인사만 하고 갈 겁니다. 의사가 코마 상태에 있어도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으니까, 왔다고 말이라도 해 줘요. 빨리 일어나라고.”
아니야. 지금 일어나면 안 돼. 내 몸에서 깨어나지 마, 조서하!
“싫어!”
서하는 자신도 모르게 경준의 손을 힘껏 뿌리치며 그를 뒤로 밀쳐냈다. 그 바람에 몸이 휘청거리면서 갈 곳 잃은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꺄앗!”
“안 돼!”
두 사람의 목소리가 동시에 병실을 울렸다. 서하가 휘두른 손에 걸려 떨어진 산소호흡기가 줄에 매달려 대롱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