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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윤서하가 깨어나는 방법 (42/45)


#42. 윤서하가 깨어나는 방법
2022.08.24.


경준은 다급하게 떨어진 산소호흡기를 주웠다. 동시에 조서하가 갑자기 실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고개를 푹 떨구며 픽 쓰러졌다.


“조서하 씨!”

가까스로 한 손을 뻗어 조서하가 바닥에 부딪히는 건 막았다. 경준은 조서하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히, 서둘러 내려놓곤 산소호흡기를 윤서하의 얼굴에 씌우려 했다.

그 순간, 윤서하가 움직였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경련하듯 눈썹을 움찔거렸다. 아주 사소하고 미세했으나 어쨌든 심장이 뛰고 숨을 쉬는 거 말고도 무언가 생체 반응을 보인 것이다.


“윤서하?”

또, 움찔.

가슴이 마구 뛰었다. 경준은 그때까지 자신이 산소호흡기를 그냥 들고만 있었다는 걸 깨닫고 얼른 윤서하의 얼굴에 씌웠다.


“윤서하. 들려? 내 말 듣고 있어?”

다시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마음 같아선 붙잡고 몇 번이고 더 불러 보고 싶지만 조서하가 아직 쓰러진 채였다.

경준은 호출 버튼을 눌러 놓곤 바닥에 쓰러진 조서하의 머리를 안아 들었다.


“조서하 씨. 정신 차려요. 조서하 씨.”

“…….”

조서하의 눈썹이 움찔 경련했다. 방금 윤서하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곤 곧 천천히 눈을 떴다.

멍하니 초점 없는 눈동자는 경준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경준이 아닌 더 먼 곳의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하기도 했다.


“조서하 씨.”

“…… 아.”

조서하가 눈을 깜박였다. 그땐 다시 초점이 돌아와 있었다.


“어떻게 된 거죠?”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괜찮아요?”

서하는 경준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침대엔 윤서하의 몸이 아까 본 그대로 누워 있었다.


“괜……. 찮아요. 나 며칠 너무 무리했나 봐요.”

“저기 가서 좀 누워 있어요. 따뜻한 거 한 잔 줄 테니까 마시고. MRI라도 찍어 보는 게 좋겠는데.”

“아녜요. 류 비서님도 잘 못 자서 아팠잖아요. 나도 품평회까지 신경도 너무 많이 쓰고 잠도 못 자서 그래요.”

“안 아팠다고.”

“알았어요.”

서하는 부축하려는 경준의 손을 거절하고 스스로 일어나 보호자용 침대에 걸터앉았다. 곧 문이 열리고 의료진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교수님.”

정수기에서 따뜻한 물을 받던 경준이 컵을 내려놓고 나와선 의사와 인사를 나눴다.


“방금 제 실수로 호흡기가 잠깐 떨어졌습니다. 그걸 다시 씌우려고 보니 윤서하 씨가 눈썹을 살짝 움직였고요.”

“음…….”

의사가 윤서하의 눈꺼풀을 뒤집어 빛을 비춰 보았다. 여태껏 그랬듯, 서하의 눈동자는 눈부신 빛에도 아무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단순 경련이나 무조건반사일 가능성이 높아요. 그래도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반응이니 당분간 집중해서 지켜보도록 하죠.”

“…… 알겠습니다.”

경준은 얼굴에서 실망의 빛을 애써 지웠다. 귀 기울여 듣고 있던 서하도 그냥 보호자 침대에 누웠다.

방금 뭐였지.

쓰러졌을 때, 서하는 깨어 있었다. 몸만 쓰러지고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처음에 서하는 자신이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났다고 생각했다. 분명 멀쩡하게 서 있던 몸이 침대 위에 눕혀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유롭게 숨쉬기가 힘들고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윤서하?”

바로 귓가에서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 경준의 목소리였다.


“윤서하, 들려? 내 말 듣고 있어?”

들려. 그런데 나는 누구지? 나는 조서하야? 아니면 윤서하야?

입과 코 주변에 무언가 딱딱한 게 눌러졌다. 뭔진 모르겠지만 답답했다. 서하는 또 정신이 까맣게 흐려지기 직전, 눈꺼풀을 아주 조금 들어 올리고 희미하게 앞을 볼 수 있었다.


“조서하 씨. 정신 차려요. 조서하 씨.”

그 소리를 듣자마자 눈이 번쩍 떠졌다.

이젠 익숙해진 비누 냄새가 물씬 풍겼다. 조금 전엔 침대에 누워 있는 것 같았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병실 바닥이었다.


“조서하 씨.”

크게 확장된 경준의 동공이 위에서 서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 뒤로 새하얀 천장이 펼쳐졌다. 지금 보호자 침대에 누워 보고 있는 것과 같은 천장이었다.


‘잠깐이었지만 침대였어. 온몸에 힘이 없고 숨쉬기가 불편하고…….’

불쾌하면서도 뭔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마치 예전에도 겪어 본 적이 있는 듯한.

서하는 곧 그때를 떠올릴 수 있었다. 워낙 강렬한 기억이라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고 이후 ‘윤서하’로서 정신이 돌아왔을 때. 그리고 다시 ‘조서하’로 깨어났을 때.

내가 지금 이 몸으로 깨어난다면 어떨까. 침대에 누워 있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숨쉬기가 답답하고, 입과 코 주변에 딱딱한 산소마스크가 씌워져 있겠지.


-삐-삐-삐-삐-.

생명유지장치의 기계음이 고막을 쑤셨다. 그 소리가 어두운 미로에서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내 원래 몸에 뭔가 위험이 생기면 영혼이 돌아가는 건가? 그러면 조서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왜 윤서하가 깨어나면 조서하가 쓰러지는 거야?’

잊고 있었던 기억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팟, 하고 정신을 잃었던 적이 있다. 그 잠깐 사이 서하는 어딘가에 누워 병실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도 몸에 뭔가 위험이 생겼던 걸까. 이승오가 윤서하를 완전히 죽이려고 했나?

진료를 마친 의사가 경준과 인사를 나눴다. 그 바람에 서하는 생각을 멈췄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아닙니다. 언제든, 또 징후를 발견하면 불러 주세요.”

의료진들이 들어왔을 때처럼 우르르 나가자 병실에 침묵이 흘렀다. 경준이 정수기에서 따뜻한 물을 받아 티백을 하나 넣곤 서하에게 내밀었다.


“좀 마셔요. 뜨겁진 않습니다.”

머그컵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편두통으로 고생하던 서하를 위해 따뜻한 차를 내밀던 이승오가 생각났다.

그 차를 얼굴에 부어 버려야 했는데.

따뜻한 차가 식도로 넘어가자 좀 더 마음이 안정되었다. 서하는 차를 두어 모금 더 마시고 나서 고개를 들었다.


“왜 그렇게 봐요? 할 얘기라도 있어요?”

경준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기도 했다. 답지 않게 머뭇거리던 그는 정수기에서 찬물을 한 잔 따라 마시더니 머리를 흔들었다.


“갑자기 데려와서 미안합니다. 싫어할 줄 몰랐어요.”

“싫은 건 아니었어요. 단지…….”

서하는 적당한 단어를 고르느라 잠시 말을 멈췄다.


“두려웠어요. 윤서하가 어떤 모습일지. 항상 예쁘고 사랑받던 서하가 저렇게 누워만 있다는 게……. 그 모습을 내 눈으로 본다는 게, 뭔가…….”

“내가 배려를 못했네.”

“류 비서님 원래 배려 못하시잖아요. 안 하는 건가?”

분위기라도 좀 부드럽게 만들어 보려고 던진 농담에도 경준의 표정은 심각했다. 서하는 괜히 어색해져 가만히 있다가 물었다.


“그런데, 여긴 왜 갑자기 오신 거예요?”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이상한 생각?”

경준이 불쑥 다가와 서하를 들여다보았다. 흠칫한 서하는 한 손으로 침대 가장자리를 잡고 몸을 뒤로 당겼다.


“……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곧 허리를 세운 경준이 중얼거렸다.


“당신이 윤서하라는 생각이 들었어. 친구나 닮은 사람이 아니라 진짜 윤서하. 꼭 윤서하가 구미호처럼 조서하로 변해서 여기 서 있는 것 같다는……. 그래서, 당장 조서하와 윤서하가 내 눈앞에 있는 걸 확인하고 싶었어. 안 그러면 그 미친 생각을 계속 할 것 같았거든.”

어떻게 알았지?

서하는 놀란 눈으로 경준을 쳐다보았다.

평생 함께 산 이승오조차 전혀 둘 사이의 연관점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경준은 서하의 디자인을 보자마자 아주 잠깐 스치듯 봤던 윤서하의 것임을 알아보았고, 이젠 두 사람이 동일인물이라는 생각까지 해냈다.

그게 가능할까. 이 사람은 왜. 어떻게.

그러다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류 비서님.”

이것 역시 입밖으로 내면 미친 소리처럼 들릴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서하는 물었다.


“혹시, 좋아한다는 사람이요. 그 사람이 윤서하예요?”

“아닌데.”

서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아니라면서 경준이 짓는 저 표정은 세상에서 제일 눈치 없는 사람이 물구나무 서서 봐도 거짓말하는 표정 아닌가.

모든 의문점이 저 표정 하나로 스르르 풀렸다. 회사를 삼키기 위해 잠입한 경준이 왜 그동안 인수합병은커녕, 서하와 해선이 없는 강윤을 지키고 키워줬는지.

왜 해선을 그렇게 지극 정성으로 돌봐 주는지. 왜 윤서하의 디자인을 보물처럼 챙겼는지.


“쓸데없는 소리 말고, 살 만하면 갑시다. 데려다 줄 테니까.”

경준이 휙 몸을 돌렸다. 뒤에서 흘깃 보이는 귀가 조금 붉었다.


 

***



“꺙! 꺙!”

녹슨 대문이 열리자마자 민지가 바둑알처럼 톡 굴러 나와 신나게 짖었다. 서하는 쪼그려 앉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쿡쿡거렸다.


“네 아빠는 아직 안 들어왔나 봐?”

민지가 발랑 드러누워 꼬리를 마구마구 흔들었다.

통통하고 몰랑한 배를 만족할 때까지 만져 주고 머리도 쓰다듬고, 가방에서 개껌을 꺼내 던져 준 후에야 서하는 일어나서 옥탑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오늘은 일찍 왔네요.”

간병인 아주머니가 살갑게 인사했다.


“저어기, 조개국 칼칼하게 끓여 놨으니까 저녁으로 먹어요. 우리 사모님이 잘 드시더라고.”

“반찬까진 안 해주셔도 괜찮은데. 감사히 잘 먹을게요, 여사님.”

“여기 사모님이 워낙 얌전하고 고우셔서 내가 할 일이 없어 그래. 남는 시간에 반찬이라도 해야지. 오늘은 이만 퇴근할 테니까 내일 봐요!”

“네, 여사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러고 보니 엄마와 마주 앉아 밥 먹은 것도 상당히 오래전이었다. 간병인이 퇴근할 시간에 딱 맞춰 집에 온 것도 그랬다.

서하는 손을 씻고 해선의 방문을 열었다. 여느 때처럼, 해선은 누런 벽지를 텔레비전 보듯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는 저기서 뭘 보고 있는 걸까. 종일 가만히 앉아 무슨 생각을 할까.


“엄마.”

아주 작게 부르자 해선이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모르는 사람을 본 표정이었다.


“누구세요?”

“…….”

뭐라고 대답할까. 나는 엄마 딸인데. 그런데 엄마 딸이 아니야.

처음 병원에서 봤을 때 경준에게도 해선이 누구냐고 물었다. 수십 번, 수백 번이나 묻는 질문에 경준은 짜증도내지 않고 항상 같은 대답을 했다.


-‘비서실에 새로 들어온 류경준입니다, 대표님. 잘 부탁드립니다.’

그게 삼 년이 훌쩍 넘었다. 당신은 언제부터 윤서하를 마음에 담았을까. 왜 그랬을까. 만나면 으르렁대기 바쁘고, 좋은 기억이라곤 없는 사이였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묵직하게 아팠다.

생각하면 경준에겐 늘 도움만 받았다. 이승오의 바람을 목격하고 혼자 비를 맞을 때, 이혼 서류를 던질 때, 트럭에 치여 죽었다가 조서하로 살아난 후까지.

아프지 않다고. 아픈 놈은 쓸모 없는 거라고 헛소리처럼 중얼거리던 경준이 눈앞을 맴돌았다.

나, 당신을 이용하는 게 맞는 걸까.

지쳤다. 너무 많은 일이 너무 짧은 시간에 벌어지고 너무 많은 생각이 머리를 채워 곧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이대로 엄마의 무릎을 베고, 머리를 쓰다듬는 엄마 손길을 느끼면서 그냥 자고 싶었다.

그래도 서하는 웃으면서 해선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새로 입사한 디자이너 조서하라고 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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