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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들었을까 (44/45)


#44. 들었을까
2022.08.31.


나가지 말자.

서하는 처음에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류경준, 이승오와 셋이서 식사라고? 먹다가 체해서 손가락 발가락 한 땀 한 땀 따지 않으면 다행이잖아.

그러다 무심결에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보니 이지수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곱게 쳐다본 건 아니고, 째려보고 있었다.


“서하 씨, 의외로 한가하네. 전화로 수다 떨 시간도 있고.”

이지수가 생긋 웃으며 던진 말에 안 그래도 아슬아슬하던 사무실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다들 바쁜 척 눈치 보면서 자리를 피하는 와중 서하만 해맑게 대답했다.


“아녜요. 저 바빠진 거 팀장님도 아시잖아요.”

이지수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듯 올라갔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던데. 우리 서하 씨한텐 해당 사항이 없나 봐요.”

“네? 저는 벼가 아닌데요.”

“하.”

이지수가 머리를 짚었다. 이래서 가방끈 짧은 것들은,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도 얼핏 들렸다.

입사할 실력도 안 되면서 내연남 덕분에 팀장 자리 꿰찬 주제에 가방끈 타령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서하는 그 꼴을 보고 식사인지 나발인지 나가기로 마음을 바꿨다. 영원히 서 있을 것만 같던 그 사랑의 젠가에서 블록이 하나씩 빠지다가 마침내 와르르 쏟아질 때, 저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그래서 가게 된 거다. 강남의 어느 골목 안쪽에 숨어 있는 일식 오마카세 레스토랑에.


“…….”

차에서 내린 서하는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간판을 바라보면서 표정 관리를 하느라 애써야만 했다.


“생각보다 외관이 호화롭진 않죠?”

아무리 숨겨도 비어져 나오는 떨떠름함을 실망으로 착각했는지, 이승오가 킥킥 웃었다.


“이래 봬도 인터넷에 전화번호 하나 안 떠서 아는 사람만 예약할 수 있는 집이에요. 맛은 내가 보증하지. 류 비서님이 다른 집을 예약했는데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직접 컨택했어요. 참, 류 비서는 업무 끝내고 늦게 온다니까 먼저 식사하면 돼요.”

맞다. 여기는 알음알음 직통 번호를 아는 사람들만 예약할 수 있고, 그나마 당일 예약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오가 여기를 오늘 당장 예약해서 올 수 있었던 건, 단골이기 때문이었다.

이승오 말고. 윤서하가.


“와아아.”

서하는 힘껏 표정을 원위치시키고 대단하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이 대표님은 여기 단골이신가 봐요.”

“뭐, 그렇죠.”

이승오가 젠틀한 척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앞장서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서하가 기억하는 인테리어 그대로였다. 아담하고 길쭉한 공간, 맨 안쪽에 미닫이문으로 외부와 차단된 프라이빗 룸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한쪽 벽에 가득한 손님들의 폴라로이드 사진이 좀 많이 늘어났다는 것 정도?


“손님들 사진이 많네요.”

천장 아래, 두 번째 줄에 윤서하와 이승오의 사진이 여전히 붙어 있는 건 굳이 쳐다보지 않았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친절한 종업원이 하나 있는 룸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서하가 가운데에 앉자 이승오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 처음 왔을 땐 사진도 거의 없었어요. 먹으러 다니다 보니 저렇게 점점 늘어나더라고요. 착실하게 조금씩 쌓여가는 게, 꼭 우리 회사 같아서 좋았죠.”

이 가게는 서하가 대학 시절 우연히 알게 된 장소였다.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입소문이 덜 났을 때, 서하는 승오와 함께 일주일에 두 번씩은 여길 찾아오곤 했다.


-’난 저 사진들이 점점 늘어나는 게 좋아. 착실하게 조금씩 쌓아가는 게, 꼭 우리 부모님 회사 같잖아.‘

그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리고 감상에 젖은 척할 때 쓰고 있었구나. 빌어먹을 살인자 새끼.

기껏 좋아하던 레스토랑에 왔는데 입맛이 뚝 떨어졌다. 땅콩 소스를 곁들인 연어 샐러드도 떨어진 입맛을 돋워 주진 못했다.


“간절히 원하면 이뤄진다는 말, 알아요?”

간신히 마지막 양상추 한 조각을 입에 넣었을 때, 이승오가 물었다.


“좋아하는 여자 생기면 꼭 여기 같이 오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게 이뤄지네.”

“팀장님은 같이 온 적 없으세요?”

“같이 온 적 없었으면 좋겠어요?”

이승오가 한쪽 턱을 괴고 서하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싱긋 웃었다. 알 바 아니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온다. 서하는 그 말을 삼키기 위해 따끈한 미소 국물을 한 수저 떠서 먹었다.


“류 비서님 안 오셨는데. 저 배 별로 안 고프니까 나머지는 류 비서님 오시면 같이 먹어요.”

“중요해요? 류 비서가?”

“대표님 부탁도 있으니까요. 제가 성공적으로 류 비서님을 유혹해야 대표님께 이득이 되는 거잖아요.”

“그건 그렇지. 좀 질투는 나지만.”

이승오가 종업원을 부르기 위해 호출벨을 눌렀다. 얇은 미닫이문이 기다렸다는 듯 열렸다.


“…….”

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는 순간, 이승오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류 비서.”

“류 비서님.”

서하 역시 당황해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실수다. 업무가 있다는 사람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

들었을까? 못 들었을까?

서하와 똑같은 생각을 한 이승오가 대신 물었다.


“지금 도착한 겁니까? 나머지 업무 처리하고 온다더니.”

“방금 왔습니다. 예상보다 빨리 끝나서.”

경준의 말투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안심하긴 이르다. 류경준은 속내를 감추는 데 누구보다도 능숙한 사람이니까.

경준이 룸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당연히 이승오 옆에 앉아야 했을 그는, 테이블을 크게 돌아 자연스러운 태도로 서하 옆자리에 앉았다.


“이제 막 식사 나왔나 보군요.”

경준이 빈 샐러드 그릇을 흘긋 보고 말했다. 별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 이승오가 뒤늦게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불렀다.


“이쪽, 새로 오신 분은 다음 코스에 샐러드 따로 준비해 주세요. 셰프가 추천하는 사케도 한 병 갖다 주고.”

“사케는 데워 드릴까요?”

“그것도 셰프가 추천하는 대로.”

곧 전복죽 세 그릇이 나와 각자 앞에 놓였다. 경준 앞에는 연어 샐러드도 있었다. 서하는 죽 같은 기분으로 전복죽을 비운 후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하실 말씀은 뭐예요, 대표님?”

“할 말?”

이승오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할 말이 있어야 해요? 그냥 서하 씨랑 저녁 먹고 싶어서 연락한 건데.”

“류 비서님도 같이 자리하셨으니까요. 뭔가 회사 관련해서 하실 말씀이 있는 게 아닌가, 했어요.”

“의외로 눈치가 빨라. 내가 이래서 서하 씨를 좋아하지.”

이승오가 경준에게 눈짓을 보냈다. 대신 이야기해 달라는 신호였다.


“디자인 2팀 신설 관련 문제입니다. 조서하 씨를 주축으로 해서 새 디자인실을 만들자는 거죠.”

“…… 저를요?”

서하는 황당한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이승오는 원래 회사 말아먹기 딱 좋은 모지리라 치고, 류경준이 저 계획에 찬성했다는 건 정말 의외였다.

알맹이가 메인 디자이너인 건 아무도 모르니 밀어 놓고, 지금 조서하는 경력 하나 없는 재능 충만 신입 디자이너 아닌가?


“임원 회의에서 결정된 사안입니다.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요. 일이 이렇게 된 데는 이지수 팀장의 공이 크니까.”

“팀장님요?”

점점 알 수 없는 경준의 말에 서하는 설명을 구하는 눈빛으로 이승오를 쳐다보았다.


“지난번 징계 사건도 있고, 난 사적인 감정을 떠나서 이지수 팀장 때문에 조서하 씨가 퇴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거든. 이번 시즌의 핵심 디자이너가 빠져 버리면 손해가 어마어마하잖아. 안 그래요?”

설명을 듣는 동안 서하의 머릿속이 분주하게 굴렀다.

확실히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하지만 이제 원래 몸으로 돌아갈 방법을 알아냈다. 그 후에 조서하가 어떻게 되는지만 알면 언제든 윤서하가 될 수 있는 거다.

그러니까, 조서하는 팀장이 될 수 없다. 그런 중임을 맡아선 안 된다.

서하는 금방 결론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팀원은요?”

“자율에 맡길 거예요. 기존 팀에서 이동 희망하는 사람이 옮기는 거로.”

“아무도 희망 안 할 것 같은데요.”

서하는 솔직히 말했다. 정말 아무도 옮기고 싶지 않을 거다.

이미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대로 받아버린 천재 신입 디자이너 옆에서 비교 대상이 될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것도 실세인 이지수 팀장에게 미움 받을 걸 뻔히 알면서.


“조서하 씨 혼자 있어도 괜찮겠지. 지원은 충분히 해 줄 거고, 오히려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 조서하 씨만 열심히 하면 되는 환경이잖아요.”

이승오가 방금 나온 전복 요리를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어 넘겼다.


“회의 거쳐서 결정했으니 번복은 힘들어요. 내가 특별히 애써 준 거니 그냥 열심히만 해 줘요. 뭐, 개인적으로 떡볶이라도 한 번 사면 더 좋고.”

“대표님.”

경준이 낮은 어조로 이승오를 불렀다. ‘쓸데없는 개수작 부리지 마라’는 의미가 서하까지 느낄 정도로 뚜렷했다.


“류 비서님도 참. 떡볶이 한 접시 얻어먹는 것도 안 돼요?”

“늘 주의하셔야 합니다.”

“저렇게 깐깐하다니까.”

이승오가 고개를 젓곤 조금 장난스럽게 웃었다.


“서하 씨 생각은 어때요? 팀원이 꼭 필요할까?”

혼자서도 작업은 충분히 할 수 있다. 오히려 막내 디자이너가 해야 할 잡무들에서 해방되는 셈이니 더 효율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하에겐 팀장이 필요했다. 갑자기 조서하가 사라져도 남은 작업을 이어받아 완수할 수 있는 팀장.

당장 그런 사람을 어디서 구한담.

서하는 막막함에 조그만 한숨을 내뱉었다.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없으면, 제가 일단 혼자 힘으로 어떻게든 해볼게요. 나중에라도 충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씩씩해. 아주 좋아.”

이승오는 꽤 만족스러운 듯했고, 경준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다음 요리와 따뜻한 사케가 들어왔다. 이승오가 먼저 술병을 들어 서하와 경준의 잔을 채워 주곤 제 잔도 스스로 채웠다.


“조서하 디자이너의 새 팀을 위하여.”

이승오가 먼저 잔을 비우자 경준도 따라 비웠다. 서하는 입만 살짝 대고 내려놓았다.


“서하 씨는 술을 못 해요?”

“잘하진 못해요. 컨디션 관리도 해야 하고…….”

“컨디션 관리 좋지. 그래도 한 잔만 해요. 어쨌든 조서하 씨를 위한 자리니까.”

마시자면 못 마실 것도 없다. 그냥 이승오의 낯짝을 보면서 마시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안 마셔요? 서운한데.”

이승오가 재촉했다. 서하는 그냥 먹고 치우자는 마음으로 찰랑찰랑 채워진 술잔에 손을 뻗었다.


“대표님.”

서하가 술잔을 들기 직전, 간발의 차로 경준의 손이 먼저 그 잔을 들었다.


“제가 대신 먹겠습니다. 조서하 씨는 컨디션 관리가 중요해서.”

말릴 틈도 없이 꿀꺽, 경준의 목울대로 술이 모조리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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