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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류경준의 거래 제안 (45/45)


#45. 류경준의 거래 제안
2022.09.03.


이승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가 경준이 잔을 탁 내려놓았을 때 간신히 펴졌다.

꼴에 제법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서하는 어쩔 줄 모르는 척 눈을 굴리면서 경준 앞에 조심스레 물잔을 밀어주었다.


“무, 물 드세요.”

경준은 그 물컵도 받아 한 번에 쭉 마셨다. 그러고 나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고마워요.”

경준이 싱긋 웃으면서, 서하를 똑바로 보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것도 너무나 부드러운 목소리로.

서하는 그 웃음이 가짜라는 걸 금세 눈치챘다. 경준은 차가운 외모와 달리 조금 장난꾸러기처럼 웃는다. 적어도 을왕리 조개구이집과 옥탑방 평상 위에선 그렇게 웃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서하는 본능이 이끄는 대로 경준의 연기에 맞춰 미소지었다.


“제가 고맙죠. 항상.”

꾸며낸 웃음과 미소가 마주쳤다. 이상하게도, 한순간 그 모든 게 진심처럼 느껴졌다.

나머지 코스에 뭐가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관심도 없고 맛도 없었다. 셰프가 바뀐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승오를 사랑하던 그 시절엔 뭘 먹어도 훌륭한 맛이 났는데.


“잘 먹었습니다. 맛있었어요.”

드디어 마지막 디저트까지 끝나자 서하가 예의 갖춘 인사를 건넸다. 아까 나온 사케는 차갑게 식은 채로 겨우 반이 비워졌을 뿐이었다.


“입맛에 맞았다니 다행이네. 류 비서님은 어땠어요?”

“괜찮았습니다.”

경준이 지극히 사무적으로 대답하며 냅킨 쪽으로 손을 뻗었다. 냅킨 통에 더 가까이 앉아 있던 서하는 얼른 두 장을 뽑아 한 장을 경준에게 건네곤 남은 한 장으로 입가를 톡톡 두드려 닦았다.


“대리운전 부르겠습니다. 조서하 씨는 제가 모셔다드릴 테니 대표님은 편히 들어가시죠.”

이승오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경준은 계산하고 기다리겠다며 먼저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내가 걱정할 필요는 없었네.”

문이 닫히고 잠시 후, 이승오가 씩 웃으면서 술잔 두 개를 채웠다.


“딱 한 잔만 하고 가요. 우리 둘만 있을 때.”

서하는 별말 없이 술잔을 들어 그의 잔에 부딪히곤 한 모금 마셨다.

쓰고 비렸다. 함께 자주 오던 식당에서 자주 먹던 메뉴를 먹고, 자주 마시던 사케를 마셨는데 이렇게 맛이 다를 수 있는 건지 신기했다.


“술을 많이 못 하나 봐요. 서하 씨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컨디션 때문에…….”

이승오가 테이블 가운데에 한 손을 짚고 일어나 서하의 턱을 잡았다. 서하는 끔찍하고 징그러운 기분에 비명이 튀어나올 뻔한 걸 겨우 참았다.


“대표님.”

“내가 지시한 일이긴 한데. 그래도 보고 있으니 기분은 더럽네.”

이승오가 닫힌 문 쪽을 힐긋 보곤 서하의 턱을 좀 더 당겼다.


“조서하 씨가 진심으로 관심 있는 쪽은 나잖아. 류경준이 아니라. 그렇지?”

불안하진 않았다. 이승오가 좀 더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 류경준이 불러 줄 것 같았으니까. 근거 없는 믿음이긴 했다.

이승오가 고개를 약간 옆으로 틀었다. 그 순간, 근거 없는 믿음이 이루어졌다.

-똑똑.


“나오시면 됩니다, 대표님.”

쯧, 하고 이승오가 혀를 찼다.


“타이밍 기가 막히네.”

서하의 턱을 놓고 일어선 이승오가 앞장서서 재킷을 챙겼다. 서하도 뒤따라 일어나 미닫이문을 열었다. 일단 외부와 차단된 공간에 이승오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대단히 불쾌한 탓이었다.

가게 앞에는 이승오와 류경준이 타고 온 차 두 대가 나란히 주차되어 있었다. 서하가 가 보겠다고 인사하고 경준의 차 뒷좌석에 올라타자 경준이 당연한 듯 그 옆에 앉았다.

탕, 문이 닫혔다.

짙은 선팅 너머로 불쾌감 짙은 이승오의 표정이 보였다.


“이승오 씨랑 꽤 재밌는 얘기를 하던데.”

타자마자 던진 경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뻔했다. 그래도 서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오리발을 내밀어 보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나한테 좋아한다느니 하면서 뜬금없이 헛소리한 게 그것 때문이었겠지?”

무슨 의미인지 너무 뻔해졌다. 서하는 오리발을 쿨하게 집어넣었다.


“맞아요. 그건 미안하게 됐어요. 어쨌든 류 비서님이 받아주진 않았으니까 손해 본 건 없는 셈 쳐요.”

“역시 뻔뻔해. 아주 안하무인이라니까.”

“그런 말을 칭찬처럼 하지 마요.”

“그래서, 정확히 무슨 거래를 했지?”

여기까지 걸린 마당에 비밀 지킬 필요는 없다만, 그래도 마음에 걸린다. 서하가 머뭇거리는 동안 경준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잡혔다가 점점 더 깊어졌다.


“상당히 중요한 거래였나 봅니다. 나한테 말 못 할 만큼.”

“중요한……. 거래였긴 한데.”

또 한참 머뭇거리던 서하는 이내 마음을 다잡고 뻔뻔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류 비서님을 유혹해 달래요.”

경준이 하, 하고 코웃음 쳤다. 아까 들은 얘기라도 상당히 기가 막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약점이나 치부를 알아내 달라고. 그러면 자기가 중요한 거래에서 좋은 조건을 끌어낼 수 있다고.”

“대가는?”

“대가를 제안받긴 했어요. 나는 필요 없다고 했고.”

“무슨 대가였길래?”

“이지수처럼 만들어준대요. 팀장 달고, 명품 두르고 다니게 해준다고.”

“어이가 없네.”

경준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고작 그거라고? 나를 꼬셔서 좋은 값에 거래 성공한 대가가 고작 팀장에 명품? 이지수? 그걸 지금 조서하 씨는 좋다고 네, 한 겁니까?”

“내가 언제 좋다고 네, 했어요? 뒤에 대가는 안 받는다고 했다니까!”

“당신 같은 사람이 제일 위험한 거 알아요?”

경준이 불쑥 몸을 가까이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뒤로 피해 보지만 한정된 공간에서 멀어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비누 냄새라던 은은한 체취가 갑자기 라일락 향기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숨을 가렸다.


“뭐, 뭐예요?”

“이렇게 순박한 얼굴 뒤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잖아. 사실 깜박 속았거든. 어찌나 연기를 잘하는지, 난 진짜로 조서하 씨가 날 좋아하는 줄 알았어.”

말문이 탁 막혔다.

그건 연기였다. 하지만 완벽하게 연기였다고 말할 수 있나.

인공위성이 빛나는 도시의 밤하늘 아래에서,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비누 냄새가 실려 왔을 때 아주 조금도 두근거리지 않았다고 누가 장담하지?

서하의 속눈썹이 천천히 내려갔다가 올라갔다. 두어 번 눈을 깜박이는 사이 경준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날카롭게 긴 눈초리, 높고 곧게 내려온 콧대, 조금 얇아 신경질적인 입술.

이 남자와 키스하면 어떨까.

문득,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서하의 속눈썹이 두 번 더 내려갔다가 올라갔다. 그 속도만큼 느리게 경준이 또 가까워졌다.


“우리도 거래 하나 할까.”

경준이 아주 낮고 단조롭게 입술을 달싹였다. 차가운 체취와 비누 향기에 섞여 아까 마신 사케 냄새가 물씬 풍겼다.


“말해 봐.”

“계속 연기해. 내가 기꺼이 넘어간 척해 줄 테니까.”

“왜?”

“재밌을 것 같으니까.”

경준의 입술 끝이 삐뚜름하게 휘었다.


“나 그 머저리 새끼 x나게 싫어하거든. 뒤에서 열심히 대가리 굴리고 낄낄거리다가 뒤통수 맞았을 때 표정을 보고 싶어. 그 새끼, 뒤통수 친 적은 있어도 맞은 적은 없을 거잖아.”

이승오가 뒤통수를 치던 현장에 류경준도 있었다.

또 쓸데없이 고맙다. 이렇게까지 윤서하 편 들어 줄 사람이 지금 누가 있어.


“대가는?”

“없어. 굳이 조서하 씨가 원한다면, 그 원하는 거 하나는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들어 주지.”

“좋아.”

서하는 방어하듯 앞으로 모으고 있던 손을 들어 경준의 뺨에 대었다. 움찔하는 반응이 손끝으로 느껴졌으나 그가 손을 쳐내거나 피해 물러나지는 않았다.


“키스해 봐.”

아주 살짝 벌어진 서하의 입술 사이로 명령 같은 속삭임이 흘러나오자 경준이 피식 웃었다.


“필요에 의해서?”

“성공적인 거래를 위해서.”

“괜찮네.”

경준이 서하의 입술을 짓누르듯 삼켰다.


이 남자와 키스하면 어떨까, 했던 상상은 그렇게 너무 빨리 이루어졌다. 얼음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처럼 차갑고, 또 너무나 뜨거운 키스였다.

경준이 한 손으로 서하의 뒷머리를 잡아 끌어당기며 한 손으로 창문 버튼을 찾아 눌렀다. 서하는 가늘게 눈을 뜨고 사이드미러를 흘끔 쳐다봤다.

이제 막 도착한 대리운전 기사와 이승오가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한 입 먹은 핑크색 마카롱이 생각났다.

빌어먹을 마카롱.

서하는 마카롱을 베어 물듯 경준을 깨물었다. 아릿한 통증에 경준이 읏, 하고 조그맣게 신음하더니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창문이 열렸네.”

누가 누구보고 뻔뻔하다고 한 건지. 그는 태연하게 이승오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닫힘 버튼을 눌렀다.


“머저리 새끼.”

나직이 뇌까리는 경준은 드라마 속 사악한 빌런같았다.


“만족해?”

“아직.”

밖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 분위기에 타도 될지 고민하는 대리운전 기사였다. 경준은 운전석 쪽 창문을 조금 내리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잘해봅시다. 이중 스파이.”

어디로 갈지 묻는 기사의 목소리 밑에 경준의 웃음이 낮게 깔렸다.

찢어지게 가난한 티가 팍팍 나는 서하의 옥탑방으로 향하는 내내 경준은 고개를 돌리고 창밖만 보고 있었다.

서하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차라리 그 침묵이 편안했다.


“저기, 계단 앞쪽에 세워주세요.”

경준이 익숙하게 주차할 곳을 가리켰다. 당연하게 혼자 내리려던 서하는 또 당연하게 함께 내리는 경준을 보고 손사래를 쳤다.


“타고 바로 가요. 혼자 올라갈게요.”

“강 대표님 뵈러 가는 거니까, 착각 금지.”

경준은 대리운전 기사에게 삼만 원을 건네곤 앞장서서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깜박거리는 주황색 가로등 뒤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밤하늘엔 어김없이 인공위성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서하는 경준의 그림자를 밟고 걸음을 옮기면서 쓸데없이 뛰려는 가슴을 지그시 눌러 가라앉혔다.

조서하한텐 미안한 일이지.

아직 화끈거리는 입술이 남의 것인 양 낯설었다. 엄밀히 말하면 남의 것이기도 하고.

서하는 손등으로 슬쩍 입술을 문질렀다.

그래도 잠깐만 더 쓸게, 조서하 씨. 내가 깨어난 후에 당신을 어떻게 깨워야 하는지는 알아내야 할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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