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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은 고양인 줄 알았는데!-4화 (4/116)

4화

“싫으면 말고.”

뭐가 문제냐는 표정으로 말한 세리아는 의외로 간단하게 유엘을 놓아줬다.

그제야 유엘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곧이어 들려온 질문에 또다시 난처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근데 유엘, 왜 내가 싫어?”

천진한 눈망울을 마주한 유엘은 심장이 바늘에 콕 찔린 것처럼 뜨끔했다.

이리저리 불안하게 흔들리던 푸른 눈동자는 결국 갈피를 잡지 못했고, 하는 수 없이 유엘은 황급히 눈꺼풀을 질끈 닫으며 변명했다.

“그, 그건……. 네가 날 좋아한다고 하니까……!”

“그래서 내가 싫은 거야?”

네가 날 좋아해서, 내가 널 싫어한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애초 싫어한 적은 한순간도 없었다. 그저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

명쾌하게 나온 속마음을 애써 외면한 유엘은 할 말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맞아, 그래서 네가 싫어.

만약 이렇게 말한다면 세리아가 더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 이상하다. 그건 또 싫었다.

“……너는 나보다 키가 크잖아.”

결국, 유엘이 생각해 낸 답이라곤 이런 초라하고도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세리아는 유엘보다 키가 조금 더 컸기에, 또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큰 게 아니라 네가 작은 거야.”

그래서 세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렇게 답했다.

성장이 더딘 세리아가 또래보다 키가 클 리가 없었다. 그러니 ‘네가 작다.’라는 말은 다분히 맞는 말이었으나, 소년의 가슴에 상처를 내기엔 충분했다.

순식간에 벌거벗겨진 기분이 든 유엘은 수치심에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어쨌든 난 나보다 큰 사람은 싫어!”

그렇게 울듯한 목소리로 말한 유엘은 여느 때처럼 몸을 돌려 도망칠 준비를 했다.

그러나 문득 떠오른 기억에, 그는 달리는 대신 슬금슬금 속도를 낮춰서 앞서 걷는 걸 택했다.

그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세리아는 흐응- 콧바람을 내쉬며 고민했다.

‘하지만 내가 작아질 수는 없을 텐데.’

그러니까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고, 그게 세리아에게 묘한 희망을 안겨 줬다.

자신보다 키가 커서 싫은 거라면, 유엘이 저보다 키가 더 크면 해결될 일이었으니까.

세리아가 생각하기에 이건 너무도 간단한 일이었다.

그래서 세리아는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해맑게 말했다.

“유엘, 얼른 키 커야 해!”

“시, 싫…… 몰라!”

제 발 저려 평소처럼 싫다고 말하려던 유엘은, 그래도 키는 크고 싶었는지 새초롬하게 대꾸했다.

그러니 오늘부터 우유를 더 많이 마셔야겠다고 생각한 건 절대 말 못 할 비밀이었다.

그 뒤로도 비슷한 날들이 이어졌다.

세리아는 좋다고 따라다니고 유엘은 싫다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전과 달리 유엘이 뛰질 않으니 세리아도 느긋하게 걸으며 뒤를 쫓았으나, 어쨌든 쫓고 쫓긴다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저렇게 재밌으실까.’

물론 주변 사람들은 둘을 신기하게 바라보곤 했다.

매일같이 저런 추격전이라니 질리지도 않을까.

그런 생각이 종종 들곤 했으나, 애당초 열 살의 놀이를 어른의 시각에서 이해하긴 힘든 법이다.

어쨌든 시간은 흘렀고 유엘이 떠날 시기도 다가왔다.

그건 곧, 둘이 원하든 원치 않든 이 관계를 끝맺을 때란 뜻이다.

* * *

세리아는 잔뜩 뚱한 표정으로 제 발끝만 바라봤다.

양 볼에 바람을 빵빵하게 넣고 미간을 힘껏 구긴 채 온몸으로 서운함을 표했다.

그렇다 한들 유엘이 탈 마차가 갑자기 고장 나지도 않았고, 분주하게 짐을 싣는 시종들이 갑자기 낮잠에 빠질 리도 없었다.

유엘이 떠나는 걸 막을 순 없다. 세리아도 이미 아는 사실이지만, 이별은 준비한다고 해서 준비되는 게 아니었다.

“우리 리리, 슬퍼용?”

가뜩이나 심란한데 어느새 슬금슬금 다가온 마롱은 세리아를 툭툭 건드리며 그 화를 돋웠다.

여전히 고개를 떨군 채, 세리아는 스산하게 눈을 흘겼다.

건드리지 말라는 마지막 경고였지만, 그걸 들을 마롱리가 아니었다.

“리리가 슬프면 오빠도 슬퍼용.”

“…….”

“이것 참, 어쩔 수 없네. 슬픈 막내를 위해서 오빠의 찐한 뽀뽀라도…….”

“아, 쫌!”

버럭 화를 낸 세리아는 마롱의 발등을 힘껏 내리밟았다. 동시에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른 마롱은 비틀거리며 옆으로 몸을 피했다.

밟힌 발이 사뭇 찌르르한지 한쪽 발로 콩콩 뛰며 중간중간 “끄억…….” 하는 미약한 신음도 흘렸다.

곁에 있던 다른 형제들은 “저건 체통도 모른다.”라며 혀를 쯧쯧 차고 말았다.

“세리아.”

한껏 씩씩거리던 세리아는 돌연 들리는 유엘의 목소리에 몸을 크게 움찔했다.

난데없이 왈칵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아서, 입술을 안쪽으로 한껏 말아 냈다.

그러다 고개를 획 든 세리아는 유엘을 힘껏 노려봤다.

그 형형한 눈빛에 당황한 듯 유엘은 미약하게 주춤했지만, 그뿐이었다.

“왜.”

“나 이제 갈 거야.”

“알아.”

오늘만큼은 둘의 태도도 달랐다. 세리아는 심술이 잔뜩 난 표정으로 뾰로통하게 대했다.

그에 비해 유엘은 놀라울 정도로 담담했다.

지난 일주일간 밤마다 울었던 덕에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를 수 있던 거지만, 세리아가 그 속내를 알 리 없었다.

“그동안 재밌었어.”

“나 싫다며.”

그간 세리아는 잘 몰랐던, 유엘 특유의 예의 바른 태도가 영 마음에 안 드는 건지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반박했다.

속마음을 가늠하듯 눈꼬리를 날렵하게 늘어뜨리자, 유엘은 괜스레 헛기침한 뒤 나지막이 답했다.

“싫어하지 않아.”

그러고 못내 쑥스러운 듯 검지로 볼을 긁적이다가 시선을 피하며 뒷말을 뭉개듯 발음했다.

“……너도 알잖아.”

그러나 그 목소리는 너무도 작았고 세리아 역시 섭섭함에 빠져 있느라 고백 아닌 고백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어쨌든 마무리를 지어야겠다는 생각에 유엘은 목 뒤를 가볍게 비비며 말했다.

“다음에 또 보자.”

“언제?”

세리아는 기다렸다는 듯 뚱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언제 또 올 건데?”

“글쎄…….”

“내가 널 잊으면 어떡해.”

난감했다. 만약 ‘네가 날 잊으면 어떡해.’라고 말했더라면, 유엘은 꽤 의젓하게 ‘그럴 일은 없어!’라고 받아쳤겠지만.

“그…… 그건 어떡할 수가 없네.”

정말로 유엘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게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세리아라면 충분히 자신을 잊고도 남을 것 같았다.

지금이야 서운해한다지만 분명 한 달만 더 지나도…….

“……편지!”

“응?”

“편지하든지.”

그런 생각이 들자 다급해진 유엘은 재빨리 방법을 알렸다.

덕분에 애써 담담하게 굴던 태도를 잃었으나,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세리아의 표정이 한결 풀렸다는 것. 그게 유엘에게 가장 중요했다.

“응, 편지할게.”

세리아의 대답에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인 유엘은 마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발걸음으로 애써 마차까지 다다르자, 금세 밝아진 세리아가 손을 휘휘 저으며 소리쳤다.

“유엘, 다음에 볼 땐 나보다 키 커야 해!”

그래서 나 좋아해야 해?

꼭 그 뒷말이 들리는 것만 같았기에 유엘은 하얀 손가락을 안쪽으로 굽어 냈다.

부끄럽지만 수치스럽지는 않은, 오히려 다정한 감각이 그를 부드럽게 감싸는 듯했다.

“모, 몰라!”

여느 때처럼 앙칼지게 답하자, 주변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웃음을 터트렸다.

비록 둘만의 암호를 알진 못했지만, 귀여운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절로 흐뭇해졌으니 말이다.

“나중에 또 놀자!”

세리아가 눈을 곱게 휘며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마치 햇살이 부서지는 것 같은 화사한 작별 인사였다.

그 해사함에 유엘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가 황급히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세리아의 저런 말간 웃음을 볼 때면, 도통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뭐…… 그러든가.”

그래서 기어가듯 작게 대꾸한 유엘은 발개진 볼을 감추기 위해 후다닥 마차에 올라탔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게 슬픈 건지 기쁜 건지, 애매하기만 했다.

“세리아, 너무 슬퍼 마.”

짐짓 위로하는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그에 이끌리듯 유엘이 슬쩍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첫째 오빠가 세리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도 사귀면 되지.”

쿵.

잔인하게도 그 말을 듣자마자 마차 문이 닫혔다.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린 유엘은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마차 창문에 얼굴을 밀착했다.

어찌나 방음이 잘되는지, 애석하게도 그 뒷말은 하나도 들리질 않았다.

“!”

하지만 창문 너머로 환히 웃는 세리아의 얼굴만은 선명하게 보였다.

그 표정을 마주하자 유엘은 속 안에서 무언가 와르르 무너지는 걸 느꼈다.

“세, 세리아!”

방금까지만 해도 분명 속상해했잖아!

그 강렬한 배신감에 유엘은 서둘러 마차 창문을 내리기 시작했으나, 하필 수동식 손잡이인지라 한참을 빙글빙글 돌려도 문은 느긋하게 내려올 뿐이었다.

“세리-!”

하는 수 없이 조금 열린 창문 틈 사이로 유엘은 입술을 들이밀며 세리아를 불렀다. 아니, 부르려 했다.

때마침 마부가 혀를 차며 말을 몰기 시작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세리아…….”

유엘은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보며 세리아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여전히 세리아는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마차가 떠나는데도!

이윽고 풍경이 바뀌기 시작하고 더는 세리아의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벌써 다른 친구로 갈아타는 거야?’

내가 좋다고 했으면서!

한껏 울상을 지었지만, 건너편에 앉은 후작은 허허 웃고 말 뿐이었다.

유엘은 지금 이별과 배신감에 뼈저린 슬픔을 겪고 있었지만, 그의 아버지 눈에는 그저 아이들의 귀여운 작별 인사로 내비칠 뿐이었으니 말이다.

‘정말로 나를 잊으면 어떡하지.’

유엘은 초조하게 손가락을 튕기며 생각했다.

새 친구를 사귀게 된다면, 분명 저 같은 건 금방 잊고도 남을 테다…….

‘아니야, 편지하겠다고 했으니까.’

그래. 편지를 주고받으면 금방 날 잊지는 못하겠지. 그러다가 나중에 또 만나서 놀면 되고.

찰나에 떠오른 희망에 유엘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잘 도착했다고 편지를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어?”

한편, 세리아는 이미 마차가 떠난 길을 멀뚱히 바라보며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나 글 못 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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