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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은 고양인 줄 알았는데!-6화 (6/116)

6화

그들과 처음 만날 때만 하더라도 그녀는 유엘에게 다가갔던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니까 최대한 살갑게 굴었고, 그 덕인지 조금이나마 친해졌다고 생각했다.

서툴게 대한 점도 없잖았으나, 그들은 여전히 친절하게 화답했다. 비록 유엘과는 또 다른 과한 친절이 썩 편하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때문에 세리아는 마음을 놓았었다. 친구는 이런 거구나, 그런 생각마저 들었었다.

방금 들었던 뒷얘기가 부풀 마음을 깡그리 짓밟아 놓기 전까지는.

“몸이 아프다니 아무래도 어울리기 피곤하네요.”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뭐랄까, 성격이 좀.”

뒤따르는 웃는 소리가 심장을 꽉 조여 왔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세리아는 원치 않게 자신의 험담을 들어야만 했다.

아무리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세리아라도, 차마 ‘지금 내 흉 보는 거야?’라고 소리치며 나설 순 없었다.

대신 그녀는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숨죽인 채 뒷말을 엿들었다.

“어차피 곧 떠날 테니까요. 그때까지만 맞춰 주자고요.”

“아버님께서 하도 세리아 님과 친해져야 한다고 성화셔서 오긴 했지만…… 역시 친구로 지내긴 무리일 것 같네요.”

“근데 세리아 님은 우리를 친구로 생각하는 거 같더라고요. 의외로 순수하달까.”

“글쎄요, 전 좀…… 우습던데.”

돌이켜 보니 전에 스치듯 만났던 애들도 어딘지 모르게 저를 불편해하고, 계속해서 힘들진 않냐, 아프진 않냐 물어봤던 것만 같았다.

험담을 듣고 나니, 괜스레 그 애들도 자신을 욕하고 있던 게 아니었나 싶으며 절로 의기소침해졌다.

“내가 그렇게 걱정되면 그만 가. 내 병은 앉아서 떠들 때나 밖에서 뛸 때나 상관없이 갑작스레 찾아오니까.”

세리아는 결국 모임을 파할 수밖에 없었다.

다들 자신을 지체 높은 귀족 여식 아니면 환자로 대하니, 진짜 친구를 사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괜히 아프다는 걸 알렸나.’

그간 쉬쉬하던 세리아의 병증을 알리기 시작한 건 유엘과 헤어지고 난 뒤부터였다.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으나 혹여 저번처럼 갑자기 쓰러질 때를 대비해 넌지시 말해 왔는데, 옳은 판단이었는지 이젠 알 수 없었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유엘과 같은 친구를 또 사귈 수 있으리라 믿은 건 오만이었을지도 몰랐다.

물론 이런 상황이 저들의 잘못에서 비롯된 게 아니란 건 알았다.

부모에게 떠밀려 억지로 나온 자리이니 -물론 세리아는 지금에야 알게 됐지만- 진심으로 자신과 어울릴 수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희소병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처지가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나 세리아는 그들과 맞추면서까지 어울리고 싶진 않았다.

어쩌면 유엘이라는 믿는 구석이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자신감일지도 몰랐다.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오늘따라 유독 ‘진정한 친구’의 빈자리가 크게만 느껴진 탓이다.

‘유엘이랑 놀 때는 날마다 재밌었는데.’

돌이켜 보면 유엘은 저런 따분한 얘기를 하지도 않았고, 자신에게 깍듯이 대하지도 않았으며, 조심스럽게 굴며 환자 돌보듯 행동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뒤에서 험담할 사람도 아니었다.

이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일뿐더러, 유엘을 직접 본 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사실이었다.

그래서 세리아는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또래 친구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더 유엘이 그리워지는 거였다.

‘그러고 보니 요샌 편지도 좀 뜸한 거 같은데.’

유엘도 나를 그리워하긴 할까.

이틀에 한 번씩 오던 편지는 이제 일주일이 지나서야 도착하곤 했다.

세리아는 전에 받은 편지를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삐죽였다.

만약 유엘이 자신에게 소홀해진다면, 달려가서 혼구멍을 내주고 싶을 만큼 속상할 것 같았다.

“지루해…….”

무미건조하고 지루한 나날들.

유엘을 안 이후로는, 결코 그 이전의 날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땐 이렇게 지루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재밌는 게 뭔지 알아 버렸으니 따분함이 배로 느껴질 수밖에.

세리아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무기력하게 침대에 늘어져 있을 때였다.

“세리아, 들어가도 될까?”

“응.”

문을 두드리고 들어온 가리는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제 막냇동생 곁으로 다가왔다.

“왜 그러고 있어?”

“심심해서.”

“친구들하고 노는 건 재미없어?”

“엄청.”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은 세리아는 시큰둥하게 답했다.

따분하고, 지루하고, 누군가가 그립기만 한 일상. 어쩌면 상처를 치유할 시간이 필요한 순간들.

가리는 절로 느껴지는 세리아의 무기력감이 조금은 귀엽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여느 때처럼 입술에 호선을 그리며 세리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퍽 달콤한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였다.

“같이 갈까?”

그 말에 세리아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어디’에 가자는 건지 정확한 장소는 말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마침 그 근처에 볼일이 있거든. 레이디 키티와 열흘 뒤에 만남이 있어.”

키티 세번스는 가리의 약혼녀였다.

물론 세리아는 그의 오빠가 약혼녀를 만나든 말든, 심지어는 약혼녀가 누구인지도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유엘도 거기 와?”

그곳에 유엘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오는 건 아니고. 세번스 백작의 저택에서 지낼 건데, 근처에 리커드 후작 가문이 있어.”

“정말?”

“네가 간다면 리커드 후작에게 서신을 보낼 생각인데, 혹시 갈…….”

“당연하지!”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세리아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방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리고 저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가리를 뒤로한 채, 유엘에게 처음으로 답장을 하기 위해 편지지를 서랍에서 꺼냈다.

“유엘에게 편지 쓰는 거야?”

“응.”

그렇게 대답한 세리아는 펜촉을 갖다 대기 무섭게 무언가를 휘갈겨 쓴 뒤, 금세 편지를 동봉할 준비를 했다.

대체 무슨 내용을 쓴 걸까.

가리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지만, 세리아는 씩 웃을 뿐이었다.

* * *

“유엘, 좋은 소식이로구나. 케스터 공작 가문의 장남, 가리 케스터 공자 기억하니?”

“네, 아버지.”

“공자께서 저택을 방문한다고 하시는구나.”

후작의 말에 유엘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냥한 표정과는 달리 무섭게 느껴졌던 가리 케스터. 세리아를 아끼는 오빠라는 게 인상 깊었지만, 그의 방문이 좋은 소식일 만큼 유엘은 그와 친분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자, 받거라.”

그런 유엘의 반응을 예측했다는 듯, 후작은 허허 웃으며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그에 홀린 듯 편지를 덥석 받은 유엘의 눈이 단숨에 커졌다. 동시에 설마 하는 표정이 얼굴에 다분히 나타났다.

“직접 읽어 보는 게 낫겠구나.”

세차게 고개를 끄덕인 유엘은 조급한 마음과는 달리 조심스럽게 편지지를 열었다.

편지에는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았고, 예의라곤 눈곱만큼도 차리지 않았으며, 글씨체도 어마어마한 악필이었지만.

그렇지만, 유엘은 그 어느 때보다 활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간다.」

이건 분명히, 세리아였으니까.

* * *

“오빠! 빨리, 빨리!”

세리아는 가볍게 뛰어다니며 가리를 재촉했다.

본격적으로 길을 떠난 세리아는 하루 꼬박 마차를 타고서야 세번스 백작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로 일주일간 꼼짝하지 않고 저택에 있어야만 했다. 그게 초대해 준 약혼녀에 대한 예의라나 뭐라나.

어쨌든 세리아는 얌전하게 일주일을 보냈다. 그리고 약속된 시간이 되자, 누구보다 빠르게 유엘의 집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그래, 이제 출발하자.”

가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세리아는 마차에 올라탔다.

그녀가 하도 빨리 출발해 달라고 성화한 덕에 마부도 금세 말을 몰기 시작했고, 유엘의 저택에 생각보다 더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너무 일찍 온 건 아닌가 걱정했더니.”

가리가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반듯한 리커드 후작 가문답게, 그들은 미리 나와서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유엘-!”

창문을 허겁지겁 내린 세리아는 얼굴을 불쑥 내밀며 소리쳤다. 오랜만에 본 유엘은 멀리서 봐도 반갑기만 했다.

“머리 넣어, 세리아.”

위험하잖아.

짧게 타박한 가리는 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세리아는 치, 하고 작게 반항할 뿐 순순히 내뺀 얼굴을 집어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는 리커드 저택의 정문 앞에 멈춰 섰다.

먼저 내린 가리가 세리아를 번쩍 안아서 바닥에 내려 주자, 수많은 시종이 고개 숙이며 그들을 맞이했다.

“이리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흔쾌히 맞아 주시니 제가 감사하죠.”

가리와 후작이 기분 좋게 웃으며 악수하는 사이, 세리아는 발을 동동 구르며 당장이라도 유엘에게 달려가고 싶은 욕구를 참아 냈다.

뽀얀 피부는 여전히 말랑해 보였고 뱀의 표피처럼 매끄러운 흑발은 언제나처럼 눈길을 사로잡았다.

세리아가 가리의 옷자락을 붙잡고 안절부절못하자 그는 픽 웃으며 턱짓을 했다.

그건 곧 유엘에게 가도 된다는 신호였기에, 세리아는 순간적으로 뛰쳐나가 유엘을 덮쳤다.

“유엘!”

“세리…… 윽!”

말릴 틈도 없이 달려간 세리아는 그대로 유엘을 덥석 껴안았다.

덕분에 얼굴이 새빨개진 유엘은 목이 졸릴 정도로 꽉 끌어안은 세리아를 차마 떨어트리지도, 그렇다고 안지도 못한 채 허공에서 손만 휘저었다.

“잘 지냈어?”

“으, 응. 근데 좀 놓아주면…….”

“안 돼!”

단숨에 거절한 세리아는 유엘을 더욱 세게 안았다.

유엘은 눈앞이 핑핑 도는 걸 느꼈지만, 가리와 후작은 그저 흐뭇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어라?’

세리아는 여전히 유엘을 끌어안은 채, 그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작은 여자아이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지?’

소녀의 새까만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왔고, 호수를 닮은 눈동자는 보석처럼 반짝였다.

잠시 고민하던 세리아는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아.” 하고 감탄했다.

‘누가 봐도 유엘 동생이잖아?’

이토록 유엘과 닮았을 수가! 다시 찬찬히 살펴보니, 곧장 깨닫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였다.

“안녕? 난 세리아야.”

단숨에 소녀가 마음에 든 세리아는 유엘을 껴안았던 팔을 풀고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

그에 아직 예법에 서툰 소녀가 머리를 까딱이며 가볍게 인사를 건네던 때.

“세리아?”

“응?”

“이름이 세리아야?”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눈을 커다랗게 뜨고서 물었다.

“응, 맞아. 세리아 케스터. 세리아라고 불러 줘.”

그리고 자신의 물음에 완벽한 답을 얻게 되자, 소녀는 장난기 섞인 묘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오빠가 꿈에서 찾던 언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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