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푸읍-!”
그와 동시에 마롱이 먹던 음식을 그대로 뿜어 버렸고, 옆에 있던 라류리는 “아, 더럽게…….”라고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롱은 식탁을 쾅 내려치며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마롱, 식사 예절을 지켜야지.”
“아니! 예의를 못 차릴 말을 방금 들었잖아요!”
퍽 충격적이었는지 마롱은 마치 벌레가 기어가는 모습을 보기라도 한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공작 부부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후후 웃을 뿐이다.
‘원래 저 나이대 애들은 으레 저런 말을 하곤 하지.’
그리 생각한 두 사람은 세리아를 바라보며 장난스레 한마디씩 주고받았다.
“그래, 유엘 그 애가 참 착하고 바르더라.”
“게다가 리커드 후작 부부의 성품은 유명하지. 가문에서 배출한 수많은 학자는 또 어떻고.”
“아, 엄마! 아빠까지 왜 그래!”
마롱이 펄펄 뛰며 나서는 동안 나머지 네 형제는 재밌다는 눈으로 서로를 훑어봤다.
방금 세리아의 말이 어린아이의 충동과 다를 바 없다고 여기는 표정이었다.
“생각해 보니 유엘이 신랑감으론 괜찮네. 괜히 황실 측과 엮였다간 세리아가 힘들 수도 있고.”
“세리아가 보통 자유로운 영혼이 아니니까.”
그러는 와중에도 공작 부부는 신이 나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제 귀여운 막내딸이 벌써 신랑감으로 삼고 싶어 하는 남자애가 생겼다는 사실이, 또 그에 펄펄 뛰는 아들내미가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라도 하는 듯했다.
“가문 좋고, 부모도 믿을 만하고. 게다가 유엘처럼 성격 좋고 귀여운 애도 드물지.”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는 사이니, 안면도 없는 사람과의 정략결혼보다야 나을 테고.”
한마디씩 너스레를 주고받는 걸 듣고 있자니, 쿵짝이 너무 잘 맞아 되레 진지하게 들릴 정도였다.
그렇게 가벼운 분위기에 들뜬 가족이 신이 나 너도나도 한마디씩 덧붙일 때였다.
“안 돼요.”
잠자코 듣고 있던 둘째, 나제리가 대뜸 진지하게 대꾸했다.
“세리아 남편은 드래곤이어야 하니까요. 유엘 리커드가 드래곤이 된다면 모를까.”
“제리 형 말이 맞아. 하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리커드 가문에서 드래곤이 나온 적은 없으니까.”
“얘들도 참, 재미로 하는 말이지.”
“세리아는 진심으로 받아들일 테니 하는 말이죠.”
그 말에 공작 부부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세리아 쪽을 흘긋 바라봤다.
세리아는 제리의 말마따나 정말 진심으로 한 말이었고, 그를 방증하듯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제 불만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깟 드래곤 필요 없어. 난 드래곤 싫다고!”
“왜 드래곤이 싫은데?”
“오빠들 다 드래곤 될 거잖아!”
세리아가 빼액 소리치자, 그녀의 오빠들은 적잖이 충격받은 듯 동공을 크게 확장했다.
어떤 이는 포크를 땡강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그, 그래서 싫다고?”
“아니, 오빠들이 뭐가 어때서!”
“싫어. 유엘은 약해 빠진 고양이라서 좋다고.”
괜히 뾰로통해진 세리아가 툴툴거리면서 말하자, 제리가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래도 네 병을 위해선 남편이 꼭 드래곤이어야 해.”
그리고 세리아가 다시금 무어라 말하기 전, 영리하게 뒷말을 덧붙였다.
“싫으면 오빠들이 평생 우리 리리 곁에 꼭 붙어 있을 건데, 그래도 좋아?”
윽.
그건 싫은지 말이 없었다.
딱히 이기자고 한 말은 아니었으나, 세리아의 침묵에 오빠들은 어쩐지 상처받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저런 이유를 떠나서라도, 세리아. 수컷은…… 남자는 말이야. 진득하게 지켜볼 필요가 있어.”
그 모든 광경을 유유히 지켜보던 가리는 생긋 웃으며 아이 달래는 투로 조곤조곤 발언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성장하면서 성격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단 뜻이지.”
“언제쯤 변하는데?”
“발정기.”
“야.”
마롱의 거침없는 말에 셋째 다노가 눈을 가늘게 뜨며 타박했다. 그 와중에도 가리는 평온하게 말을 정정해 줬다.
“사춘기가 지나고, 그러니까 2차 성장이 있을 때쯤. 그때 크게 변할 확률이 높지.”
“난 적어도 성인이 될 때까진 지켜봐야 한다고 봐. 3차 성장 이후로 맛 가는 놈들도 종종 있다고.”
넷째 류의 말에 세리아는 고개를 양옆으로 세차게 저었다.
“유엘이 그럴 리 없어.”
확신이 가득한 말과 표정은 세리아가 유엘을 얼마나 믿는지 잘 보여 줬다.
제 순진한 친구가 변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유엘은 커도 유엘일 테니까.”
그 자신만만한 말에 다섯 오빠는 잠시 침묵했다.
변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추측을 굳이 우길 필요가 없다고 느낀 탓이다.
대신 그들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세리아를 바라봤다. 개중 몇은 한쪽 턱을 괸 채 아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 막내가 쭉 순수했으면 좋겠다.”
“걱정 마, 리리. 오빠들이 지켜 줄 테니까.”
“필요 없어.”
새침하게 답한 세리아는 포크로 생선을 푹 찔렀다. 머릿속엔 온통 유엘과 하루빨리 결혼할 생각뿐이었다.
* * *
며칠 뒤 세리아는 다시 유엘을 만날 수 있었다.
세리아도 유엘도 서로 너무 아끼니, 양측 부모 모두 적극적으로 두 사람이 만날 기회를 주고자 노력한 덕이다.
간만에 세리아의 정원으로 놀러 온 유엘은 기쁘게 세리아에게 달려갔다.
늘 세리아의 반대쪽으로 뛰기 바빴던 예전의 모습과는 그야말로 정반대였다.
“세리아!”
단숨에 세리아 앞까지 뛰어온 유엘은 뒤늦게 벅찬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세리아의 얼굴을 살펴봤는데, 말끔해진 얼굴을 보고 나서야 안심이 되는 듯 해맑게 웃어 보였다.
“얼굴 다 나았네?”
“응. 진즉에 다 나았어.”
세리아 역시 유엘의 양 볼을 덥석 잡고서 요리조리 돌려 봤다.
다행히 유엘 역시 흉진 것 하나 없이 전처럼 말랑하고 뽀얀 피부가 돼 있었다.
그에 만족스러운 듯 “음, 음.”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이던 세리아는 유엘의 볼을 놓더니, 이번엔 유엘의 손을 맞잡았다.
“유엘!”
“으, 응?”
그 거침없는 기세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 박력 넘치는 목소리에 유엘은 살짝 당황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곧 차분하게 미소 지으며 세리아의 뒷말을 들을 준비를 했다.
그 표정이 너무도 부드러워서, 유엘은 꼭 어떤 말이든 들을 준비가 돼 보였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나랑 결혼하자!”
아무리 그래도 이건 예상치 못한 말이었지만 말이다.
“……뭐, 뭐?”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당황한 유엘은 저도 모르게 주춤 뒷걸음질을 치며 말했다.
한동안 멍하니 세리아를 응시하던 유엘은 자신이 방금 뭘 들은 건가 싶은 표정을 짓다가, 손을 허공에서 우왕좌왕 흔들며 더듬더듬 말했다.
“바, 방금 말 제대로 한…… 그러니까,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지?”
“그럼 이상하게 들었겠어? 나랑 하자. 응?”
“……결혼을?”
“응, 결혼.”
해사하게 웃은 세리아는 그에게로 한 걸음 더 성큼 다가갔다.
얼굴과 얼굴이 금방이라도 맞닿을 것처럼 가까워진 거리에, 유엘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켜 냈다.
“평생 나랑 살겠다며! 그럼 결혼해야지.”
물론 유엘이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니었으나, 또 완전히 다른 말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별달리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물고기처럼 입술만 벙긋거렸다.
유엘이 퍽 난감한 듯 쉽사리 답하지 못하자, 세리아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따지듯 물었다.
“뭐야, 그 반응은. 싫어?”
“아니! 아니야! 싫은 건 아닌데…….”
싫냐고 묻는다면 유엘이 할 반응은 정해져 있었다.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얼른 부정했지만, 못내 말끝을 흐렸다.
유엘은 보기보다 더 진중한 편이었고, 다소 아이답게 말한 세리아와 달리 견해 차에서 오는 거리감이 있는 것이다.
‘결혼하면 엄마 아빠처럼 지낼 텐데.’
귀족들은 대체로 정략결혼을 했기에 보통 부부 사이엔 사랑보단 책임감이 더 강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세리아나 유엘의 부모는 드물게 금실이 좋은 부부였다.
우선 세리아의 부모는 연애결혼을 한 것이지만 가문 간 사이가 좋아 결혼까지 과정이 수월했다.
유엘의 부모는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사이였으나, 두 사람의 성격이 잘 맞아 오히려 결혼 후 관계가 발전한 경우였다.
여하튼 제 부모가 사이가 좋든 말든 별 신경도 안 쓰는 세리아와 달리 유엘은 부모의 애정 행각에 때때로 얼굴을 붉히곤 했다.
‘지난번엔 뽀뽀도 하셨었지…….’
어쩌다 두 분이 입맞춤하는 장면도 목격하고 말았으니, 유엘에게서 쉬이 긍정의 대답이 나올 리 없었다.
무엇보다 유엘은 아직 제 아버지처럼 될 자신이 없었다.
언제나 든든하고 가족을 품어 주는 버팀목과 같은 존재.
만일 세리아와 결혼하게 된다면 자신이 그런 역할을 해야 할 텐데, 얼마 전 폭행 사건에서는 되레 얻어맞은 것도 모자라 세리아까지 휘말리게 했었다.
‘난 아직 자격이 없어.’
그러니 유엘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니었다.
물론 이 모든 건 유엘 리커드가 혼자 너무 심각하게, 또 너무 멀리 생각한 게 크게 작용했던 탓이지만.
“그…… 세리아, 약혼은 어때?”
“약혼?”
생각지도 못한 차선책에 세리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에게 결혼이란 개념은 꽤 명확했지만, 약혼에 대한 정보는 그다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리 오빠한테 약혼이 뭐냐고 물어볼걸.’
가족 중 유일하게 약혼한 사람인데 너무 무신경했던 걸까.
세리아가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을 때, 유엘은 늘 그래 왔듯이 차분하게 답해 줬다.
“응, 결혼은 나중에 하면 돼. 게다가 우리 나이 때는 다들 약혼한다고 하더라고.”
“그래?”
또래 얘기가 나오자 세리아는 자연히 할 말이 없어졌다. 친구라곤 유엘뿐이니 그런 소식을 알 리가.
결국, 세리아는 우선 한 발자국 물러나 수긍하게 됐다.
결혼이든 약혼이든 잘은 몰라도 둘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았기 때문이다.
“으응…… 근데 약혼은 어떻게 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