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저…… 그건 그렇고, 모임은 이렇게 끝나는 걸까요?”
“그렇겠지.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까.”
“저만 이렇게 아쉬운 걸까요? 저는 모임이 무척 즐거웠거든요.”
조목조목 생각을 표현하는 게 역시 두 살 동생이 아닌 동갑처럼 느껴졌다.
통통한 몸집의 동글동글한 소년을 응시하던 세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너 나 무서워했잖아.”
“예? 제, 제가요?”
“맞잖아. 스터디 중에 맨날 힐끗 쳐다보기나 하고. 그러다 눈 마주치면 깜짝 놀라서 모른 척한 거, 설마 모를 줄 알았어?”
“……관찰력이 대단하시군요. 수인은 원래 그런가요?”
“그냥 내가 그런 거야.”
그리 말한 세리아는 팔짱을 낀 채 변명을 들을 준비를 했다.
기세에 눌린 제이든은 우물쭈물하는가 싶더니,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그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세리아 님께서 분명 저번에 콱 물어 버릴 거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꼭 웅변대회에 나온 총명한 소년의 연설 같기도 했기에, 세리아는 짐짓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조랭이떡! 잘 들어.”
“……예, 예!”
“유엘한테 뭐라 하지 마. 콱 물어 버릴 거니까.”
음, 분명 그런 과거가 있기는 했다.
“그래서 저는 혹여나 세리아 님께서 갑자기 고양이로 변해서 절 물어 버리진 않을까 상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잠깐. 조랭이, 나는 고양이로 변하는 걸 안 좋아해.”
“그, 그런가요? 저는 수인이 아니라 잘 몰랐습니다.”
백작 가문의 삼남인 그는 수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런 오해를 혼자 할 법도 했다. 어쨌든 제이든은 그녀보다 동생이기도 했으니까.
‘착한 것 같기는 한데.’
섣부른 판단은 일렀다. 앞에서 착한 척하고 뒤에서 험담하는 애들을 이미 겪었으니 말이다.
세리아가 경계심 어린 눈으로 응시하자, 제이든은 작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스터디를 지속할 순 없을까요?”
“그런 말을 왜 마지막 날에 하는 거야. 이미 다른 애들은 떠났잖아.”
“하지만…… 세리아 님께선 남아 계시잖아요.”
“……너랑 둘이 하자고?”
“안 될까요?”
깜빡깜빡.
순진한 물음에 세리아는 잠시 그대로 정지했다.
저 기대감 가득한 눈빛이라니.
‘쟤는 나한테 매번 물리진 않을까 걱정했다면서.’
당혹감에 얼어 있던 세리아는 일순 ‘땡!’ 하며 움직이더니 소년의 어깨를 잡고 슬슬 밀기 시작했다.
“일단 오늘 모임은 끝났어.”
“어, 어어…….”
그 야무진 힘에 제이든은 제 몸만 한 책을 가슴팍에 꼭 껴안은 채, 문 쪽으로 질질 밀려났다.
“그러니까 우선 잘 가고!”
생긋. 상큼한 눈웃음과 함께 문 앞에 버려진…… 아니, 배웅받은 제이든은 눈앞에서 문이 쿵 닫히는 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단단하게 닫힌 문 너머로 간절한 외침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다음에 또 봬요-!”
그 말에 휴, 작게 숨을 내쉰 세리아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훑어 냈다.
어쩐지 피곤해질 예감이 들었다.
* * *
스터디도 끝나자 세리아는 한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유엘과 만났다가 헤어지면 고독하게 굴던 세리아도 이젠 홀로 잘 지내곤 했다.
그렇게 서로의 빈자리가 익숙해질 때쯤.
「요즘 사회봉사를 하고 있어.」
유엘의 근황이 담긴 편지가 도착했다.
「아버지께서 베풂은 귀족이 갖춰야 할 품행이라고 하셨거든.」
다분히 유엘다운 편지였다.
세리아는 곧 흥미가 떨어진 듯 편지를 쥔 채 침대 위를 뒹굴었다.
하릴없이 움직이던 그녀는 문득 일전에 어머니가 해 준 말을 떠올렸다.
“세상엔 열악한 상황 속에서 사는 아이들도 많단다, 세리아.”
결국엔 안하무인으로 자라면 안 된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었다.
당시의 세리아는 건성으로 듣고 넘겼으나, 어째서인지 지금 그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유엘도 뭔가를 한단 말이지?’
아무래도 친구가 하는 행동이라 흥미를 끌었는지도 몰랐다.
이 나이대 아이들은 친구가 하는 건 뭐든 따라 하고 싶어 했으니까.
무엇보다 자신은 곧 열한 살이었다. 뭔가를 시도하기에 좋은 시점이기도 했다.
‘유엘이 하면 나도 한다!’
결심한 세리아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의 장신구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귀한 공녀답게 작은 브로치나 목걸이, 하다못해 장난감 같은 머리띠조차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값비싸 보였다.
세리아에겐 익숙한 물건들이었기에 새삼 그 값어치가 재조명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걸 팔면 넉넉하게 받으리란 것 정도는 알았다.
“아, 답장해야지.”
소지품들을 왕창 꺼낸 채 의뭉스레 웃던 세리아는 일순 정신을 퍼뜩 차리고서 편지를 써 내려갔다.
「……아무튼, 네가 하는 일은 보통 재미없어 보였는데 이번 거는 재밌을 것 같아.」
비록 처음 시도해 보는 거지만, 유엘이 하는 거라면 분명 자신도 좋아하리라 믿었다.
「그래서 나도 시작해 보려고.」
편지의 마지막 줄을 쓰는 세리아의 얼굴에 색다른 설렘이 피었다.
「후원을 할 거야.」
“세상에, 우리 딸!”
세리아가 후원하고 싶다는 말을 꺼내자, 부모님은 감격에 찼다.
“잘 생각했단다.”
칭찬은 담백했고 목소리는 우아했으나 차마 눈빛만은 그렇지 못했다.
감동한 그들의 눈빛이 꼭.
‘언제 사람이 되나 싶더니, 어느새 이렇게 의젓해진 걸까!’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으니 말이다.
세리아는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도움을 요청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사가 후원 리스트를 건네줬다. 대부분 지역 보육원의 아이들이었다.
하나하나 살펴보던 세리아는 며칠 후 고심 끝에 한 아이의 이름을 말했다.
“이 애로 할래.”
“예,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공녀님, 후원자 명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보통 어떻게 하는데?”
“이름으로 해도 되지만, 익명으로 후원해도 된답니다.”
집사의 말에 세리아는 뜸을 들였다. 작은 머리로 골똘히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렇게 할게.”
짧은 고민 끝에 결정이 내려졌다. 펜을 들고 직접 후원자 명을 적는 손놀림이 분주했다.
“어때?”
후원자 명을 본 집사의 입술이 비틀렸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는 듯 힘주어 다문 탓이었다.
“아주 인상 깊습니다.”
그는 작은 주인이 쓴 후원자 명을 한동안 바라봤다.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열심히 쓴 것이건만, 어째 휘갈겨 쓴 것만 못한 악필이었다.
「후원자 명 : 방구석의 리리」
그래도 묘하게 어울리는 글씨체가 아닌가.
집사는 남몰래 허허 소리 내 웃었다.
* * *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후원이 시작됐다. 그리고 그 무렵 간만에 유엘과도 재회할 수 있었다.
“유엘, 우리 열한 살이잖아.”
“응? 그렇지.”
여느 때처럼 한바탕 추격전을 벌인 뒤, 한가롭게 숨을 고르던 중이었다.
세리아는 쫙 편 양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셈을 셌다.
“그러면 열여덟까지 하나, 둘…… 7년은 더 남았네.”
“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거야?”
“그래야 너랑 결혼하니까.”
“으응, 그렇구나…… 가 아니라, 뭐, 뭐어?”
꼭 ‘오늘 날씨 좋다.’ 따위의 말을 할 때와 같이 평온한 음정이었다.
덕분에 깜빡 속은 유엘이 여상하게 답하려다가, 뒤늦게 이상함을 깨닫고 펄쩍 뛰었다.
“뭘 그렇게 놀라?”
그러나 세리아는 영문조차 모르겠단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유엘은 오래간만에 새빨개진 얼굴로 입술만 벙긋거렸다.
“나랑 결혼 안 할 거야?”
“아, 아니?!”
“안 하겠단 말이야, 하겠다는 말이야?”
“그건…… 그야…….”
어물쩍 답하려던 유엘은 세리아의 강렬한 눈빛에 결국 본심을 토로했다.
“……당연히 하겠다는 말이지.”
“그렇지?”
짓궂은 미소에 절로 ‘윽’ 소리를 내던 유엘은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왜 나랑 결혼하려는 거야?”
“그래야 종일 붙어 있을 테니까. 작년만 해도 잘 못 만났잖아.”
“으응, 확실히 그러네.”
“거봐.”
세리아의 호탕한 대답에 원인 모를 민망함이 밀려왔다. 어찌 보면 쑥스러움과 닮은 듯했다.
그러나 유엘은 왜 지금 민망한지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잠시 고민하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화두를 돌렸다.
“그나저나 후원은 잘돼 가?”
“잘 모르겠어. 이제 시작했으니까.”
선선하게 대답한 세리아는 자신의 특별한 피후견인을 떠올렸다.
“이름은 칸나래. 나랑 동갑인 데다가 나처럼 잘 쓰러진다고 하더라고. 빈…… 빈 뭐였는데.”
“빈혈?”
“맞아, 빈혈. 그게 있다더라. 그리고 또 뭔가 정보가 많았는데, 그 뒤론 보지 않았어.”
“왜?”
“그냥, 여러 가지로 나랑 닮아서.”
세리아는 한쪽 턱을 괸 채 발목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선선한 바람이 목덜미를 시원하게 훑고 지나갔다. 그러나 무거운 마음마저 날려 버리진 못했다.
같은 나이, 비슷한 병증. 그런 것들에 자연스레 끌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불편해졌다.
전해 들은 정보에 따르면 칸나는 몸이 약한데도 불구하고 학업에 아주 열심이라고 했다.
빈혈로 쓰러지는 날에도 수업을 빼먹지 않으려 애를 쓴다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동생들을 아주 잘 챙겨서 어린 나이에도 ‘대장’이라는 별명이 생겼을 정도로 씩씩하다고 했다.
다만 어린 시절 겪은 사고로 얼굴에 작은 화상 자국이 있는데, 그 때문에 입양은 물론 후원도 받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낙담하지 않고 늘 밝게 지내는 명랑한 소녀라고 들었다.
‘그에 비하면 내 행동은 부끄러울 정도야.’
반면 자신은 불량한 수업 태도로 가정교사를 난감하게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한 든든한 가정과 가족이 주는 사랑에도 늘 툴툴대기만 하지 않았나.
어쩌면 늘 자신의 희소병에 대해 불평만 하느라 가지고 있는 많은 것들을 감사히 여기지 못했던 건 아닐까.
세리아가 그런 성숙한 생각을 수인 생애 처음으로 할 때였다.
“분명 괜찮아질 거야, 세리아.”
세리아가 나름 반성의 시간을 갖는 동안, 그녀의 침묵을 다르게 해석한 유엘이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뜻밖의 위로여서일까. 세리아는 입술을 느리게 늘어뜨리며 웃었다. 평소 장난스레 웃던 얼굴과는 또 다른 표정이었다.
그 미소를 보자니 유엘은 언제까지나 그 미소를 지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믿음직하고 듬직한 존재가 되겠단 열의가 마음 깊숙한 곳에 있던 말을 불쑥 내뱉게 했다.
“응, 내가 드래곤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