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서둘러 자리를 정리한 세리아도 시엘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해가 길어진 건지, 여전히 햇살이 힘차게 광장을 밝히고 있었다.
“좀 걸을까? 단거 먹었더니 배불러.”
“그러자. 우선 시엘 좀 챙길게.”
유엘은 여동생에게 “천천히 가.”라고 말한 뒤 행여 잃어버리지 않도록 손을 꼭 맞잡았다.
그러지 않아도 어디선가 호위들이 지켜보고 있을 텐데.
세리아는 그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려다가, 그냥 속으로 삼키기로 했다.
‘꼭 우리 오빠들 보는 것 같네.’
매번 귀찮다, 성가시다- 별별 말들로 툴툴거렸지만, 다섯 형제의 지극한 사랑이 마냥 싫을 리 없었다.
어쩐지 흐뭇한 마음에 둘을 지켜보고 있는데, 돌연 셋째 오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세리아. 언젠가 네가 교제할 나이가 된다면, 적어도 오빠들만큼은 네게 마음을 다하는 남자를 만났으면 좋겠어.”
그때는 마냥 오빠들 같은 남자는 안 만날 거라고 철없이 굴었지만, 지금은 그 의미를 알 것도 같았다.
‘그리고 유엘이 그런 남자라는 것도 알아.’
물론 여동생을 대하고, 친구를 대하는 모습만을 보고 판단하기는 이를 수 있지만.
‘연인을 대하는 건 또 어떨지 모르지.’
자연스럽게 생각을 이어 가던 세리아는 잠시 후 혼자 화들짝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연인?’
생각지도 못한 관계였다. 아니, 물론 늘 ‘유엘과 결혼할 거야.’라는 다짐은 하고 있지만…….
그래도 연인이라니. 무언가 느낌이 달랐다.
당장에 닥칠 법한 관계여서일까. 어쩐지 설레발을 치는 것 같기도 하고, 닭살이 돋을 정도로 어색하기도 했다.
놀란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세리아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파고들고자 했다.
“나 저거 해 보고 싶어.”
그러나 시엘이 해맑게 다음 코스를 예고했기에, 그 생각은 더 지속될 수 없었다.
세리아와 유엘은 당연하다는 듯 시엘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녀가 이번에 가리킨 것은 골목에 자리 잡은 요란한 좌판이었다.
이미 바람잡이들이 인파를 끌어모으는 데 성공한 건지, 주변엔 꽤 많은 구경꾼이 모여 있었다.
“자자, 다들 도전해 보세요! 구슬이 어디 있는지 맞힌 분껜 선물을 드린답니다. 통 크게 도전하셔야 그만큼 값진 선물을 얻을 수 있어요.”
남자의 말처럼 그의 뒤쪽으로는 흥미를 자극하는 여러 물건이 있었다.
주로 연인이나 아이에게 선물하기 좋을 법한 물건이 주를 이루었는데, 곰돌이 인형, 나무로 만든 작은 조각부터 값이 꽤 나갈 것 같은 팔찌도 있었다.
인형의 밑에는 ‘3실링’이라 적힌 나무판이 있었고, 팔찌 밑 나무판에는 ‘10실링’이라 적혀 있었다.
“단돈 3실링부터 시작합니다! 내 아이, 혹은 사랑하는 연인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하세요!”
호쾌한 목소리가 주변을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했다.
시엘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걸 눈치챈 좌판 주인이 현란하게 손을 움직이며 참여를 유도했다.
“귀여운 꼬마 아가씨가 도전한다면 공짜로 해 줄게. 어때, 한번 해 보겠어?”
“응, 좋아.”
흔쾌히 답한 시엘은 곧바로 바닥에 착 쪼그려 앉았다. 그러고선 보석 같은 눈을 초롱초롱하게 반짝이며 집중했다.
흐뭇한 눈으로 보던 사내가 이내 빠른 속도로 손을 움직여 현란하게 구슬을 옮겨 가며 섞었다.
휙휙-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왔다 갔다 하는 구슬을 놓치지 않고 보는 시엘의 고개도 덩달아 움직였다.
곧 시엘의 까만 동공이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하하, 꼬마 아가씨가 집중력이 대단한……?”
그러던 그때.
퍽! 시엘이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어허, 아가씨. 구슬을 잡으려 하면 안 돼. 눈으로 보고 어디에 있는지 찾는 게임이라고.”
당황한 남자는 다그치듯 말하면서도 구슬 섞는 걸 멈추지 않았는데,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시엘은 계속해서 손바닥을 내리쳤다.
퍽퍽퍽! 현란하게 움직이는 구슬만큼이나 시엘의 손바닥도 재빠르게 움직였다.
솜방망이처럼 조그만 손이었지만 구슬을 쫓는 손길만은 무척 야무졌다.
홀린 듯 움직이는 고개와 확장된 동공, 잡고야 말겠다는 집념에 가득 찬 손길은 어떠한 동물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어허…… 이것 참, 안 되는…… 어허.”
남자는 당황한 듯하면서도 쫓기는 기분으로 더욱 빠르게 구슬을 섞었다.
덕분에 구경꾼들은 또 다른 재미를 느낀 건지 흥미로운 눈으로 두 사람을 봤다.
“유엘, 말려야 하지 않아?”
그렇게 말한 세리아 역시 손이 근질근질했으나 가까스로 억누르는 중이었다.
저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사물이라니! 고양이 수인 특유의 잠재돼 있던 사냥 본능이 꿈틀거린 탓이었다.
“시엘이 너무 집중해서, 말려도 안 들을 것 같아.”
픽 웃은 유엘은 “곧 흥미가 떨어질 테니 괜찮을 거야.”라고 답해 줬다.
그러나 휙휙 오가는 구슬을 보고 흥분한 건 시엘만이 아니었다.
세리아는 체통도 잊고 그만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어서 곁에 있는 유엘의 손을 꽉 잡으며 인내하고자 했다.
“!”
그러나 슬쩍 손을 잡기 무섭게 유엘은 매정하리만큼 빠르게 손을 쳐 냈다.
탁- 청아한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둘의 시선이 맞닿았다.
“……뭐야?”
“그, 그게…….”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날카롭게 묻자, 유엘은 그 스스로도 당황한 건지 말을 버벅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세리아의 손이 맞닿자 무언가 찌릿한 감각이 손등을 타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이게 다 그 꿈 때문이야.’
이상한 꿈을 꾸고 나니 꼭 죄라도 지은 것처럼 마음이 떳떳하질 못했다.
전부 잊고 마음 편히 놀다가도 조금만 접촉하면 가슴이 섬찟하며 놀라기 일쑤니…….
“뭐야, 유엘 리커드.”
그러나 그러한 속사정을 모르는 세리아는 퍽 황당하리라.
때문에 세리아가 조금 화난 목소리로 물으려 할 때.
“나랑 손잡는 게 그렇게 싫-”
퐁!?
“어머!”
“귀, 귀가 나왔잖아?”
흥분한 시엘의 고양이 귀가 난데없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주위가 한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헉. 동시에 숨을 삼킨 두 사람은 서둘러 시엘을 덮치듯 감싸 안았다.
유엘은 그녀를 제 품에 가두었고 세리아는 황급히 자신의 보닛을 벗어 시엘에게 씌워 주며 귀를 가렸다.
“저 귀…… 혹시 수인 아니야?”
“수인이면 귀족 중에서도 높으신 분들일 텐데.”
“설마 저 애들이…… 아, 아니 그럼 저분들이…….”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주변에 모인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놀란 표정을 지은 채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수인은 대부분 높은 귀족 가문 출신이라는 걸 알기에, 지켜보던 이들 중 황급히 자리를 뜨는 자도 생겼다.
특히나 그들 앞에서 분주히 손을 놀리던 사내는 사색이 되었는데, 애당초 그의 게임은 이길 수 없는 놀이였기 때문이다.
혹여나 사기인 게 들켜, 높으신 분의 심기를 거스르기라도 한 건 아닌지 사내는 심장이 쿵쿵거렸다.
아수라장이 된 주위를 본 셋은 일순 짜기라도 한 듯 서로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동시에 달리기 시작하여 재빨리 장소를 벗어났다.
‘이래서 눈에 띄고 싶지 않았는데.’
드레스코드가 괜히 ‘상인’이라든가, ‘길드 수장’인 게 아니었다.
좀 더 많은 사람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기 위해 선택한 복장이었으나, 이런 식으로 들킬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그만 뛰어도 될 것 같아.”
적당한 곳에서 멈춘 유엘이 숨을 고르며 시엘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많이 놀랐지?”
그러고서 허리를 굽혀 시엘의 상태를 확인했는데, 그녀는 놀란 것보단 다소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그래, 시엘. 기분이 안 좋아?”
“내가 다 망쳤어.”
걱정스러운 물음에 시엘은 절망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축 처진 모양새로 터덜터덜 걸었다.
“나는 이 놀이를 즐길 자격이 못 돼.”
황급히 뒤따라간 유엘과 세리아가 살살 달래 봤으나 실망한 열두 살의 마음이 금세 나아질 리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셋은 저택으로 돌아와야 했는데, 시엘의 그런 상태는 다음 날까지 지속됐다.
“너무 비관적인 거 아니야?”
“자주 저러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혼자 있게 하면 금세 괜찮아질 거야.”
세리아는 못내 우려되긴 했으나, 오빠인 유엘이 익숙하다는 자세를 취했기에 그러려니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다음 날은 둘이서 축제를 마저 즐기기로 했다.
광장에 도착하자 세리아는 골목 한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유엘, 어제 저기였지?”
손가락 끝이 향하는 곳을 본 유엘이 대수롭지 않게 긍정했다.
“응, 맞아. 오늘은 한산하네.”
시엘이 구슬 놀이를 하다가 신이 난 나머지 고양이 귀를 나오게 한 곳.
북적거렸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한가해 보였다. 그곳엔 좌판과 커다란 곰 인형 대신 고독하게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악사가 자리를 채웠다.
“아무래도 우리 때문인가 봐.”
그렇게 말하며 머쓱하게 웃던 세리아는 돌연 움찔하며 손끝을 말았다.
‘그러고 보니 어제 유엘이 내 손을…….’
살짝 잡기 무섭게 반사적으로 쳐냈던 감각이 선명했다.
‘갑자기 잡아서 놀란 걸까?’
세리아는 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쫙 펴며 슬쩍 유엘을 올려다봤다. 그도 어제의 일이 떠오른 건지 표정이 영 부자연스러웠다.
이래서는 이제 와 왜 그랬냐고 묻기도 멋쩍었다.
“……우리 다트 해 볼래? 재밌어 보이는데.”
게다가 유엘도 딱히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세리아는 그저 눈을 가늘게 뜨며 괜스레 그를 압박했다.
“그, 다트가 싫으면 다른 거 할까?”
그러나 쩔쩔매는 유엘을 보고 있자니 픽 웃음이 흘러 버렸고, 세리아는 결국 성큼 다트 놀이 쪽으로 앞장섰다.
그렇게 둘만의 즐거운 시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후로도 고리 던지기, 사격 게임도 하고 광대 분장을 한 사람이 저글링 하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했다.
저잣거리 음식도 먹고 길거리의 음악도 듣다 보니 어느덧 해가 저물어 갔다.
그러자 천막이 하나둘 쳐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는데, 간판에는 ‘점성술’이라든가 ‘운명을 예언해 드립니다.’ 따위의 말이 적혀 있었다.
“유엘, 여기 들어가 보자.”
“……타로 카드?”
“여기가 유명하대. 마음을 꿰뚫어본다던데?”
“그런 건 어디서 들었어?”
“지나가다가. 몇몇 사람들이 말하더라고.”
내가 또 그런 거 잘 듣잖아.
톡톡, 보란 듯 귓불을 두드리며 말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신기하잖아. 나 이런 거 처음이야.”
결국, 유엘은 재밌을 것 같다고 맞장구쳐 주며 함께 타로 집으로 들어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