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야…… 야!”
당황한 세리아는 허겁지겁 유엘에게로 다가갔다.
어깨를 붙잡고 일으키려 했으나 꿈쩍도 하질 않아서, 일단 유엘의 머리카락을 콱 움켜쥐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리고 급한 대로 머리채를 잡아끌며 유엘을 억지로 일으켰다.
“머리털 다 뽑혀야 정신 차릴래?”
머리카락을 뜯기는 와중에도 꿈쩍 안 하던 유엘은 세리아가 송곳니까지 드러내며 으름장을 놓는 걸 보고서야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무릎 꿇고 버티는 게 세리아를 더 화나게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여튼 너는 진짜…….”
유엘이 비척거리며 일어서기 시작하자, 그제야 세리아는 이마를 가볍게 짚으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약간의 원망이 담긴 눈초리로 유엘을 쏘아보던 그녀는 이내 포기한 듯 크게 숨을 토해 냈다.
그 모습이 꼭 사춘기 아들을 대하는 부모의 태도 같기도 해서, 유엘은 입술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다시는 나한테 무릎 꿇지 마, 유엘.”
“……응.”
“큰 소리로 답해!”
“응!”
어물쩍 답하던 유엘은 포효하듯 외친 세리아의 말에 바짝 군기가 선 채 차렷하더니, 똑 부러지게 답했다.
그렇게 듣고 나니 안심이 되는지 세리아는 “에휴.”라고 작게 한숨짓더니 피곤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한테 사과하지도 마. 난 네 사과 받기 싫어.”
“…….”
“너는 나한테 사과하는 애가 아니었잖아. 애초에 그럴 일을 안 만들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세리아의 입술은 좀 전과 달리 뾰로통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이번 일이 큰 충격으로 다가온 만큼, 그만한 속상함도 느낀 탓이다.
그러나 말을 끝낸 후 잠시 침묵하던 세리아는 이내 다짐한 듯 어깨를 크게 들썩이더니 힘차게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나는 네가 언젠가 내게 사과하면, 그게 뭐든 간에 용서해 주겠다고 다짐했었어.”
“……세리아.”
“그러니까 이번 일도 용서해 줄 거야.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야.”
“……응.”
“그래도 시간이 더 흐르면 널 용서할 수 있을 테니까, 너를 이해해 줄 수 있을 테니까.”
“…….”
“그러니까 사과하지 마.”
그 말은 곧, 앞으로 이런 일을 만들지 말라는 뜻과도 같았다.
“앞으로도. 다시는.”
그러나 유엘은 과연 자신이 그럴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찌어찌 잘 지내다가 갑자기 3차 성장이 일어나면? 아버지가 말씀하신 블랙 드래곤이 되어 버린다면?
희박한 가정이었으나, 이미 자기 제어가 불능한 위험한 일을 겪고 나니 안심할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유엘은 이제 더는 세리아와 전처럼 지낼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게 무척이나 괴롭더라도 어느 정도의 선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도 절절히 깨달았다.
비록 둘 중 누구도 원치 않더라도, 그래야만 했다.
“대답은?”
오래간 답이 들려오지 않자, 세리아는 탁탁 발을 구르며 대답을 재촉했다.
그 행동에 유엘이 난감한 듯 뒷머리를 만지다가 우선 이 상황을 정리하려는 듯 어색하게나마 웃으며 말했다.
“노력할게, 세리아.”
어쭈.
그 웃음에 세리아는 코웃음이 터지려는 걸 참아야만 했다.
유엘 리커드, 역시 못 본 새에 이상해져도 한참은 이상해진 게 틀림없었다.
‘미인계로 넘어가려 하다니. 나한테도 그런 게 통할 줄 알고?’
세리아는 그의 대답이 못내 성에 차진 않지만, 이만하면 됐다는 듯 픽 웃음 지었다.
“그래, 노력파 유엘. 쭉 힘내야 해.”
이번만큼은 미인계에 홀라당 넘어가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리 생각한 세리아는 팔을 위로 뻗어 유엘의 어깨를 어설프게 두드리며 응원 아닌 응원을 해 줬다.
그렇게 나란히 2차 성장을 끝마친 둘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세리아는 자신이 성장했음을 인지하고 스스로 공부량을 늘렸다.
정치, 사회, 경제, 역사는 물론 숙녀를 위한 교양도 배우기 시작했다.
그녀의 변화에 가족들은 “성장통이 많이 힘들었나?”라며 은근하게 걱정했지만, 세리아로선 그다지 거창한 이유가 있어 공부하는 게 아니었다.
‘나도 곧 성인이니까.’
그런 간단한 이유일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게 한 단계 성장했다는 방증이겠지만.
“우리 고양이, 공부하느라 힘들진 않고?”
“…….”
“너무 애쓰진 마, 리리. 네 나이대 고양이는 잠도 푹 자야 한다고.”
“그영으르그 흐즈 므르……. (고양이라고 하지 마라…….)”
물론, 오빠들이 저를 고양이라고 부르기라도 하면 이를 꽉 깨물고 경고하는 건 더 심해졌지만 말이다.
‘역시 고양이 취급당하는 건 싫어.’
막상 고양이가 된 유엘을 귀여워할 때는 오빠들의 마음도 이해가 갔지만, 그때뿐이었다.
아무렴 본인이 겪게 되면 마음이 달라지는 법이었다.
덕분에 한동안 케스터 가문엔 ‘고양이 언급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맘때쯤 세리아에게 두 가지 소식이 들려왔는데, 우선 제이든이 유학에서 돌아왔다는 거다.
‘보통 짧게 다녀온다던데, 정말이네.’
들은 바로 귀족 자제의 유학은 보통 1년에서 2년 사이로 그 기간이 길지 않은 편이라고 한다.
가문을 너무 오래 떠나 있을 수 없기에, 보통은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한 시도에서 그치기 때문이다.
물론 학자가 된다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당분간 심심하지는 않겠네.”
그 조잘거림을 들을 생각을 하니 절로 웃음이 흘렀다.
“……피곤은 하겠지만.”
동시에 벌써 기력이 깎이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 연락 주고받는다고 했었지.’
전에 제이든과 유엘이 간간이 연락하는 사이라고 들었다. 비록 제이든의 일방적인 구애에 가까운 관심이겠지만. 아무튼 둘은 학문적으로 통하는 것이 많았다.
“첫 만남 때는 그렇게 놀려서 기죽이더니.”
지금은 존경한다니 어쩌느니 하면서 쫓아다닌다고 한다.
세리아는 설핏 웃으며 생각했다. 자신의 친구인 두 사람이 모쪼록 쭉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그렇다 한들.
「세리아, 나 아무래도 유학을 떠날 거 같아. 그리고저번 일은 정말 미안해. 다시 한번 사과할게.」
「세리아 님, 소식 들으셨을 거로 압니다.
유엘 님께서 유학을 떠나게 되셔서, 제가 이번에 작은 도움을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아, 물론 유엘 님께서 먼저 도움을 요청하신 건 아니지만요.
그래도 제가 또 유학 선배로서 이러저러한 경험을 공유하면 유엘 님도 아마…….」
이런 편지를 나란히 받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대체 뭔데?”
* * *
사실 유엘의 유학은 다소 즉흥적으로 결정된 일이었다.
리커드 후작이 가업 관련 일로 장기간 출장을 갈 일이 생겼는데, 유엘에게도 함께 떠날 것을 권유했던 거다.
“유엘, 너도 가문의 장남이니 가업 관련 일을 슬슬 익혀야 할 것 같구나.”
이참에 견문도 넓히고 말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만 해도 유엘은 워낙 생소한 제안이었던 탓에 쉬이 답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제이든의 편지로 알게 된 우연한 정보 덕에 마음을 굳히게 됐다.
「훗날에라도 카르센 지역을 가게 된다면 조심하세요. 거기엔 무시무시한 블랙 드래곤이 산다고 알려져 있으니까요!」
아버지가 가게 되는 곳이 카르센 지역이라는 것도, 그곳에 블랙 드래곤이 산다는 것도 순전히 우연이리라.
그러나 때론 어떤 우연이 운명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법.
“아버지, 저도 함께 가겠어요.”
그래서 유엘은 기꺼이 그곳으로 떠난다고 했다.
장남으로서 교육받아 견문과 견해를 넓히기 위해서.
……그리고 블랙 드래곤에 관해 알아보기 위해서.
* * *
유엘이 유학을 떠났다.
작별 인사를 직접 하지 못한 건 아쉬웠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으니 어쩔 수 없었다. 유학이 예기치 못하게 앞당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열정적인 조랭이떡은 그 와중에도 유엘과 인사를 나누었다. 세리아보다 거리가 가까운 편이라 가능한 거기도 했지만.
“고민거리가 뭔진 모르겠으나 이번 유학에서 해답을 얻어 오셨으면 합니다.”
“…….”
“세리아 님 곁에는 제가 있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세리아는 감흥 없이 박수를 쳐 줬다. 제이든의 열변은 꼭 연극의 한 장면 같았기에, 이 정도는 해 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랬더니 무어라 하신 줄 아십니까? 제 어깨를 토닥이더니, 바로 이런 표정으로.”
그 말과 동시에 손가락으로 콧등을 쓱 문지른 제이든은 우수에 찬 눈을 떴다.
“고마워, 네가 있어 든든해.”
과장되다 못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진지한 목소리였다.
“설마.”
참다못한 세리아가 킥 웃으며 손사래를 치자, 제이든은 억울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이라니까요! 아무튼, 저는 세리아 님의 말동무가 될 의무가 있습니다.”
“언제는 안 그랬다고.”
“하핫, 그건 그렇죠.”
그러니까, 제이든의 말에 따르면 이러했다.
유학을 마친 그가 돌아오는 길에 겸사겸사 리커드 가문을 방문했는데, 때마침 유학 얘기로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한마디로, 제이든은 지금 당시 유엘과 주고받은 대화를 열렬히 재연하는 중이었다.
‘좀 과장된 거 같기는 하지만.’
세리아는 시폰 케이크 위 체리를 집어 먹으며 그를 떠올렸다.
‘그나저나 고민거리가 있어 보였다니.’
유엘이 걱정할 만한 일이 대체 뭘까.
‘그날 일…… 설마 나 때문은 아니겠지?’
체리를 씹던 세리아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것 때문에 유학 가는 건 아닐 거야.’
그런 결론을 내린 뒤에야 다시금 우물우물 체리를 씹을 수 있었다.
괜한 걱정을 떨치며 세리아는 제이든을 불러 앉혔다.
“진정하고 앉아서 차라도 한잔해.”
흥분해 있던 제이든은 그녀의 말 한마디에 쪼르르 와서 얌전히 맞은편에 앉았다.
이런 모습은 여전한데, 외모는 2년 전 여느 때와는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제이든, 그새 많이 컸네.”
그는 전에 비해 통통했던 젖살도 많이 빠지고 키도 훌쩍 커서 세리아와 엇비슷해졌다.
‘유엘도 열네 살 때 저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새삼 제이든의 성장 속도에 감탄했다.
“그럼요. 이래 보여도 열네 살이랍니다.”
“너는 수인도 아닌데 갑자기 크네. 사람은 성장형이 없잖아.”
“그런가요? 키가 크기는 했는데.”
많이 변했나. 제이든은 딱히 차이점을 모르겠다는 듯 제 머리를 짚었다.
‘미남인 것 같기도 하고…….’
눈을 가늘게 뜬 세리아는 애매하다는 시선을 던졌다. 변한 모습이 꽤 근사하긴 한데, 뭔가 어정쩡했다.
‘안경 때문인가?’
불현듯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뭔가가 우당탕거리며 정신없이 나타났다.
“먀아-”
고양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