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세리아가 워낙 사교 활동을 안 한 탓에 그녀는 일종의 새로운 관심사였다.
케스터 가문의 남자들에 관한 흉흉한 소문이 -여동생을 건드리면 다음 날 비명횡사한다는 둥- 워낙 부풀려지긴 했지만,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을 만큼 세리아의 외모는 아름답기도 했다.
“아,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렝위시 홉스입니다.”
세리아가 대답 대신 경계의 눈을 한 채 빤히 쳐다보자 남자는 허겁지겁 자신을 소개했다.
세리아는 ‘그래서 볼일이라도?’라는 표정으로 바라봤고, 그 생각이 훤히 보이는 노골적인 눈빛에도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눈을 마주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귓가가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와 춤을…….”
“세리아 양, 제 이름은 켄스 롭터스입니다. 편하게 켄스라 불러 주세요.”
처음 인사를 한 남자가 춤 신청을 하려 하자, 곁에 있던 남자가 황급히 선수를 치며 말을 끊어 냈다.
그걸 시작점 삼아 세리아 주변으로 점점 남자들이 몰리며 경쟁적으로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별다른 관심도 없는 데다 부담스럽기까지 해진 세리아는 꼼짝도 못 한 채 시선만 돌렸고, 그 순간 저 멀리 있던 유엘과 눈이 마주쳤다.
‘유엘!’
아, 그 순간 얼마나 기쁘던지.
아는 얼굴을 발견해서일까, 아니면 그 아는 얼굴이 유엘이어서일까.
뭐가 됐든 세리아는 기쁨을 숨기지 못한 채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숨을 흡, 하고 삼켜 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뭐야?’
그러나 세리아는 곧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다.
잘생긴- 아니, 이 무도회장에서 단연 가장 아름다운 유엘은 당연하게도 인기가 많았다.
게다가 예의 바르고 신사적인 탓에 여자들에게 둘러싸이다 못해 파묻힐 정도였다.
얼핏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는데 인파에 다시 가려져 그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 나한테만 어색하게 군다 이거지?’
세리아는 기가 찬 듯 “하!” 탄식과 가까운 호흡을 내뱉었다.
그와 동시에 다시 유엘의 시선이 드리워지며 눈이 마주쳤다.
유엘 역시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세리아가 신경 쓰이는 듯, 은근하게 눈으로 그녀를 좇던 탓이었다.
그러나 세리아가 자신을 바라볼 때쯤엔 기가 막히게 고개 피했는데, 그게 세리아의 신경을 묘하게 긁어 댔다.
‘어쭈, 신경도 안 쓰네?’
티 나지 않을 정도로 몸을 부르르 떤 세리아는 제 주위에 장벽처럼 즐비한 남자들을 제치고 척척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건 일종의 오기였다.
“세리아 양, 오랜만이네요.”
그러나 난데없이 누군가가 앞을 막는 바람에 얼마 안 가 강제로 발걸음이 묶여 버렸다.
“우리 구면이죠?”
누군데.
하마터면 그렇게 물을 뻔한 세리아는 가까스로 말을 삼켜 냈다.
누군지 몰라도 사람 가는 길목을 턱하니 막아서는 게 썩 불쾌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기야, 어릴 때 봤으니 기억이 안 날 만도 하네. 루이 로브라고 하면 기억하려나?”
뭔데 갑자기 반말이야.
눈썹을 꿈틀대던 세리아는 이상하게 얄밉게 느껴지는 얼굴을 보자 불현듯 과거의 기억이 스치듯 떠오르기 시작했다.
“근데 왜 반말이야. 저번엔 나한테 존대했으면서.”
“그야 네가 반말로 했으면 좋겠다고 했으니까.”
아아. 세리아가 알 만하다는 듯 감흥 없이 반응하자, 루이는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아, 역시. 이렇게 하면 기억하실 줄 알았어요. 무례를 용서하시길.”
“용건은?”
“무도회장에서 굳이 용건을 가지고 인사를 나누진 않죠.”
분명 살갑긴 한데 묘하게 가시 품은 말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느껴지는 데는 루이 특유의 눈빛, 그리고 숨길 수 없는 감정 때문이겠지.
“케케묵은 기억은 이미 묻으셨으리라 믿기에, 인사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때의 기억을 왜 묻었을 거라 단정 짓는 거지? 세리아는 그의 무례함에 얼굴을 굳혔다.
루이를 비롯한 남자아이들과 주먹질을 했던 과거, 그날 자신을 향해 퍼부었던 비난까지.
세리아는 아직도 잊지 않았다. 잊을 리 없었으니까.
“설마, 아직도 그 일을 마음에 품어 두시는 건 아니겠죠? 아, 물론 케스터 공녀가 그렇게 속이 좁을 리는 없죠.”
당시 가리가 뒤처리한 덕에 세리아를 비롯한 케스터 공작가와의 연은 이제껏 끊긴 채였다.
그러나 황실에 초대된 것까진 어찌할 수 없는 부분임을 잘 알고 있었으나…….
“나 속 좁은데?”
굳이 불쾌한 내색을 숨기고 상냥하게 대꾸할 필욘 없겠지.
그리 생각한 세리아는 눈을 날카롭게 뜨며 거침없이 말했다.
애초 루이 로브가 먼저 자극한 거니, 잘 지낼 가능성은 일호도 없는 셈이었다.
“반말은 여전하시네요.”
“존대할 이유라도?”
“저를 존중하신다면…….”
“존중받고 싶으면 그렇게 행동했어야지. 지금은 반대쪽 귀도 뜯기고 싶어 하는 걸로밖에 안 보여서.”
“아아, 귀.”
루이는 세리아를 향해 성큼 다가가며 싸늘하게 내려다봤다.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으나, 눈빛은 꼭 한 대 때리기 직전처럼 냉랭했다.
“그때 뜯긴 건 제 귀가 아니긴 한데. 어떻게, 원하신다면 귓불 정도는 물려 줄 수 있네요.”
“무슨-”
“귀가 좀 예민해서.”
부러 귓가에 속삭인 그는 손끝으로 세리아의 가는 팔을 미끄러지듯 쓸어내렸다.
“이거 놔!”
충격에 소름이 오소소 돋은 세리아는 그의 손등을 철썩 치며 뒷걸음질 쳤다.
불결했다. 동시에 분이 치솟았다.
이 남자는 왜 늘 자신을 깔보고 함부로 생각하는 걸까.
어릴 땐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애송이로 보더니 이젠 희롱의 대상으로 보았다.
뭐에 이렇게 속이 뒤틀린 사람일까. 어떻게든 사람을 짓밟지 않으면 성에 안 차는 걸까?
‘못 참겠어.’
역시, 저 얼굴을…….
‘딱 한 대만 때리자.’
불끈 주먹 쥔 손이 분노에 겨워 바들바들 떨릴 때였다.
그걸 수치심의 떨림으로 이해한 건지, 루이는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간만이라 반가워서요. 농담 한 번 해 봤……! 윽!”
아니, 말하는 도중 끊겨 버렸다.
대뜸 나타난 한 남자가 그의 멱살을 무뢰한처럼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컥…… 요한…… 칼시스 경!”
“숙녀가 싫다는데, 이게 무슨 개 같은 매너일까?”
거친 말투로 짓씹듯 말을 내뱉던 남자는 한 손은 주머니에 찌른 채, 나머지 손으로 거만하게 루이의 옷깃을 틀어쥐었다.
그 힘이 얼마나 센지 루이의 발이 허공으로 슬쩍 들릴 정도였다.
“세상에, 저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저자는…… 칼시스가의 망나니 아닌가요?”
거대한 체구의 남성이 등장하자 장 안의 시선이 쏠리며 이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하기야, 조용히 지나가기엔 남자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요란스러웠다.
‘망나니?’
난데없이 벌어진 상황에 세리아는 눈만 말똥히 뜬 채 고개를 꺾었다.
키도 큰 데다 어깨도 떡 벌어져서 위압적인 풍채를 소유한 남자였다. 게다가 타오르듯이 붉은 머리카락까지.
모든 게 불같은 남자의 성정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그런 그가 잠시 고개를 돌려 세리아를 내려다봤다.
구릿빛이 섞여 건강미가 느껴지는 피부색, 진한 눈썹, 짙은 이목구비와 잿빛 눈동자를 소유한 눈에 띄는 미남이었다.
여러모로 시끄러운 남자.
세리아에게 그런 첫인상을 남긴 남자는, 자신을 관찰하느라 침묵한 그녀의 모습을 겁먹은 걸로 오해한 듯싶었다.
“터진 주둥이라 그렇게 나불거리는 건가.”
다시 고개를 튼 남자는 루이를 내려다보며 씨익 미소 지었다. 호쾌한 표정과 달리 오금을 저리게 하는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
“그렇게 물리는 게 좋으면 내가 이곳저곳 깨물어 줄까? 원한다면 뭐, 거기 있는 것도…….”
목이 졸려 새빨개졌던 루이는 요한의 잿빛 눈이 바지 한가운데로 꽂히자, 점차 사색이 되어 갔다.
“앙큼하게 물어 줄 수 있는데.”
앙.
이를 딱 부딪치며 무는 시늉을 한 요한은 실실 웃으며 루이를 팍 내려놓았다.
순간 중심을 잃고 휘청이던 루이는 가까스로 다시 중심을 잡더니, 이를 으득 물고서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별것도 아닌 게.”
“……고마워.”
그 모양새를 관람이라도 하듯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구경하던 요한은 뒤쪽에서 들리는 작은 목소리에 몸을 틀었다.
“……요.”
낯선 사람에 대한 쑥스러움, 당혹스러운 상황.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든 세리아는 작은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의도하진 않았으나 그 모습이 수줍어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요한은 멀뚱히 보다 피식 웃으며 여유롭게 답했다.
“별거 아닌데.”
“…….”
“요.”
똑같이 따라 하는 말투가 꼭 빈정대는 것만 같았지만, 희한하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다만 완전히 경계를 허물지 않은 세리아가 무언가를 가늠하듯 가늘게 뜬 눈으로 요한을 지긋이 바라볼 때였다.
“……세리아.”
근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세리아가 이끌리듯 고개를 돌렸다.
단번에 긴장이 풀리며 안도의 빛을 띤 세리아는 반사적으로 “유엘!” 하고 불렀다.
요한은 그런 세리아의 변화와 유엘의 굳은 표정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한눈에 봐도 도련님 같은 얼굴을 한 유엘은 반듯한 분위기와 달리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 간극에서 오는 서늘함이 더 깊숙이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
일순 긴 팔이 세리아의 어깨를 부드럽게 그러쥐더니, 단숨에 품 안으로 당겨 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론 요한과의 사이를 가로막듯 팔등으로 거리를 표했다.
그 행동이 너무도 순식간에, 또 예상조차 못 한 채 일어나는 바람에.
세리아는 별안간 코 안으로 훅 치미는 향을 맡고 나서야 자신이 유엘에게 안겨 있음을 깨달았다.
왜냐면 이건 유엘 집에서 나는 특유의 향이기 때문이다. 꽃밭에서도 찾아낼 수 있는 그런 유엘만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