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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은 고양인 줄 알았는데!-39화 (39/116)

39화

결론부터 말하자면 첫 사교 활동은 성공이었다.

모임에 참석한 지 어언 한 시간째, 세리아는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건포도 쿠키를 오독오독 먹는 중이었다.

“저번에 록센가의 장남이 세리아 님께 연서를 보내지 않았나요?”

“록센가라면 몇 해 전 수사 제독 자리에 올랐다지요? 그 후계자라니!”

레이디들은 세리아가 뻣뻣하게 군 게 무색할 정도로 대화를 끊지 않았으며, 분위기를 잘 이끌었다.

“세리아 님, 읽어 보셨나요?”

종종 이렇게 질문도 던지면서 말이다.

“연서라면 읽어 봤어요.”

“세상에! 어떠셨나요? 낭만적이었나요, 아니면 저돌적이었나요?”

“그게…… 글쎄요…….”

세리아는 난감한 기색을 숨기며 눈을 도르륵 굴렸다.

여기저기서 기대에 찬 눈빛이 쏟아졌으나, 애석하게도 기대에 부응하기는 쉽지 않을 듯했다.

‘그야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걸.’

하루가 멀다 하고 연서가 쏟아졌으니, 어느 게 누가 보낸 건지 기억하기가 쉽지 않았던 거다.

“그…… 다른 연서와 다를 바 없었어요.”

“어머나!”

“역시 세리아 님이네요.”

때문에, 그저 얼버무린 거였으나 레이디들은 부러운 탄성을 내질렀다.

덕분에 세리아는 이 민망하고도 얼떨떨한 상황을 온몸으로 느끼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내가 누구한테 연서를 받았는지도 다들 알고 있다니.’

그녀는 비로소 인정하게 됐다. 소문은 정말로 빠르다는 것을 말이다.

그간 어찌나 무신경했는지, 특히 자신에 관한 소문은 귀를 막지 않는 이상 못 듣기 힘들 정도였던 거다.

‘다행히 평판이 나쁘진 않은 것 같아.’

어릴 적처럼 이상한 얘기만 파다하게 퍼진 건 아닐까 걱정도 했건만, 그건 정말 기우에 불과했다.

그녀 자신만 몰랐을 뿐, 세리아는 여러모로 인기가 많았던 거다.

귀한 공녀는 눈에 띄게 아름다웠고, 친밀하게 지내는 사람은 명성이 자자한 유엘 리커드.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에 사람들의 이목이 자연스레 집중됐다.

게다가 몸이 안 좋아서 사교 활동을 못 한 거였다고 하니 뜻밖의 신비로움마저 얻게 됐다.

마냥 좋아하기도 애매한 이유였으나 예상보다 평판이 좋다는 건 뜻밖의 소식이긴 했다.

이런 이유로 한결 수월하게 모임에 적응한 세리아가 나름 고상하게 마카롱을 집어 들 때였다.

“세리아 님은 유엘 님께도 연서를 받은 적 있나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세리아는 그만 손가락을 삐끗했다.

놓칠 뻔한 마카롱을 가까스로 잡은 뒤 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유엘에게요?”

“네, 두 분께선 오래간 친우로 지내셨다고 하죠?”

“맞아요……. 그런데 저희가 친구 사이라는 걸 아시는 줄은 몰랐어요.”

“어머, 모르셨나요? 두 분 사이는 유명하답니다.”

“그, 그렇군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세리아의 눈은 요동치고 있었다.

사교계…… 생각보다 무서운 곳일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리커드 님께선 워낙에 인기가 많으셔서요. 그렇다 보니 직접적으로 묻는 레이디들도 몇 있었죠.”

“맞아요. 정략결혼 상대는 있는지, 혹시 정인은 있는지. 매번 비슷한 질문을 받으시죠. 아마 레이디들에게 연서도 적잖이 받으셨을 거예요.”

맞장구치며 거드는 말이 비수처럼 콕콕 날아왔다.

저도 모르게 손끝을 움찔한 세리아는 이번에야말로 마카롱을 떨어트려 버렸다.

접시 위로 툭 떨어진 피넛 마카롱을 멀거니 바라보던 그녀는 별안간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 느꼈다.

‘인기가 많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막연히 짐작하는 것과 직접 듣는 건 엄청난 차이가 있는 법이다. 자연히 속이 뒤집힐 것처럼 울렁이는 걸 느꼈다.

‘그런데 나한테는 말도 안 해 주고.’

물론 유엘이 여기저기서 고백받은 걸 술술 말해 줬다면 그건 그것대로 또 열받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태껏 아무 말도 안 했다니.’

괜히 그가 괘씸해 심술이 올라왔다.

솔직한 이유로는, 유엘을 연모하는 여인들이 많다는 사실 자체가 이다지 마음에 안 드는 걸 테지만 말이다.

‘걘 왜 그렇게 잘나선.’

세리아는 대번 튀어나오려는 입술을 숨기고자 힘을 줘 입가를 늘어뜨렸다.

그러나 곧이어 들린 말엔 두 눈이 크게 뜨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리커드 님께선 ‘아끼는 친우가 있다.’라고 말하곤 하셨죠. 그런 맥락에서 나온 대답이니, 단순한 우정을 의미하는 게 아니란 걸 누가 모르겠어요?”

“게다가 무도회 때 두 분이 함께 있는 걸 봤으니, 눈치챌 수밖에요.”

“다들 보셨죠? 세리아 님이 소동에 휘말리니 정신없이 달려가던 모습을요!”

생소한 얘기에 세리아의 눈꺼풀이 느리게 움직일 동안, 그들은 낭만 소설을 읽는 소녀들처럼 수줍게 볼을 붉혔다.

그러는 동안 세리아는 다소 멍해진 얼굴로 생각했다.

‘처음 듣는 말이야.’

유엘이 그렇게 대답했을 줄은…….

‘아끼는 친우라니.’

어느 누가 연인이 있냐는 질문에 대고 친구가 있음을 언급하냔 말이다.

‘꼭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잖아.’

그러니 다들 정인이 있다고 짐작하는 걸 테고.

세리아는 어딘지 민망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표정 관리가 안 될 만큼 벅찼다.

여기서 말하는 친우가 자신이라는 것쯤은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유엘이 정말 그렇게 대답을 했나요?”

“어머나, 그럼요. 어찌나 친우 얘기를 하던지, 한동안 유엘 님이 남성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죠.”

“여성 중에서는 친우라고 할 만큼 친밀한 사이가 없었거든요. 세리아 님의 존재를 모를 때까지는요.”

그렇게 말한 레이디들은 싱긋 웃거나, 한쪽 턱을 괸 채 어딘지 몽롱한 눈으로 세리아를 쳐다봤다.

세리아는 저 표정에 아주 익숙했다. 오빠들이 저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며 농을 던지기 전 꼭 저렇게 봤으니 말이다.

“그러니 세리아 님, 조심하세요. 아마 세리아 님 앞으로 온 수많은 초대장 중에선 리커드 님을 연모하는 여인도 분명 있을 테니까요.”

어색한 웃음으로 무마한 세리아는 괜스레 찻잔을 움켜쥐었다.

“그래서 세리아 님, 유엘 님께 연서를 받으셨나요?”

“……아뇨, 친우인걸요. 연서는 받은 적 없어요.”

고백 비슷한 건 받았지만.

뒷말을 삼킨 세리아는 뜸을 들이며 차를 마셨다.

그러자 곧 연서가 올지도 모른다, 성인이 되고 청혼하는 건 아니냐는 둥…… 저들끼리 더 설레어하면서 설레발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세리아는 묘한 씁쓸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친우라.’

다시금 그 의미를 곱씹어 보자니 어쩐지 입안이 쓰게 느껴지기도 한 탓이다.

‘지금이야 여전히 친한 친구 사이지만.’

아직 변하지 않은 사실이었으나,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쉬이 확신할 수는 없었다.

전에 없던 이상한 초조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실제로도 거리감이 느껴지고.’

3차 성장이 끝나면 다시 전과 같아질 거라는 걸 알지만.

‘……만약에.’

정말 만약에라도 뭔가가 잘못된다면…….

유엘과는 그 이상의 관계는 물론, 전과 같은 친구 사이로 돌아갈 수 없으리란 걸 알 수 있었다.

세리아는 그저, 그게 두렵기만 했다.

“곧 새로운 소식이 들려올지도 모르겠네요.”

짓궂은 목소리가 꼭 머지않아 유엘에게 받을 연서를 기대한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린 세리아가 힘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글쎄요, 유엘은…… 무도회 때 황녀님과 춤을 추기도 했고요.”

“황녀님께서 먼저 춤을 요청하셨지 않나요? 황실의 요구는 원래 거부할 수 없는 법이잖아요.”

그러니 기운 내세요.

부러 덧붙이지 않은 뒷말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세리아는 뜻밖의 응원에 얼굴이 홧홧해지는 걸 느꼈다.

재채기와 사랑은 숨길 수 없다던데, 유엘을 향한 마음이 티가 나기라도 하는 걸까.

작게 헛기침을 한 세리아는 괜스레 양 볼을 쓸어 냈다.

“그러고 보니 세리아 님도 요한 경과 춤을 추셨죠? 잠시 소란이 생겼을 때 모두의 이목이 쏠렸는데, 아셨나요?”

알다마다. 그녀는 순식간에 치미는 화를 삼켜 냈다.

그날의 루이는 정말 언제 떠올려도 불쾌하구나…….

그런 생각과 함께 자신을 도와준 요한이 상기됐다.

특이한 사람이었지만, 여전히 그에겐 고맙기만 했다. 가장 먼저 자신을 도와준 것도, 춤을 권해 준 것도, 모두.

“참, 칼시스 경은 기사이기도 하죠? 그래선지 정의로운 면모가 있으시더라고요.”

“기사의 품행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요.”

그 말엔 모두가 공감한다는 듯 높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나 웃음이 사그라들자, 개중 한 여인이 오묘한 표정으로 뜻밖의 말을 들려줬다.

“혹시나 싶어 말씀드리는 거지만, 요한 칼시스 경이라면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조심하라뇨?”

의외의 경고에 세리아도 호기심 담긴 눈길을 보냈다.

“물론 제겐 고마운 분이세요. 전에 끈질기게 구애하던 남성이 있었는데, 도가 지나치기에 요한 경께 도움을 구한 적이 있었거든요.”

“도움이라면……?”

“당분간만 교제하는 척해 달라 부탁했어요. 그분이라면 흔쾌히 들어주실 것 같았거든요.”

“그가 승낙하던가요?”

“흔쾌히요. 그래서 한동안 신세 좀 졌죠.”

그에 세리아는 문득 요한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의의 사도겠지.”

그러고 보면 자신에게도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던가. 어쩌면 영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때의 두 분은 뭐랄까요. 누가 봐도 의도가 있는 만남 같아 보이긴 했어요.”

“표가 났었나요? 하지만 목적은 달성했으니 원하는 바는 이룬 셈이죠.”

모두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세리아 역시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그들의 대화에 귀 기울였다.

“제게 무언갈 요구하지도 않으셨어요. 그런 분은 처음이었죠.”

“그러면 감정이 싹트진 않던가요?”

날카롭고도 직설적인 물음이었다.

당황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막상 질문을 받은 당사자는 묘한 표정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제가 그를 조심하라는 이유는 단 하나예요. 그는 누구에게나 곁을 내어 주지만, 결코 마음만은 내어 주지 않는 남자란 사실을 명심하셔야 해요.”

심오한 말이었으나 세리아는 다소 시큰둥하게 생각했다.

‘결국엔 바람둥이란 말 아닌가.’

그녀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하지만 제게 도움을 주신 건 분명하죠. 그 점에 대해선 여전히 감사하답니다.”

긍정하는 대답이 몇 번 오간 끝에 대화가 마무리되자 또 다른 화두가 제시됐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세리아는 잠시 요한을 떠올렸다.

“애인이에요?”

“아닐걸요?”

이제야 그의 대답이 어렴풋이 이해되는 것도 같았다. 그에겐 모든 게 그저 장난이었던 걸까.

흐응, 콧바람을 내쉰 세리아는 마들렌 하나를 입에 쏙 넣었다.

어차피 다시 만날 일도 없는 남자인걸. 그런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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