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곁에 붙어 있으면 괜찮을 거야.”
“언제까지고 세리아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건 형이 더 잘 알잖아.”
“한 달 정도는 괜찮아. 뭣하면 세리아를 내 저택으로 데려가면 되고.”
동생들의 걱정스러운 물음에도 가리는 단단하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답변했다.
단호한 음성이 상대에게 끈끈한 믿음과 강한 신뢰감을 주었으나, 이번엔 어쩔 수 없이 불안하기만 했다.
“건네주든, 건네주지 않든 내가 세리아 곁에 있을 거란 사실은 변하지 않아.”
“하지만 형이 불안정해져서 폭주라도 하면…….”
“뭐, 우리 넷이 들러붙는다면야 막을 순 있겠지만.”
그런다 해서 아무도 다치지 않고 조용히 막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형제간 싸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강제로 분위기가 숙연해질 때였다.
“그러지 않아도 돼.”
방문을 열며 들어온 나제리가 진중한 음성으로 희망을 고했다.
“확실하진 않지만.”
어쩌면 아무도 몰랐을, 감히 그 누구도 예상조차 하지 못했을 그런 희미한 희망을 말이다.
“나도 조금 전에 막 받은 소식이라서.”
“뭔데 그래?”
제리는 방금 받은 편지 한 장을 보란 듯이 살랑이며 말했다.
“세리아의 성장이 시작되고 혹시 몰라 리커드가에 편지 보내 놓은 거 기억해?”
“기억해. 그쪽의 귀한 도련님 못지않게 세리아도 아프단 걸 잘 포장해서 비꼰 거.”
“하아…… 그래, 네가 기어코 보냈었지. 여하튼 유엘 리커드에게서 답장이 왔어. 얼마 전 성장이 끝났나 봐. 세리아가 아프다 하니, 이곳으로 오겠대.”
타박하듯 마롱을 노려보던 제리는 금세 눈에 힘을 풀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으므로.
유엘 리커드가 온다. 그게 가장 중요했다.
적어도 세리아에게 있어선 더욱.
‘유엘이 온다고?’
그 말만은 신기하게도 쐐기를 박은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유엘, 내 친구 유엘 리커드. 소식조차 없던 그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니. 확실한 걸까?
‘더 자세히 물어보고 싶은데…….’
그러나 수차례 진통제를 맞은 몸이 야속하게도 더 버티지 못하고 방전이 돼 버렸다.
꾸역꾸역 잠에서 깨어나려고 노력하던 세리아는 결국 약에 굴복하고 이미 누운 상태로 쓰러졌다.
점차 아득해지던 정신은 다시금 깊고도 고요한 잠의 세계로 이끌렸다.
“그 자식이 온다고?”
하! 명백한 비웃음이 담긴 콧방귀가 뒤따랐다.
“아, 그래? 죽진 않았나 보지?”
“마롱, 말 가려서 해.”
“왜? 세리아가 이렇게 아픈데 얼굴 한 번 안 비친 건 사실이잖아. 애가 사경을 헤매면서도 계속 그놈을 찾았는데도…… 그래서 난 성장하다 뒤지기라도 한 줄 알았지.”
으득, 이를 갈며 분을 표하는 모습이 형형했다.
약해빠진 놈. 아프면 얼마나 아프다고 연락 한 번 없었는지. 저가 세리아처럼 원체 몸이 약하면 이해라도 할 텐데…….
그간 세리아가 아픈 와중에도 무의식적으로 유엘을 찾았던 걸 생각하면, 그리고 그 잘난 유엘이 코빼기도 안 비쳤던 걸 생각하면 절로 울화가 터졌다.
“정말로 성장통이 심했나 봐. 후유증도 오래갔고. 애초 리커드가에서 거짓을 말할 리도 없잖아.”
“뭐가 됐든 간에 상관없어. 돌아가라 해. 지금 와 봤자 하나도 도움 안 되니까.”
“그래, 세리아도 오히려 이런 모습 안 보이고 싶을 거야.”
“아니, 도움이 될지도 몰라.”
짧게 호흡을 가다듬은 제리는 최대한 덤덤하게, 도저히 덤덤할 수 없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드래곤이니까.”
“……?”
왜냐면 다들 이런 반응을 보일 줄 알았으니 말이다.
제리의 말이 끝나자 방 안은 일순 정적에 휩싸였다. 다들 자신이 뭔가를 잘못 듣기라도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잘생긴 얼굴에 그렇지 못한 표정들이었다.
가관이네. 나제리는 그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뭐?”
먼저 운을 뗀 건 언제나처럼 마롱이었다.
그는 생쥐가 하늘을 나는 모습을 보기라도 한 것 같은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따지듯 말문을 열었다.
“말도 안 되는-”
“말이 돼? 리커드가에서 드래곤이 나온다는 게?”
그러나 곧장 흥분한 다른 형제들이 치고 들어오는 바람에 맥없이 말이 끊겨 버렸다.
“유엘 리커드는 2차까지 고양이였잖아. 지금껏 고양이에서 드래곤이 된 유례는 없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괘씸한 놈, 설마 변명이랍시고 그런 말 같잖은 거짓을 고했단 거야?”
제리에게 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은 열심히도 따졌다. 그런다고 유의미한 답이 돌아오리라 기대하는 건 아니었지만.
“반년…….”
개중 맏형인 가리만이 차분하게 가능성을 가늠할 뿐이었다.
그 역시 믿기 힘든 사실인 듯 허공을 쳐다보며 무언가를 중얼거리다가 다시금 제리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유엘이 보낸 건 확실한 거지?”
“리커드가의 인장이 찍혀 있어. 확실해.”
“그렇담 거짓일 리는 없고.”
톡톡.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두드리던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짧은 시간 내 정리가 끝난 얼굴이었다.
“뭐가 됐든,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야. 중요한 건 세리아에게 유엘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단 거지.”
가리는 예의 바른 신사의 표본이자 듬직하고 신뢰가 가는 케스터 가문의 장남이었다.
그래서 다들 깜빡 속아 넘어가기도 하지만, 형제들은 그가 무서울 정도로 냉정하고도 한편으론 이기적인 사람이란 걸 잘 알았다.
적어도 세리아에 관한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예외는 없었다.
“손님 맞을 준비부터 해.”
“준비라니?”
“갓 성장이 끝났을 때가 제일 혈기왕성한 건 경험해 봐서 알겠지.”
굳이 설명하지 않고 생략한 건 현명한 일이었다.
가리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 다들 은근하게 눈빛 교환을 했으니까.
최종형으로 변하고 나서 한시 동안이었으나 얼마나 서로가 지랄 맞게 굴었는지는 잘 알기 때문일까.
그나마 첫째는 점잖았기에 드래곤이 되고도 사고 한 번 치지 않았지만, 그건 특수한 경우였다.
물론 유엘도 얌전한 애긴 하지만…… 원래 제정신이 아닐 땐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별말 없이 허공을 응시하거나 괜스레 주먹을 움켜쥐어 보며, 여러모로 기대되는 손님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 * *
그로부터 며칠 후.
세리아의 상태는 전과 비교했을 때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전보다 더 나빠지진 않았으나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상태였기에 케스터 일원은 진이 다 빠질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오늘은 그들이 기다리던 손님이 오는 날이었다.
그가 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희망을 엿보았지만, 막상 손님이 방문하니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세리아는 자고 있어.”
따각따각.
남성용 구두가 계단에 닿는 소리가 소름 끼칠 정도로 오싹했다. 정확히는 그 구두를 신은 자의 존재감 때문이리라.
손님의 방문 이후 케스터 저택엔 낯선 살기가 감돌았다.
누군가의 살의로 인해 생긴 기운이 아닌, 압도적인 포식자의 등장으로 인한 살벌함이 자연히 깔린 탓이었다.
“들어와.”
끼익.
제리가 문을 열어 주자, 세리아 방에 모인 나머지 형제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에 맞닿았다.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그는 예의 공손한 태도로 인사했고, 동시에 형제들은 깨달았다.
“방문을 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의 포식자는 유엘 리커드였다.
“그래,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
태연한 말과 달리 등줄기엔 식은땀이 흘렀다. 그건 본능적인 긴장과 위축에서 비롯된 반응이었다.
이제 막 성장을 마친 수인 대부분은 넘치는 기운을 잠재우지 못했다.
그건 최종 성장형이 강한 동물일수록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하물며 신생 드래곤이니 오죽할까.
그러나 케스터 가문의 남자들 역시 만만치 않게 강한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지금,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위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가리 형 때보다 심해. 타인이라 더 강하게 느껴지는 걸까.’
첫째인 가리가 드래곤으로 변했을 때도 결코 이 정도는 아니었기에 더 의아했다.
만일 케스터가의 남자들이 아닌 다른 이가 지금 그를 마주했다면, 경직된 채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을 게 틀림없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많이 컸구나, 유엘.”
어릴 때부터 봤던 사이기에 자연히 반말을 했으나, 긴 공백과 낯선 변화에 어색하고 혼란스럽기만 했다.
유엘 리커드는 어릴 적부터 지녔던 특유의 올곧고 친절한 성품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사실상 그 점을 제외하고는 전부 다르게 느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마지막으로 그를 본 마롱은 더욱 경악했는데, 차라리 다른 형제들처럼 몇 년 만에 본다면 모를까.
불과 1년 전에 마주했던 때와 달라진 모습이 적잖은 충격을 안겨 줬다.
‘그때도 굉장히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그는 완연히 성숙한 채였다. 단단하고 떡 벌어진 어깨라든가 온몸에서 흐르는 강인함이라든가.
곱상한 외모는 여전했으나 전과 달리 유순하고 연약한 느낌은 완전히 자취를 감춰 버렸다.
“평범한 드래곤은 아니군.”
그런 유엘의 모습을 마찬가지로 관찰하던 가리는 낮게 읊조렸다.
본디 존재 자체가 평범하지 않은 게 드래곤인데, 그중에서도 평범하지 않다는 그 말에는 형언할 수 없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너, 뭐로 변한 거지?”
가리의 눈이 칼날처럼 예리하게 뜨였다.
직감적으로 그에게서 위험한 기운을 감지한 탓이었다.
“……글쎄요.”
부드러운 음성이 나긋하기만 했다.
그에게서 풍기는 기운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여전히 유엘 리커드라 주장하는 듯한 목소리가 가증스러울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저도 성장이 끝나자마자 온 터라, 조금 혼란스럽네요.”
다정한 미소를 마주한 형제들은 혼란스러운 기색을 숨기고자 애썼다.
유약했던 유엘에 관한 기억과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위압감이 서로 계속해서 충돌한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