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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은 고양인 줄 알았는데!-44화 (44/116)

44화

“뭐가 됐든 기운은 감추도록 해. 세리아에게 좋지 않아.”

그러나 케스터가의 일원답게 내뱉는 목소리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유엘 역시 동의한다는 듯 손가락으로 세리아의 손등을 살며시 쓸며 말했다.

“그 점이라면 괜찮을 거예요. 다행히 상성이 잘 맞는 듯하거든요.”

그의 말대로였다. 만일 상성이 맞지 않았다면, 세리아는 이 엄청난 기운에 눌려 벌써 앓는 소리를 내고도 남았을 터.

그러나 그녀는 너무도 평온해 보였다. 고작 유엘이 살짝 만진 것만으로도 안정을 찾은 듯이.

그건 곧 유엘의 드래곤 보석이 세리아와 상성이 맞는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그래, 네 말대로야. 이토록 편안해 보이는 세리아라니…… 덕분에 한시름 덜었어.”

이제 한동안은 가리가 곁을 지키거나, 무리하게 진통제를 투여할 필요가 없어졌다.

더 희망을 걸어 보자면, 장기적으로도 그러리라.

물론 유엘이 ‘평범한’ 드래곤이라는 전제하의 가정이었지만.

“다른 할 말은 없고?”

그렇기에 이런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다노의 질문에 유엘의 표정이 아주 찰나에 굳어졌다.

그러나 곧 능숙하게 표정을 푼 그는 말없이 세리아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순간 방 안엔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유엘의 표정도 미묘하게 변했다.

특유의 맑은 눈동자가 탁한 호수로 변한 듯했고, 느른하게 입술을 달싹이는 모습은 입맛을 다시는 것만 같은 인상을 줬다.

‘……저게 걱정하는 사람의 표정이라고?’

그러니까, 세리아를 바라보는 눈빛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아주 짧은 순간 그 표정을 목격한 그들은 도리어 착각일 거라고 치부할 정도였다.

게다가 고작 눈빛이었다. 그런 거로 무어라 하기엔, 지금의 유엘에겐 너무도 고맙기만 했다.

“자세한 얘기는 조금 이따 해 드릴게요.”

가만히 세리아를 바라보던 그가 잔잔하게 말문을 텄다.

“그 전에 부탁드릴 게 있어요. 잠시 세리아와 둘이 있어도 될까요?”

“……둘이서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흘긋, 서로를 바라보는 형제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뒤엉켰다.

단숨에 허락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던 새, 세리아가 몸을 뒤척였다.

“편히 잠들 수 있게 해 주려고요.”

그럴싸한 명분이네.

유엘은 남몰래 자조적인 냉소를 지었다.

“……그래, 네가 곁에 있다면 세리아도 더 편히 잘 수 있겠지.”

짧은 정적 끝에 가리가 허락을 표했다.

비록 지금 유엘의 기운이 너무도 압도적이었으나, 그 자체는 굉장히 차분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난동을 부리진 않을 것 같고, 그가 세리아를 해하는 일을 할 린 없었다.

강한 신뢰감이 퍼지자 뒤늦게 가리는 자신이 다소 무례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리커드도 급히 와서 혼란스러울 테니 자리를 비켜 주자.”

맏형이 그리 말하며 움직이니, 나머지 형제들도 머뭇거리다 그 뒤를 따랐다.

하나둘 차분하게 방을 나가자 조용히 문이 닫혔다.

유엘은 ‘그것’이 된 후 더욱 예민해진 청력으로 공자들이 얼마나 이동했는지를 가늠했다.

발걸음 소리가 희미하게 사라지지 않고 인위적으로 뚝 끊겼다.

그건 곧, 그들이 멀지 않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 정도 거리면 충분하겠지.’

‘지금으로선 딱히 소란을 피울 것 같지도 않고.’

자신에 대해 어떤 판단이 내려질지 덤덤하게 예상해 본 유엘은 가리가 앉던 의자에 착석했다.

침대 맡에 앉자, 커튼 틈새로 비치는 노을이 그의 옆얼굴을 적셨다.

빛을 받은 속눈썹이 나긋하게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그 행동이 너무도 고요했기에, 아마 누구도 그의 마음에 어떤 폭풍이 몰아치는 중인지 알 수 없으리라.

“……유엘?”

그때, 잠긴 목소리가 정적을 가르며 그를 불렀다.

섬세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유엘은 그녀의 부름에 미약하게 눈동자를 떨었으나 금세 평온한 목소리로 물었다.

“세리아, 깼어?”

“으응…….”

세리아가 답답한지 이불을 걷으려 꼬물거리자 곧장 그가 도왔다.

“유엘? 진짜 너야?”

꿈인가.

표정에서 생각이 다 드러나자, 유엘이 푸스스 웃으며 다정하게 답했다.

“응, 세리아. 나야.”

부드러운 음성과 달리 왠지 모를 차가운 기운이 그를 맴돌았다.

평소의 세리아라면 뭔가 이상함을 느꼈을 법했으나, 몽롱한 정신 덕에 눈치채지 못하는 지금이 오히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미안, 너무 늦었지?”

공중으로 휘적이는 손을 유엘이 낚아채듯 잡아 내자, 세리아는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맞잡은 손 틈으로 시원한 기류가 흘러 열감을 낮춰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진짜 유엘이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세리아는 이 순간을 꿈이라고 착각했다.

근처로 오기도 힘들어하던 유엘이, 아프다고 반년이 넘도록 연락 한 번 없던 유엘이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날 리 없지.

그런 생각에서 비롯된 판단이었다.

설령 그렇다 한들 아무렴 좋았다.

늘 안달 나게 도망가던 유엘이 눈앞에 있는 것도, 그가 가까이 있자 숨통이 트이는 것만 같이 진정되는 것도, 모두.

“시원하다.”

기분이 좋은지 얇은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성장통이 시작된 후 처음으로 얻게 된 완연한 평온이란.

여전히 꿈과 현실, 그 사이 어딘가를 거닐던 세리아는 별안간 두 팔을 쭉 뻗더니 그대로 유엘의 목을 와락 껴안았다.

“깬 거야?”

아니면 잠에 취한 건가…….

의미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유엘은 시선을 방황하다가 이내 뻣뻣하게 상체를 내렸다.

그러자 껴안기에 수월해진 세리아는 만족스러운 듯 더 깊이 그에게로 파고들었다.

“살 것 같아.”

유엘의 향이 숨통을 트이게 했다.

그의 체온이, 그 속에 품고 있는 드래곤 보석이 통증을 완화해 줬다.

가리와는 또 다른 느낌. 마치 세리아만을 위해 만들어진 특별한 치료제와 같았다.

“유엘…….”

그리움에서 비롯된 친밀한 감정과 통증을 진정시켜 주는 육체적 만족감.

덕분에 세리아는 꿈결을 헤매면서도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마구 비볐다.

부드러운 촉감이 예민한 부분을 지분거림과 동시에 뭉개며 웅얼거리는 속삭임이 은밀하게 귓속을 간지럽혔다.

“……세리아.”

“으응…….”

입술을 억세게 닫으며 뭔가를 억누르는 듯한 표정을 짓던 유엘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네 소식을 듣고 정말 놀랐어. 성장통은 그때로 끝나길 바랐는데.”

너도, 나도.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자조적인 독백이 고요하게 뒤따랐다.

“그래서 이곳까지 오는 내내 고민했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응…….

의미 없는 추임새가 그의 말에 착실하게도 반응했다.

“역시 나는…….”

끝말을 늘어뜨린 그가 상체를 서서히 숙였다.

제게 매달려 있는 팔을 조심스럽게 거둬 다시금 세리아를 침대에 누인 뒤, 유엘은 느리게 다가갔다.

“네게 최선인 선택을 하고 싶어.”

숨결이 맞닿을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지자 달콤한 체취가 아찔할 정도로 훅 풍겨 왔다.

향기 때문일까. 유엘은 심장이 아프게 뛰는 걸 느꼈다.

그래, 덕분에 그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각인’이었다. 블랙 드래곤만이 겪는 독특한 현상.

“내가 ‘그게’ 되어 버렸어.”

의식이 혼몽한 사람에게 하는 말임에도 조심스럽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기어코 그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건, 정말이지…….

“그리고 네게 각인됐어.”

속삭이는 음성이 간지러울 정도로 미약했다.

각인 자체가 두려운 건 아니었다. 애초 크게 낯설지도 않았다.

3차 성장을 한 후 이 방에 처음 들어와 세리아를 본 순간, 본능적으로 각인됐다는 걸 알았으나-이런 감각은 세리아를 처음 봤던 그 어릴 적부터 느껴 왔던 거니까.

그러니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이건 그저 지금껏 사랑해 왔던 세리아를 앞으로도 사랑하겠다는 맹세에 불과했으니까. 다만…….

‘내가 블랙 드래곤이 된 이상 이건 내게 낙인이자 저주가 되겠지.’

세상 그 어떤 천치가 고양이를 상대로 각인될 생각을 할까.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는 점만이 유일한 변명거리에 불과하겠지.

“네가 드래곤이 되어 주면 정말 좋을 텐데.”

그래서 나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지면 좋을 텐데.

불가능에 가까운 희망이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아.”

그러나 그는 얄팍한 소망을 금세 단념하며 약조했다.

“내가 감당할게, 세리아.”

어쩌면 블랙 드래곤이 되어 버린 후로, 열렬한 소원이라든가 행복한 바람 따위는 이루어지지 않으리란 걸 깨달은 탓일지도 몰랐다.

“그 과정에서 혹여 내가 실수하게 되더라도…….”

대신 유엘은 단 하나의 부탁을 말할 뿐이었다.

“날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 줘.”

나지막한 목소리가 헛된 바람처럼 허공에서 흩어졌다.

쓴웃음을 지은 그가 고개를 낮추며 금방이라도 입술을 맞출 것처럼 다가갔다.

그리고 그 순간.

“미워…….”

세리아의 잠꼬대에 가슴이 철렁였다.

“……못 해.”

그러나 뒤이어 들린 말 덕에 잠시간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밉다는 게 아니라…… 미워하지 못한다는 거다.

그 말이 얼마나 큰 무게를 지녔는지, 말한 당사자는 알고 있는 걸까.

“응, 세리아.”

흔들리는 눈동자로 잠든 세리아를 바라보던 유엘은 애써 복잡한 표정을 지웠다.

“네 몫까지…… 내가 날 더 미워할게.”

그래, 그러면 될 거야.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중얼거림이 곧 맞닿은 입술 사이로 파묻혔다.

유엘은 세리아의 향을, 촉감을, 생생한 온기를…… 그 모든 것을 최대한 외면하며 입을 맞췄다.

차근하게 시간을 들이고 숨을 불어넣자, 그의 몸 안에 있던 푸른색 결정이 자연스럽게 세리아에게로 넘어갔다.

이젠 드래곤이 된 그에게 심장과도 같은 드래곤 보석을, 유엘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세리아에게 준 것이다.

뒤따를 고난을 예상 못 한 것은 아니나…… 별다른 수가 없었다.

그에겐 세리아의 회복이 최우선이었으니까.

“……하아.”

얼마간의 접촉 후, 세리아는 응어리졌던 숨을 터트리듯 내뱉었다.

그리고 드래곤 보석이 곧장 효력을 발휘하는 듯, 전에 없던 편안한 표정으로 진정한 단잠에 빠져들었다.

“다행히…….”

아무 일 없었네.

의미심장한 말을 채 끝맺기도 전 무언가 콰직,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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