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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은 고양인 줄 알았는데!-46화 (46/116)

46화

방 안엔 침묵이 감돌았다.

블랙 드래곤이 무엇인지, 각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기보다 한참 약한 상대에게 각인될 경우 무슨 문제가 있는지…….

대략적인 정보만 들었음에도 그 무게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내용을 세리아에겐 비밀로 해 달라?”

“네,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요.”

유엘은 자신이 무엇으로 변했는지, 또 그녀를 위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에 대해 비밀로 하길 원했다.

지금이야 세리아가 안정을 취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석의 힘 때문이었다.

성장통이 끝날 때까지만. 그리고 후유증이 없다는 걸 확인할 때까지만. 그때까지만이라도 비밀로 두자고 제안했다.

“만약 세리아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틀림없이 바로 보석을 되돌려주려고 할 테니까요.”

그러면 모든 일이 부질없어지겠죠.

읊조리는 듯한 말에 공자들은 묵언으로 동의를 표했다. 일단 급한 불부터 꺼야 했다.

하지만 불안정한 드래곤을, 그것도 본 적 없는 블랙 드래곤을 고양이인 세리아의 옆에 둬도 괜찮은 걸까?

공자들의 마음속에 그런 걱정이 조금씩 고개를 들 때쯤, 타이밍 좋게 유엘이 말했다.

“당분간은 괜찮을 거예요. 아직은 스스로 조절할 수 있거든요.”

“그래, 아직은.”

“……언제 자제력을 잃을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만일 그렇게 된다면, 부디 저를 막아 주세요.”

어느 정도의 체념과 타협이 공존하는 어조였다.

예상되는 미래에 골머리가 아픈 듯, 그들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거나 미간을 찌푸리긴 했으나.

“그건 걱정하지 말고.”

그래도 유엘을 다독이고자 애썼다.

이것이 최선이란 걸 알았고, 그가 세리아를 위해 위험 부담을 안은 것에 대해 고맙기만 할 따름이었으니까.

“혹시 세리아가 다른 동물로 성장하진 않을까?”

얘기가 오가던 중, 별안간 든 생각에 류가 희망적인 물음을 던졌다.

만일 세리아가 고양이가 아닌, 그보다 더 강한 존재로 성장했다면?

“그렇게 된다면 걱정할 거리도 없겠지.”

그보다 최상일 수는 없을 터. 지금의 고민도 전부 해결될 수 있었다.

“원체 약한 애라서 그럴 가능성은 없지만…….”

미약하게 반대의 말을 꺼내던 제리는 흘긋 유엘을 보며 중얼거렸다.

“누가 예상했겠어.”

고양이가 블랙 드래곤이 될 줄.

굳이 하지 않은 뒷말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래, 블랙 드래곤이 된 고양이가 눈앞에 있는데, 어쩌면 표범으로 변할지도 모르는 일이지.

누구도 함부로 세리아의 성장형을 예측하진 않았으나, 은근한 기대감이 그들 사이를 채우기 시작한 때였다.

“말씀 중에 실례합니다.”

별안간 방문이 두들겨지더니, 문밖에서 시종이 기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가씨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세리아가?”

그 순간 몇몇은 체통도 잊은 채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가엾은 의자가 그 여파로 휘청이더니 곧 요란하게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통증을 호소하진 않고?”

“예, 이제는 완전히-”

시종이 거기까지 말을 전할 때였다.

그들이 방에서 나가기도 전, 문이 벌컥 열리더니 몽실한 솜사탕 머리가 쏙 들어섰다.

“안녕, 오빠들.”

수수한 드레스로 갈아입은 그녀가 생긋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세리아.”

그녀를 마주한 순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성장이 끝났다는 것을 말이다.

세리아의 모습은 단순히 잠에서 깬 것과는 달랐는데, 깨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도 전보다 아주 건강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금세, 마치 언제 아팠냐는 듯 멀쩡해지다니.

“내 동생.”

벅찬 마음에 달려간 마롱이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자 품에 파묻힌 세리아는 숨 막힌다며 온몸으로 그를 거부했는데, 그런 모습마저도 그녀 같아서 마롱은 또다시 감격했다.

“이제 아픈 곳은 없고? 성장은 다 끝난 거야?”

“으응……. 다 끝났긴 해. 일단 이것 좀 놔 봐.”

양 볼을 꾹 누른 채 요리조리 살펴본 탓에 세리아는 눈조차 제대로 뜨기 힘들었다.

결국엔 강제로 손을 쳐 내고 나서야 마롱이 한 걸음 물러섰다.

“미안, 너무 기뻐서…….”

하지만 해사하게 웃는 오빠 얼굴을 보자니, 세리아도 실없이 콧바람을 픽 내게 됐다.

“괜찮아. 그나저나 다들 모여 있었네? 걱정했-”

……던 거야?

뒤늦게 마롱에게서 벗어난 세리아가 방 안을 쓱 훑었다.

그러자 익숙한 분홍색 머리들 사이에서, 이질적인 흑발이 껴 있는 걸 그제야 발견할 수 있었다.

“……유엘?”

그렇게 물으면서도 세리아는 혹여나 이게 꿈은 아닐까 싶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너무나 보고 싶던 얼굴이 아무렇지도 않게 눈앞에 있다니.

기쁜 건지 놀란 건지, 혹은 둘 다인 건지. 이 감정이 무엇이든 간에 세리아는 찰나에 현실감을 잃은 느낌을 받았다.

“응, 세리아.”

그러나 유엘이 특유의 그 예쁜 미소를 지으며 답하자, 훅 정신이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왜 여기에……?”

“네가 걱정돼서.”

아…… 응.

대답이라기엔 모호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유엘을 응시하던 세리아는 일순 두 눈이 딱 마주치자-

“…….”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해 버렸다.

‘……뭐지?’

쿵쿵. 심장이 예민하게 뛰었다. 얼굴엔 열감이 몰리고 금방이라도 몸이 배배 꼬일 것처럼 차분해지질 못했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그래서 새삼스러워진 걸까.

명확한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세리아는 괜스레 구두코로 바닥을 톡톡 치며 딴청을 부렸다.

‘뭔가 달라진 것도 같고…….’

얼핏 본 유엘은 무도회 때와는 뭔가가 달라진 상태였다.

그새 키가 더 크기라도 한 걸까. 그런 생각과 함께 다시 흘긋 그를 살펴봤다.

확실히 체격이 좋아진 듯했다. 어깨도 더 넓어진 것 같고, 여전히 고운 얼굴이지만 어린 티는 나지 않았다.

‘하기야 유엘도 성장했을 테니까.’

경직된 얼굴로 눈만 깜빡이던 세리아는 흡, 하고 크게 심호흡한 뒤 태연하게 물었다.

“성장은 다 끝난 거지?”

“……응. 끝나자마자 이곳으로 왔어.”

“이제 아프진 않고?”

“괜찮아. 세리아는?”

“나도…… 괜찮아.”

가볍게 안부를 주고받는 것뿐임에도 둘 사이의 기류가 묘해졌다.

아무 말 없이 방관하던 오빠들은 둘을 휙휙 번갈아 보며 분위기 파악을 하고자 노력했다.

왤까. 조용히 사라져 줘야 할 것 같은 이 기분은.

“흠흠, 세리아. 성장이 끝나서 다행이야.”

눈치만 살피던 마롱이 헛기침을 하며 둘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래서, 성장형은 뭐야?”

그리고 망설임 없이 질문했다.

나머지 형제들은 부러 표현하진 않았으나 속으론 마롱에게 박수를 보내며, 은근한 시선으로 세리아를 봤다.

헛된 기대가 순식간에 번쩍이는 섬광처럼 금색 눈동자에 완연하게 타오를 때쯤이었다.

“……뭐긴 뭐겠어.”

그러나 초연한 목소리, 뒤이어 들리는 펑! 소리.

쫑긋-

뒤따라 움찔거리는 머리 위의 고양이 귀 한 쌍까지…….

누가 봐도 고양이인 모습에, 순간 정적이 맴돌았다.

탁.

마롱이 제 이마를 치는 소리가 정적을 깬 유일한 소리였다.

* * *

우선 이 소식을 공자들은 발 빠르게 부모에게 알렸다.

누구보다 기뻐하던 그들은 막내딸은 안고 한참을 둥기둥기 하다가 세리아가 제 방으로 돌아가자-

“그러니까, 이 모든 게 유엘 덕분이란 게냐?”

유엘의 선량한 배려 혹은 희생 덕이란 걸 알게 되자 다시금 안색이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 일에 관해서 직접 얘기를 나눠 봐야겠다며, 조만간 리커드가에 방문하겠다는 결정으로 우선 상황을 일단락했다.

유엘에게 직접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것 역시 잊지 않았으나, 발 빠르게 블랙 드래곤에 관한 조사를 끝마친 뒤라 그런지 눈빛엔 묘한 염려가 섞여 있었다.

아무튼 그들의 은밀한 거래는 자연스레 성사되었다.

또한 세리아에겐 둘의 성장이 끝났으며, 오랜만의 만남이라는 명목으로 유엘이 당분간 저택에 머물기로 했다고 전했다.

‘유엘이 잠시 머물기로 했다니.’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리아는 구름처럼 두둥실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그녀의 성장통이 끝날 때 맞춰 딱 방문했다고 하니 모든 게 꿈결처럼 느껴졌다.

‘그때 유엘 꿈을 꿔서 그런가.’

생각해 보니 참 희한한 꿈이었다.

‘유엘이 드래곤이라니.’

꿈은 반대라던데. 역시 꿈은 꿈인 걸까.

‘그뿐 아니라…… ‘그런’ 꿈도 꿨으니까.’

하나는 유엘이 드래곤인 꿈, 다른 하나는 그와 입을 맞추는 민망한 꿈.

도저히 연관성이라곤 찾을 수 없는 꿈들이었다.

‘그래도 정말 생생했어.’

특히 유엘과 입술이 닿은 순간은 꿈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였다. 온몸으로 퍼진 따스한 느낌은 너무도 기분 좋고 포근했으니까.

생각할 것도 없이 완벽한 꿈 아닌가.

차마 이런 꿈을 꿨다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말도 안 되는 내용투성이었지만 말이다.

‘그간 유엘은 날 피하기 바빴는데, 키스를 할 리가.’

비록 그때의 촉감이 아직도 생생했지만, 그게 현실일 리 없었다.

동시에 무슨 그런 꿈을 다 꿨나 싶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래도 그 꿈이 확실히 길몽인 듯한 게, 어쨌든 유엘이 정말로 제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던가.

적어도 세리아는 그렇게 여겼다.

“유엘!”

“아, 세리아.”

다음 날부터 세리아는 유엘을 찾아갔다.

꽃이 만개한 정원에 서 있는 유엘이라니.

한 폭의 명화같이 아름답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와 처음 만나고 숱한 즐거움을 얻었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 기분 좋은 그리움마저 들었다.

“기분은 어때?”

“최고야.”

몸이 괜찮냐는 말보다 더 마음에 드는 표현이었다.

세리아는 정말로 기분이 좋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발랄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에 꽃들도 즐거운지 바람에 가벼이 흔들렸다.

성년의 날을 맞이해 화려하게 공간을 가득 메웠던 장미는 성장통이 끝난 지금, 구석 한편으로 이동됐다.

대신 유엘과 어린 시절 놀았던 그때의 정원처럼 꾸며졌다.

지독한 성장통을 겪고 난 후, 전에 없던 건강을 찾아서일까. 세상 모든 게 아름답게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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