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유엘이 옆에 있어서 그런가.’
게다가 그 소중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어젯밤, 세리아가 나아진 걸 확인한 가리는 급히 저택을 떠났다.
자리를 더 비울 수 있다고 말은 해 뒀지만, 지금까지 있어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무리했기 때문에 가족들은 서둘러 그를 돌려보냈다.
나머지 형제들 역시 각자의 활동을 시작하면서도 틈틈이 저택에 들를 것을 약속했다.
세리아를 보고 싶다는 진심 어린 명목 그 밑에는 유엘을 감시하고자 함이 짙게 깔려 있었으나, 그녀가 그걸 알 리 없었다.
‘그래도 유엘이 남아 주기로 했으니까, 충분해.’
게다가 전처럼 나를 피하는 것 같지도 않고.
흥흥, 괜히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세리아는 눈동자를 도르륵 굴려 바로 옆에 있는 유엘을 훔쳐봤다.
“……귀걸이 했네?”
그러다 그의 귀에 못 보던 귀걸이가 한 짝 달린 걸 발견했다.
실처럼 얇은 줄이 길게 늘어졌는데 햇빛을 받으니 영롱하게 반짝였다. 게다가 끝에는 채도 낮은 보랏빛 보석도 작게 달려 있었다.
얼핏 봤을 땐 동그란 원석인 줄로만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단순한 원이 아니었다. 물방울 모양도 아닌 것이, 생전 처음 보는 독특한 형태였다.
세리아가 홀린 듯 팔을 뻗어 만져 보려 하자, 유엘은 흠칫 놀라며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다.
“응, 해 봤어.”
그러고서 이런 어색한 반응을 했기에, 세리아 역시 머쓱하게 웃으며 “그렇구나.” 따위의 의미 없는 반응을 했다.
사실 이 상황이 완벽하게 자연스럽지는 않았다.
지금도 둘 사이엔 뭐라 표현하기 힘든 어색함이 감돌았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거겠지. 블랙 드래곤이니 뭐니, 그런 얘기를 끝으로 헤어졌으니까.’
게다가…….
‘데리고 산다느니, 그런 말을 잘도 했었고.’
다시 떠올려 보자니 민망함에 귀가 다 벌게질 정도였다.
아무튼 그런저런 애매한 만남을 마지막으로 다시 재회한 것이니, 조금은 어색할 수밖에.
게다가 이제 두 사람은 성인이었다. 성장도 모두 끝났고, 별일 없다면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할지도 몰랐다.
‘유엘한테 딱히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지도 않고.’
성장이 끝났는데 내 옆에 있다는 건, 별일이 없어서겠지.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그녀가 알기로 블랙 드래곤은 굉장히 난폭하게 군다던데, 유엘은 저렇게 평온하지 않은가.
비록 유엘의 인내심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기에 이렇게 여는 것이었지만.
아무튼, 세리아는 저 홀로 굉장히 만족하는 중이었다.
‘유엘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할까?’
그리고, 같은 마음일까.
섣불리 확신하기엔 가장 비밀스럽고도 변덕스러운 감정 중 하나였다.
이 강렬한 애정이 자신만의 것은 아닐지, 일순 불안감이 들 정도였다.
‘어릴 땐 생각이 표정에서 다 드러나더니.’
어째 클수록 숨기는 능력만 늘어난 듯했다.
흘긋, 유엘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세리아는 저도 모르게 입가 근육이 풀리며 바보 같은 미소를 지을 뻔했다.
흡, 일부러 숨을 삼킨 그녀는 뒤늦은 표정 관리에 열을 올렸다.
‘확실히 뭔가 달라졌어.’
어떻게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지. 그런 신기함마저 들 정도였다.
키도 더 커져서 이젠 완전히 올려다봐야 했고 그간 운동이라도 한 건지 옷태가 숨길 수 없이 드러났다.
반년이 넘도록 아파서 누워 있었단 애가 이렇게 건강해질 수가 있나.
3차 성장의 영향이 아니면 설명이 불가했다.
그러나 세리아는 그런 유엘에게 도리어 친밀함을 느꼈다. 그건 그녀가 드래곤 보석을 품은 탓이지만, 어찌 되었건 잘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세리아는 정말로 그를 낯설어하고도 남았을 테니까.
“머리 잘랐네.”
당사자를 앞에 두고 하던 생각이 한순간에 끊겼다.
그리 말하는 유엘은 집요하리만큼 세리아를 빤히 쳐다봤는데, 그의 짙은 눈빛과 내면 깊숙한 곳에서 풍기는 질척한 느낌이 남달랐다.
왠지 부끄러워진 세리아는 평소보다 배로 눈을 깜빡이며 방황했다.
어떤데? 당돌하게 묻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러나 세리아는 잠시간 우물쭈물하다가 단숨에 용기 내 물었다.
“어떤데?”
“응?”
“별로야?”
그렇게 묻는 눈썹은 불안감에 찌푸려졌고 바짝 올린 입술 밑으로 복숭아의 씨 같은 게 턱 부근에 희미하게 드러났다.
마찬가지로 적잖이 당황한 유엘은 속눈썹을 나풀거리듯 눈을 감았다 떴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는 의문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 채였다.
“안 예뻐?”
그러나 기어코 답을 요구하는 세리아 덕에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뭐라 답해야 하지.
‘그럴 리가.’
세리아는 늘 예뻤다. 어떤 모습을 하든 유엘의 눈엔 언제나 그러했다.
항상 그렇게 느껴 와서일까, 뭔가 변화를 줬다 해서 예쁘다고 하는 건 정말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건 누군가가 유엘을 보고 ‘너 숨 쉬고 있어?’라고 묻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까.
혹자가 들으면 진부한 작업용 멘트라 할지 모르나, 정말로 유엘에겐 그랬다.
“예뻐.”
하여튼 유엘은 그런 생각을 하며 답했다.
그 대답이 너무 당연하단 뉘앙스라, 세리아는 양 머리끝을 붙잡아 얼굴 앞쪽에서 교차시켰다.
쑥스러움에 어릴 때도 하지 않던 행동을 하게 됐다.
하얀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 그래.”
원하는 답을 들었는데, 들어선 안 되는 말을 엿들은 것처럼 기묘한 어색함과 민망함이 몰려들었다.
다급히 화제를 돌려야 했다.
“참, 유엘. 어떻게 됐어?”
“응?”
“성장 말이야.”
성장. 그 말에 유엘의 고운 얼굴이 찰나에 굳어졌다.
그러나 그는 곧 눈을 휘게 접으며 말했다.
“아…… 예상한 대로야.”
어중간한 표현에 세리아의 고개가 절로 갸웃거렸다.
‘유엘이 저런 말을 하는 건 뭔가 숨기고 싶을 땐데.’
원체 착한 애인지라 남을 헷갈리게 만드는 걸 즐기지 않았다. 그런 유엘이 뭔가 어중간하게 행동한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8년이란 세월은 상대가 스스로도 모르는 부분을 알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만일 유엘이 세리아의 이런 관심을 알았다면 기쁨에 귓불을 붉혔을지도 몰랐으나,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아, 고양이구나!’
세리아가 다행히도 그가 의도한 방향으로 오해해 줬으니까. 당분간은 새하얀 거짓말을 할 시기였다.
‘하기야, 말하기 부끄러울 수도 있지.’
그동안 블랙 드래곤이 될지도 모른다는 둥, 이상한 뉘앙스를 풍기며 온갖 분위기는 다 잡지 않았던가.
‘툭 하면 피하고 알 수 없는 말만 해 대고.’
그렇게 거리를 두고자 노력했던 세월이 한순간에 의미 없는 일로 판명 났으니, 민망할 법도 해.
‘다들 사춘기 때 그러곤 하니까.’
세리아는 마치 자신은 사춘기를 겪지 않은 사람처럼 달관한 태도로 판단했다.
귀여운 유엘. 얼마나 밤에 이불을 차고 쑥스러워했을까!
‘어쩌면 지금도 속으론 민망해 죽을 것 같을지도 몰라.’
그래서 저렇게 표정이 미묘한 걸까.
눈치 빠르게 묘한 분위기는 알아차렸으나,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세리아는 속으로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내가 더 아무렇지 않게 대해 줘야지.’
실제로 세리아는 이제 완벽한 앞날을 -정확히는 유엘은 고양이고 자신은 아프지 않다는 착각이지만- 떠올리며, 어느 때보다 즐거워했다.
“다행이야, 유엘.”
“응, 다행이야.”
네게 도움이 되니까.
의뭉스럽지만 올곧은 모순적인 속내를 숨기며 유엘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는 제 미소가 활용도가 높다는 사실을 일찍이 터득했다.
“이제 걱정할 거 없는 거지?”
“네가 나았으니까, 그보다 걱정스러울 일은 이제 없어.”
아직 보석을 돌려받기엔 이르니 사실을 고할 순 없어.
유엘은 그런 생각을 하며 선선히 대답했다.
“뭔가 억울해.”
투정 섞인 목소리가 그저 귀엽게만 느껴졌다.
맞받아치듯 바람이 불며 분홍색 머리카락이 공중으로 살랑였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흔들리는 걸 홀린 듯 보던 유엘은 간헐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드래곤이 된 후 전보다 시야가 트이고 청각이 예민해진 탓일까. 덕분에 형제가 근처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충동에 대한 책임이 분산됐다.
그제야 기이한 안도감을 느꼈다.
“또 고양이잖아. 죽도록 아팠는데.”
난 내가 드래곤이라도 되는 줄 알았잖아.
세리아는 우스갯소리로 한 말에 유엘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너만큼은 아니겠지만.”
“……나?”
“반년이 되도록 아팠는데 너도 고양이잖아. 나보다 더 억울하겠어.”
억울. 그 단어에 그의 눈빛이 묘해졌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처럼 그저 선선한 미소를 자아낼 뿐이다.
“많이 아팠어?”
소식 한 번 못 전해 줄 만큼?
말하지 않았으나 의중이 다분한 물음이었다.
“미안, 소식은 전했어야 했는데.”
“아니야.”
아팠냐 묻는다면, 죽고 싶을 만큼 아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온몸이 산산이 부서지고 뼈 마디마디가 해체됐다가 재조립되는 느낌은 다신 겪고 싶지 않은 고통이었으니까.
이미 겪은 고통에 관해 설명하며 세리아에게 끔찍한 감정의 잔여물을 얹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유엘은 곧장 사과했다. 막연한 상상에서 느낄 섭섭함이 진실을 알고 같이 괴로워하는 것보다야 배로 나을 테니까.
“그래도 꽃은 줬잖아. 잘 받았어.”
싱긋 웃으며 하는 말에는, 결코 티 나지 않을 거라 여겼던 아쉬움이 묻어나 있었다.
말했듯 오랜 세월 함께했다는 건, 스스로 몰랐던 습관이나 혹은 자신도 모르는 속내를 상대가 충분히 간파할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세리아가 그러했다면, 유엘 역시 그러했다.
그는 바로 옆에 있는 꽃 중 가장 눈에 띄는 꽃을 따더니 세리아를 지긋이 응시하며 말했다.
“성인이 된 걸 축하해, 세리아.”
그리고 뒤늦은 축복을 하면서도 세리아의 눈 색과 닮은 샛노란 꽃을 그녀의 귀에 꽂아 줬다.
머리카락을 넘기는 손끝이 섬세하고 부드러웠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하지.
“너의 앞길에 축복이 함께하길.”
“고, 고마워.”
발가락이 말렸다 펴졌다 파도 타듯 꼼실거렸다.
‘이렇게 어색하게 굴면 안 되는데.’
차라리 어릴 적처럼 철없이 굴어야, 그래야…….
돌연 벌떡 몸을 일으킨 세리아는 정원을 헤집을 기세로 뽈뽈대며 돌아다니더니 어디선가 꽃 두 송이를 따 왔다.
“이건…….”
어릴 적 약혼한 날 꽃반지로 만들었던 바로 그 꽃이었다.
유엘의 약지에 엉성하게 꽃 한 송이를 묶은 세리아는 아무 말 없이 남은 꽃 한 송이와 자신의 왼쪽 손을 불쑥 내밀었다.
그 수줍고도 당돌한 행동에 푸스스 웃던 유엘은 군말 없이 반지를 만들어 세리아의 손에 깔끔하게 끼워 넣어 줬다.
“내 앞길에 축복만 있기를.”
과거에 그러했듯, 참으로 세리아다운 선언문을 시작으로 둘만의 의식이 얼떨결에 시작됐다.
유엘은 마치 과거로 돌아간 기분에 꿈결을 거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의 길에 네가 함께하기를.”
다분히 중의적인 표현이었다.
그건 유엘에게 축복이 깃들길 바란단 뜻인 동시에, 언제까지고 함께하자는 뜻이기도 했다.
유엘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세리아가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떨림이 느껴지는 시선으로 응시했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세리아는 변하지 않았다. 변한 건 오롯이 자신뿐.
그렇기에 그는 자신 때문에 이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유엘은 몇 년 전 그때처럼 손가락을 걸며 무효한 약속을 했다.
“언제나 너의 뒤를 따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