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평화롭다.’
따스한 봄날은 포근하다 못해 나른하기까지 했다.
‘유엘은 집중력도 좋네.’
늘어지게 하품을 한 세리아는 책상에 엎드린 채 몰래 그의 옆모습을 훔쳐봤다.
그는 성장통을 겪느라 그간 밀렸던 일을 처리하는 중이었다.
물론 저택을 떠난 상태니, 가볍게 주변인들에게 연락을 돌리는 일 정도였으나.
‘답장만 하다가 하루가 다 가겠어.’
그렇게 느껴질 정도로 유엘은 참, 여러모로 인기가 좋았다.
물론 세리아라고 해서 그와 다른 건 아니었다. 확실히 사교 활동을 해 봐서인지, 아픈 새 초대장이 쏟아졌던 거다.
아무래도 대리인이 세리아가 참석하지 못하는 사정을 알려 준 건지, 다음부턴 걱정과 쾌유를 비는 안부 편지가 쏟아졌다.
‘이런 관심은 또 처음이네.’
형식적인 인사일지도 모르나, 썩 나쁘진 않았다.
그렇기에 세리아 역시 그들에게 답장해 주고자 응접실로 왔던 거다.
그리고 굳이 안락한 방을 벗어난 건, 유엘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찾아와서 좀 놀란 것 같았지만.’
유엘은 그녀의 방문에 당황한 듯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차분하게 맞이했지만 말이다.
‘부끄러워하는 건가?’
흘긋, 또다시 곁눈질로 그를 훑어봤다. 사각사각하는 펜촉 소리가 유엘과 잘 어울렸다.
누가 쳐다보는지도 모르고 저렇게 차분하다는 게-
“집중이 잘 안 돼?”
“……으, 응?”
유엘은 여전히 종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운을 뗐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나긋한지. 세리아는 한발 늦게 화들짝 놀랐다.
“아니, 그게 아니라…….”
졸지에 훔쳐보다 들킨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기분에 다급히 변명했다.
“그러니까…… 아, 소리! 맞아, 소리가 나서 봤어.”
“아, 펜 소리가 컸어? 미안, 혹시 거슬렸어?”
글쓰기를 멈춘 유엘이 미안한 표정을 지은 채 세리아 쪽으로 시선을 틀었다.
“괜찮아! 되게 듣기 좋아.”
그에 당황한 세리아가 엄지까지 치켜들며 칭찬하자, 그제야 유엘은 피식 웃으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다시 들리기 시작한 펜 소리는 전보다 줄어들었다.
‘깜짝이야.’
푹 고개를 숙인 세리아는 심장이 벌렁거리는 걸 느꼈다.
‘언제부터 쳐다보는 걸 눈치챈 거지? 전혀 모르는 줄 알았는데.’
그야 훔쳐본다기엔 꽤 노골적으로 바라보긴 했다지만…….
뭐랄까, 유엘의 반응은 다소 낯설었다.
‘예전이라면 왜 그렇게 보냐면서 얼굴을 붉혔을 텐데.’
지금은 느긋하게 대응할 뿐이었다. 게다가 뭔지 모를 여유로움까지 느껴졌다.
‘확실히 좀 달라진 것 같기도…….’
그가 저택에 머문 지 닷새째. 미묘한 차이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시점이기도 했다.
외적인 면모는 차치하더라도, 유엘의 태도가 오묘해진 건 확실했다.
‘어쩐지 벽이 있는 느낌이랄까.’
세리아는 그의 절친한 친구가 아닌, 사교 활동으로 만난 레이디 중 한 명으로 전락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먼저 다가오지도, 그렇다고 피하지도 않으며 적정 거리를 유지하는 것.
그건 가까운 사람에게는 섭섭함을 불러일으킬 만한 행동이었으니까.
‘근데 또 그렇다기엔 눈빛이…….’
그러나 그가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무어라 말하기 애매한 부분이기에 모른 척하고는 있지만.
빤하고 노골적인 시선은 마치 먹잇감을 바라보는 맹수의 것과 비슷하다는 걸, 유엘은 알고 있을까.
세리아는 자신이 이런 데 예민하다는 걸 알았기에, 애써 무던하게 넘기려 노력했다.
비록 이런 부조화로 인해 점점 유엘이 멀게 느껴지는 듯한 기분은 지울 수 없었지만.
“실례합니다.”
그때, 노크 소리가 상념을 깼다.
세리아는 초대장을 분류하던 작업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세리아 아가씨.”
“무슨 일이야?”
“요한 칼시스 경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끼긱.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엘의 펜촉이 엇나가더니 종이가 부욱 찢겼다.
“……칼시스?”
그리고 그가 고요하게 물었는데, 하마터면 세리아는 왜 그러냐고 되물을 뻔했다.
막상 고개를 돌려 보니 유엘이 언제나처럼 평온한 표정이었길 망정이지.
목소리가 하도 서늘한 바람에 그가 화가 났다고 착각할 뻔했다.
“무작정 찾아온 거야?”
“아뇨, 미리 방문 의사를 밝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알리긴 대체 언제 알렸다는 거야.
당황한 세리아가 서둘러 쌓인 편지들을 뒤적였다.
그러자 초대장 사이에 낀 한 편지의 발신자가 요한이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파묻혀 있다 보니 미처 살펴보지도 못했던 거였다.
“답신도 안 했는데 오다니.”
황당함에 뒤늦게 편지를 펼쳐 보자, 곁에 있던 유엘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칼시스의 성이 아까운 예의네.”
“응?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싱그러운 웃음과 함께 “혼잣말이야.”라며 상황을 정리했다.
“어떻게 할 거야, 세리아?”
“저번에도 만남을 요청한 적이 있어서, 이번엔 만나 봐야겠지. 왜 온 건지라도…… 아.”
그렇게 답하던 세리아는 문득 요한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 참, 다음에 갈 땐 정문 열어 줘요. 줄 게 있으니까.”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가 그렇게 말했었던 것도 같았다.
“아마 나한테 줄 게 있어서 온 걸 거야.”
“줄 거라니?”
세리아가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이자, 유엘이 의자를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가자.”
“……어?”
“괜찮지?”
솔직히 애매한 상황이기는 했다.
세리아나 유엘, 둘 다 성장통으로 사교계에 얼굴을 안 비친 지 오래였으니까.
게다가 유엘은 거의 잠적한 수준인데, 그런 그가 케스터 저택에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쓸데없는 소문이 퍼질 건 불 보듯 뻔했다.
‘물론 우리 둘의 사이가 공공연하다지만.’
이런 모습을 보였다간 모두 보통 사이는 아니라고 눈치챌 터.
‘나야 상관없지만.’
……유엘도 괜찮은 걸까?
그가 먼저 나선 거긴 했으나, 글쎄. 유엘이 근래 들어 다소 낯설게 느껴져서일까. 세리아는 그의 감정에 관해 전만큼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나는 좋아.”
그렇기에 이런 식으로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는 거였다.
세리아의 말에 움찔하던 그는 입가를 한 번 쓸고서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를 유지하며 두 사람은 함께 정문으로 나갔다.
“칼시스 경.”
세리아가 다가가자 육중한 철문이 그제야 열렸다.
대우는 여전하네. 그런 말과 함께 요한은 상관없다는 듯 호쾌하게 입성했다.
“보안이 철저하네요.”
“일정을 잡고 방문하신다면 누구에게나 열리는 문이랍니다.”
“그렇다기엔 거창한 방문은 아니라서.”
은근한 비꼼에도 요한은 요만큼의 타격도 받지 않은 듯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그리고 태연하게 세리아에게로 다가가려는 순간.
“!”
알 수 없는 기세에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뭐지?’
늘 여유롭던 얼굴이 당혹감 때문인지 미세하게 구겨졌다.
요한은 빠르게 그 원인을 찾으려 했고, 머지않아 깨달았다.
“오래간만입니다, 칼시스 경.”
태연하게 자신에게 악수를 건네는 남자에게서 그 형형한 기운이 물씬 풍겼으니 말이다.
“……실례했군요. 함께 있으리라 예상하지 못해서.”
“사정이 있어 잠시 머물고 있습니다. 경께선 어쩐 일이신지.”
신사적인 태도와 달리 온몸으로 풍기는 적대감에 등 털이 쭈뼛 설 정도였다.
그제야 요한은 이상함을 깨달았다.
아무리 상대를 향해 살기를 풍긴다 해도, 보통은 이 정도로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그렇다는 건…….
“줄 게 있어 들렀습니다. 듣자 하니 성장이 끝났다고 하던데.”
그는 미심쩍은 눈으로 유엘을 훑어봤다.
아직 3차 성장을 하지 않은 요한의 현재 성장형은 재규어였다. 개중에서도 강한 편에 속하는 그가 이 정도로 압도적인 힘을 느끼다니.
최소 드래곤, 혹은 그 무언가.
저런 수인 곁에서 잘도 있는 세리아가 신기할 정도였다.
‘또 저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눈을 하고 있지.’
가만 보면 까칠한 척하지만, 세상 무서운 줄 모른다니까.
속으로 쯧, 혀를 찬 요한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세리아를 향해 물었다.
“그러니까 우선 그쪽은…….”
“고양이이에요.”
‘그러니까’ 다음에 올 말은 무수했으나, 세리아는 단번에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깨닫고 답했다.
그야 저런 눈으로 묻는 말이라곤 뻔할 수밖에.
“아, 고양이.”
돌아온 대답 역시 너무 뻔했다. 뻔해서 더 울컥하게 했다!
감흥 없이 대꾸한 말에선 ‘역시’라는 뉘앙스가 다분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유엘 님도 성장이 끝나셨나 봅니다.”
“네, 유엘도 고양이죠.”
당사자인 유엘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 세리아가 당당하게 치고 나섰다.
그게 마치 ‘그래, 우린 고양이들이다!’라고 엄포하는 듯했다.
하도 강한 오빠들 사이에 자라다 보니, 약한 동물이라는 자격지심이라도 생긴 걸까. 괜히 세리아는 저 혼자 울컥했다.
그러나 요한에겐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는 으레 그 한쪽 입꼬리를 씰룩이고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고양이?”
명백한 비아냥이 담긴 물음이었다.
부러 티 내지 않았으나, 유엘에게서 풍기는 살벌한 기세는 무시하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으니까.
“그래요, 고양이.”
요한은 황당함에 반문한 거였으나 놀리는 걸로 받아들인 세리아는 요한의 구두코를 콱 밟아 버리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요한도 강한 수인이랬지. 그래서 유엘까지 얕보는 걸지도 몰라.
형형하게 노려보는 금색 눈빛이 꼭 ‘자기는 3차 성장도 아직 안 했으면서.’라고 몰아붙이는 듯했다.
어쩐지 억울해진 요한은 실없이 허- 하고 헛숨만 내쉴 뿐이었다.
저 순진한 아가씨한테 정신 좀 차리라고 말해 줘야 하나. 요한은 찰나에 고민했다.
웬만하면 남의 일에 간섭하기 싫었으나, 저리 뒀다간 금방이라도 홀라당 잡아먹힐 것만 같았으니까.
유엘은 그런 둘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세리아 쪽으로 상체를 숙이며 조곤조곤 속삭였다.
“칼시스 경과는 무도회 이후에 또 만난 적이 있는 거야?”
유엘의 미소는 예쁜 유리잔에 금이 간 것 같은 느낌을 줬지만, 세리아는 요한을 은근하게 노려보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아, 응. 한 번 있기는 한데…….”
순순히 답하려던 세리아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요한이 도박을 한 뒤 난봉꾼과 실랑이를 벌였던 날을 차마 말하기가 뭣한 탓이었다.
‘아무리 별명이 망나니라지만, 지극히 사생활이기도 하고.’
이런 걸 말했다간 괜히 위험한 일에 나섰다고 유엘에게 한 소리 들을 것만 같았다.
“별일 아니었어.”
따라서 세리아는 얼버무리며 넘기고자 했으나.
“……그래?”
그게 도리어 유엘의 속을 뒤집히게 했다.
“칼시스 경, 용무가 무엇이었죠?”
그래서일까. 온화한 목소리였으나 어딘지 날 선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