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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은 고양인 줄 알았는데!-49화 (49/116)

49화

요한은 무어라 말하려다 꾹 입을 다물며 가져온 상자를 내밀었다.

귀찮은 일 만들지 말자. 그리 되뇌면서.

“이거요.”

한 손에 거칠게 쥐고 온 모양새와 달리 정성스레 포장된 상자는 그 안의 내용물이 퍽 귀하단 걸 몸소 보여 줬다.

“이건…….”

“그쪽 물건 맞죠?”

의심스러운 눈으로 상자를 살펴보던 세리아는 끈을 쭉 당겨 푼 뒤 상자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작은 보석들이 콕콕 박혀 있는 머리핀이 모습을 드러냈다.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는데.”

그토록 애타게 찾던 머리핀이었다.

유엘이 무도회를 기념해 선물해 줬던 머리핀.

잃어버린 뒤 내내 마음이 쓰였던, 그녀가 애정하는 몇 안 되는 장신구였다.

“세리아.”

“아, 이건-”

다시 찾았다는 사실에 심취한 탓에 막상 선물해 준 당사자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잊고 말았다.

깜짝 놀란 세리아는 두 손으로 머리핀을 꼭 쥔 채 변명 아닌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실은 잃어버렸었거든. 그동안 계속 찾았는데…… 요한 경이 갖고 계신 줄 몰랐어.”

“경께선 어디서 찾으신 건가요?”

“무도회장이요. 사실 긴가민가했는데, 맞나 보네.”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어깨를 으쓱이는 모습이 꼭 ‘거봐, 정의의 사도라니까.’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세리아는 머리핀과 유엘을 번갈아 보다가, 요한 쪽으로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찾아 주셔서 감사해요. 이런 사정이 있는 줄도 모르고 환영해 드리지 못한 것을 용서해 주시길.”

“뭐, 전에 도움받은 것도 있으니 넘어가 드리죠.”

능글맞은 대답이 어이없긴 했지만, 덕분에 마음은 가벼워질 수 있었다.

‘그때 바로 뒤쫓았어야 했는데.’

반면 유엘은 쓴 후회를 맛보는 중이었다.

무도회 때 곧장 세리아를 찾았어야 했는데. 인파에 휩쓸려 놓쳐선 안 됐었는데.

자신도 모르는 새 다른 남자와, 그것도 하필이면 요한 칼시스와 엮였었다는 게…….

“친절에 감사드려요, 칼시스 경.”

미치도록 싫었다.

아, 성장하고 성질만 못되진 거 같아서 큰일이야.

그런 생각을 했지만 유엘의 얼굴엔 여전히 선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제가 선물해 준 거라서요.”

그러나 덧붙인 말에는 은근한 힘을 실렸다.

머리핀을 두고 하는 말이었으나 그 속에는 알 수 없는 소유욕이 도사리는 것 같았다.

역시 너무 유치한가.

필요 이상의 감정이 실렸다는 걸 스스로도 느꼈으나 당최 태도가 곱게 나가질 않으니.

‘난감하네.’

“……유엘, 미안. 네가 준 건데 잃어버리기나 하고.”

그 순간, 유엘이 자기가 준 선물을 잃어버려 서운해한다고 오해한 세리아가 황급히 사과했다.

그에 유엘은 다정하게 세리아를 바라보며 귀여운 오해를 바로잡아 주었다.

“네가 원해서 잃어버린 것도 아니잖아. 괜찮아.”

상냥한 음성에 안도한 세리아는 싱그럽게 입술 양 끝을 말아 올렸다.

‘……왜지.’

왜 저기만 봄바람이 부는 것 같지.

그런 희한한 착각과 함께 요한은 둘을 바라봤다. 어쩐지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도 같아, 꼭 쓴 음식이라도 씹은 표정이 나왔다.

애지중지 키운 딸이 웬 속 시꺼먼 남자랑 하하호호 하는 걸 목격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그답지 않게 별생각이 다 들었다.

‘……무슨 상관이야.’

아무렴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기분이 그런 것과는 별개로 세리아와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그래, 아무 사이도 아니긴 한데…….’

흘긋, 세리아를 내려다보자 다시금 목 뒤가 뻐근해지는 게 느껴졌다.

‘뭐가 좋다고 헤실거리는 거야. 멍청하게 웃지만 말고 경계를 좀 하라고.’

그런 생각과 함께 시선을 돌려 유엘을 봤다. 그러자 이번엔 요한의 이마에 핏줄 하나가 도드라지게 올라왔다.

‘앙큼한 놈.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저러는 건지.’

아아, 낮게 탄식한 요한은 자신의 목 뒤를 부여잡았다.

뭐랄까.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

덕분에 모른 척하자니 괘씸하고도 찜찜했고, 그렇다고 진실을 밝히자니 오지랖인 것 같았다.

사정도 제대로 모르는 제삼자가 끼어들 일이 아닌 건 잘 알고 있으니까. 게다가 귀찮은 일엔 휘말리지 말자는 다짐은 이제껏 고수해 온 철칙이기도 했다.

물론 지키지 못한 적이 더 많았지만.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가 남몰래 갑갑해하는 동안, 세리아는 핀을 집어 들어 머리카락에 대강 꽂아 봤다.

그러자 부드러운 머릿결을 타고 금방 주르륵 흘러내렸다.

“내가 해 줄게.”

유엘이 다가가며 말하자, 요한이 막아섰다.

“제가 찾아 줬으니까요. 기왕에 꽂아 주는 것도 제가 해 주죠.”

역시 좀 귀찮아지겠네.

그렇게 느껴지면서도 요한은 자신의 행동을 저지할 수 없었다.

그래, 내가 아무리 타인의 일에 관여 안 하자는 주의라지만-

‘고양이인 척하는 저 가증스러운 꼴을 보고만 있을 순 없지.’

이 정도의 양심은 있어야겠지. 게다가 저 여자에게 도움을 받은 적도 있고.

속으로 여러 이유를 대며 스스로를 이해시킨 요한은 그들에게 성큼 다가갔다.

“삔 꽂는 게 익숙하지 않으실까 봐요. 전 여동생이 있어서 자주 해 줬었거든요.”

“저도 많이 해 봐서 괜찮습니다.”

요한이 딱 잘라 거절했다. 이상한 오기였다.

그에 유엘이 나긋하게 대답했다.

“아, 다른 레이디들께도 해 주셨을 테니 익숙하시겠군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칼시스 경.”

유엘 특유의 예의 바른 어투의 사과였다.

만일 둔한 사람이 들었으면 정말 악의 없는 순수한 사과라 느꼈을지도 몰랐다.

반면 세리아는 속으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유엘이 사람을 앞에다 두고 저런 말을 한다고? 뒤에서도 안 하는 유엘이?

그러고 보니 전에는 조심하라고 했던 것도 같았다.

이쯤 되니 세리아는 혹시 둘이 과거에 원수지간이 아니었나 의심이 들기까지 했다.

그러나 제 기억 속 유엘이 다른 누군가와 문제가 있었던 적은 열 살 때, 루이 일당과 싸운 것 외에는 없었다.

“아무튼 고마워요. 머리핀은 제가 꽂을게요.”

이유가 뭐든 간에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진 이 분위기를 풀 의무를 지게 된 세리아는 다급하게 둘 사이를 치고 들어왔다.

잘못은 없는데, 왠지 둘이 저러는 데에 책임감을 느낀달까.

그도 아니라면 설마 하니 유엘이 질투란 걸 할 리 없다는 생각 때문일까.

세리아는 영문도 모른 채 우선 둘을 저지하려 했다.

그 순간 제 정수리 위로 얄미운 음성이 쏟아졌다.

“솔직히 말해 봐요. 이런 거 혼자 해 본 적 없지.”

그렇게 말한 요한이 세리아의 머리끝에 겨우 매달려 있는 머리핀을 풀었다.

얼떨결에 그에게 머리를 맡기게 된 세리아는 괜히 유엘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되게 부드럽네.’

한편 요한은 태평한 생각을 했다.

‘대강 꽂으면 되려나.’

그러면서도 그는 대체 왜 자신이 이런 일에 굳이 나서는지, 뚜렷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다 됐어요?”

“아직.”

그저 몸이 반응하는 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향수라도 쓰나?’

두어 번 머리를 빗듯이 쓸어내리니, 달큼한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향수라기엔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럽고도 기분 좋은 향이었다. 가까이서 제대로 맡아 보고 싶을 정도로…….

“함부로 만지진 마세요.”

머리를 만지는 시간이 길어져서일까. 아니면 저도 모르게 너무 깊숙이 손을 넣어서일까.

예의 그 예쁜 미소를 유지한 유엘이 세리아를 그로부터 부드럽게 탈출시켜 줬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의 음성만 들었을 때의 얘기였다.

요한의 어깨 부근을 가볍게 톡 치는 동시에 세리아의 팔을 붙잡아 아주 약한 힘으로 끌어당긴 유엘은 세리아가 벗어나자마자 눈을 살벌하게 굳혔다.

“……하.”

그에 요한은 얼떨떨하게 밀려났다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작게 터트렸다.

유엘이 그야말로 ‘톡’ 쳐서 그렇지, 더 힘을 줘 밀었더라면 장성한 요한이라도 단숨에 밀려 대차게 넘어지고도 남을 만한 힘이었다.

그런 주제에 힘없고 나붓한 신사 연기를 잘도 하고 있었다.

요한은 황당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저런 괴물 같은 힘을 가진 남자가 세리아 앞에선 유약한 고양이인 척 행세하는 게 꼴같잖을 정도로.

으득, 턱을 꾹 다문 요한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조심하는 게 좋을걸요. 혹시 몰라, 누가 앙큼한 고양이 행세라도 할지.”

아, 유엘 리커드. 그렇게 안 봤는데.

요한은 이마에 핏줄이 돋는 걸 느끼며 빈정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세리아는 서둘러 이 짧은 만남을 파하고자 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칼시스 경. 다음번에 차라도 한잔 대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래도 사교 활동을 몇 번 해 봤다고 나름 그런저런 말투를 흉내 낼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생긋 웃으며 한 말치고는 ‘됐으니 얼른 가 봐라.’ 따위의 의미가 너무 강렬했다.

때문에, 요한은 어이없다는 듯이 픽 웃으며 순순히 등을 돌렸다.

“진짜 대접할 의향 있으면 그때 부르시고.”

“…….”

“참고로 그 말투 안 어울려요.”

알아 두라고.

끝까지 세리아의 속을 박박 긁어내며, 그는 홀연히 떠났다.

* * *

저택은 다시 평온함을 되찾았다.

이것이 진짜 평온함인지 아니면 폭풍전야인지 쉬이 가늠할 수는 없지만.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어.’

그가 저택에 머무는 기간이 늘어날수록 고민도 커지는 법이었다.

슬슬 보석을 돌려받아야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그러기엔 아직 때가 아닌 듯했다.

직감적으로 세리아의 몸이 그의 보석을 아직 원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으니까.

‘점점 변화가 생기는 것 같은데.’

그러나 문제는 육체적 반응이었다. 각인 상대가 눈앞에 있는데, 보석까지 그에게 넘겨 불안정한 상태라니.

이제껏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게 신기할 정도의 조건이었다.

물론 본능과 관련된 문제도 많았으나, 외부적인 걱정거리도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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